8년 전이었다. 그녀와 헤어지고, 난 고향을 떠나 상경했다. 8년이 지난 지금에서도 잘 모르겠다. 내가 적합한 선택을 한 것인지 말이다. 뭐라고 말로 설명할 수 없지만, 당시의 내 머릿속은 당장 떠나야 한다는 생각으로 가득했다. 나는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머릿속 상념에 붙잡혀 많은 것이 무너져 내렸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 난 울퉁불퉁한 산길을 따라 운행하는 마을버스에 올라타 있다. 8년 만에 고향을 방문하는 참이다. 8년 전과 마찬가지로, 나는 설명할 수 없는 이유로 고향을 찾는다. 그럴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으면 머릿속 상념에 붙잡혀 많은 것이 무너져 내릴 테니까.
습기가 찬 버스 차창에 기대어 차창 너머를 바라본다. 매정한 도시가 서서히 정겨운 나의 고향으로 탈바꿈한다. 건물들이 조금씩 낮아지고, 낮아진 건물들이 허전하지 않도록 초목들이 빈 곳을 채운다. 아스팔트로 중무장한 도로의 껍질이 점차 벗겨진다. 그로 인해 비포장도로의 방문이 잦아진다. 이에 따라 버스의 흔들림이 심해진다. 창가에 앉은 나는 이따금 차가운 유리창에 이마를 부딪히곤 한다. 오묘한 낯빛으로 평생을 억눌러온 멀미도 이겨낸 채, 차가운 유리창의 감촉을 누린다.
10번쯤 이마를 부딪혔을 것이다. 목적지에 도착하여 버스에서 내렸다. 다소 난해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 험한 산길을 같이 이겨낸 기특한 버스를 바라본다. 나의 그윽한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버스는 새 손님을 맞이하러 떠난다. 마치 내가 8년 전에 이곳을 떠난 것처럼, 다소 매정하게.
고향에 도착한 나는 무언가에 홀린 듯 호숫가로 향했다. 그녀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장소이다.
눈을 감고 두 팔을 벌린 채 8년 전 기억의 힘에 의존해 천천히 발길을 옮겨 나갔다. 몇 번이고 크게 휘청거리며 넘어질 뻔한다. 돌부리에 걸리기도 하고, 나뭇가지에 걸리기도 하고, 막다른 길에 다다르기도 한다. 그때마다 눈을 떠서 안구의 힘 빌린다. 마음 같아선 기억에만 의존하고 싶었지만 고집 피우던 소년은 이제 없으니까...
기억 속 고향과 안구에 비친 고향이 사뭇 다르다. 8년이란 세월이 고향의 외향을 깎아내렸기 때문이 아니다. 물론, 크고 작은 요소의 변화가 있긴 하지만 말이다.
8년 동안 가장 많이 변한 것은 나였다. 자신만만하던 고향에 대한 기억이 너무나도 부정확했다. 가끔 눈을 뜨지 않았다면 호숫가를 찾아가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나는 하나의 허수아비가 되어 기억 속 우거진 초목들과 실재하는 초목들 사이 어딘가에 놓여 있다. 복숭아뼈를 스치리라 예상했던 초목들이 생각보다 훨씬 과감하다. 종아리 앞뒤를 더듬더니 이윽고 무릎을 넘어서 허벅지 안팎을 애무하기 시작한다.
방향을 상기시켜 주는 바람의 강도도 예상보다 거세다. 8년 만의 방문에 질책이라도 하는 것인가. 바람결에 짙은 풀 내음이 배어 온다. 기분 좋은 아기 살냄새가 난다. 기억 속 풀 내음 보다 조금 더 짙고 부드럽다.
그렇게 기억과 실물을 열심히 대조해 갔다. 대부분의 기억을 수정해야만 했다.
추억에 젖을 때가 아니라는 듯 분주히 외치는 직박구리의 정겨운 목소리가 들려온다. 나는 발길을 멈추고, 천천히 눈을 뜬다. 눈앞에 드넓은 호수가 펼쳐져 있었다. 나는 재킷 안쪽 주머니에 손을 넣어 누런 종이 한 장을 꺼낸다. 사진 속 호수가 유사한 광활함을 내비친다. 사진 속 호수와 실제 호수를 열심히 대질하며 8년 전 사진을 찍은 정확한 위치를 찾는다. 8년 만에 찾아와 한다는 것이 고작 이런 하찮은 짓이라는 것이 마음에 안 드는지, 직박구리가 내게 정겨운 잔소리를 반복한다. 그러나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조사를 계속한다. 그래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머릿속 상념에 붙잡혀 많은 것이 무너져 내릴 것이 분명하다.
셔츠의 안감이 온통 땀으로 젖어갈 무렵 드디어 사진을 찍은 장소를 찾아냈다. 잔잔한 호수의 물결, 온몸을 뒤덮는 산뜻한 햇살, 가벼운 산들바람과 함께 스며드는 풀 내음, 가끔씩 존재를 알리는 직박구리의 청량한 목소리 등 거의 모든 것이 똑같이 일치한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하나가 빠져 있다. 사진 속 호수를 바라보는 어여쁜 소녀가 이곳에는 없다.
사진의 오른쪽 구석에 소녀가 왼쪽 얼굴만이 드러나도록 선선한 나무 그늘 아래 비스듬히 앉아 있다. 노란 헤어밴드가 소녀의 앳된 얼굴을 담는 우아한 요람이 되어준다. 흐릿한 눈썹, 우수에 빠진 눈동자, 오똑한 코, 그 밑에 놓인 가느다란 붉은 입술, 이것들이 흘러내리지 않도록 가파르게 각진 턱이 힘겹게 받치고 있다.
소녀는 새하얀 원피스를 입고 있었는데, 소매가 살짝 누렇게 물들고, 소녀의 몸에 비해 품이 너무 큰 것이 꼭 누이나 어머니의 옷을 빌려 입은 것 같다는 인상을 주었다.
소녀의 정강이 부분을 덮어야 할 원피스의 원단이 산들바람에 밀려 자꾸 허공을 허우적댔다. 자연스럽게 하얗고 가느다란 소녀의 두 다리에 눈길이 갔다.
소녀가 허약한 체질을 타고났기에 늘 선선한 그늘 밑에서 하루를 보내곤 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우리는 해가 질 때까지 그늘 밑에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했다. 주로... 무슨 이야기를 했더라...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소녀는 빌리 조엘의 노래를 좋아했고, 소녀가 입은 원피스는 소녀의 언니에게 물려받은 것이라 했다. 소녀에게 언니가 두 명 있거나 한 명 있었다고 했는데, 아... 사촌 언니라고 했었나...
젠장,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다. 8년 전 소녀와 헤어지며 그녀에게 부질없는 맹세를 한 것이 기억났다.
'평생 너만을 기억할게, 너만을 추억할게. 너만을 사랑할게. 넌 항상 내 안에 있어, 여기 내 가슴속 깊은 곳에. 울지 마, 너와의 시작과 끝을 눈물로 매듭짓고 싶지 않아.'
이런 식의 되도 않는 맹세를 했다. 물론 정확히 이렇게 말한 것은 아니다. 무엇 하나 확신할 수 없다.
다시 사진 속 소녀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우수에 빠진 눈동자로 호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변하지 않은 것은 이 사진 한 장뿐이다. 모든 것이 일그러지고, 무너져 내렸다. 나는 무너져 내릴 조짐이 보일 때마다 늘 도망치곤 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등 뒤로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고, 따가운 시선이 느껴져도 결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렇게 소녀를 두고 온 것이다. 나 대신 무너져 내릴 제물로써, 그녀를 내세운 것이다. 내가 이 소녀를 8년 동안 사진 속에 가둔 것이다. 8년 전에 비장하게 내뱉은 맹세 하나 기억하지 못하면서 이깟 사진 한 장에 소녀를 가둔 것이다.
노란 헤어밴드를 하고, 하얀 원피스를 입은 네가 어젯밤 꿈에 나타났다. 너는 선명한 왼쪽 얼굴과 비교적 흐릿한 오른쪽 얼굴을 가졌다. 사실 너의 오른쪽 얼굴을 정확히 기억하지 못한다. 사진 속 네 왼쪽 얼굴에 비추어 상상으로 채워낼 따름이다.
'나를 그만 놓아줘.'
네 목소리가 나의 귀에 닿기 전에 산산조각 나서 사방으로 흩어진다. 나는 라디오 잡음과 같은 너의 말을 해석하기 위해 너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본다.
그러자 너의 오른 얼굴이 물감을 엎은 수채화 그림처럼 흘러내린다.
왼쪽 얼굴은 그대로 둔 채 흐릿한 오른쪽 얼굴만이 흘러내린다.
나는 너의 오른쪽 얼굴을 기억해 내기 위해 노력한다.
하지만 그럴수록 너의 오른쪽 얼굴은 더욱 빠르게 흘러내린다.
나의 오른쪽 눈가가 촉촉이 젖는다.
이윽고 수많은 눈물이 나의 오른뺨을 훑고 흘러내린다.
우리는 흘러내리는 서로의 뺨을 속절없이 바라본다.
"나를 그만 놓아줘."
드디어 산산조각난 너의 목소리가 한 곳에 응축되어 고막에 닿는다.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다.
어디선가 시끄러운 자명종 소리가 들려온다.
그제야 나는 이곳이 꿈속이라는 것을 자각한다.
나는 너를 붙잡기 위해 손을 뻗는다.
절반의 얼굴이 흘러내린 너도 나를 향해 손을 뻗는다.
우리의 손이 맞닿으려는 찰나에 가상의 공간이 완전히 허물어지고 만다.
나의 얼굴은 눈물에 축축이 젖은 채, 축축한 베개 위로 놓여 있다.
고개를 살짝 들어 탁자 위에 놓인 사진을 바라본다.
그곳에 네가 있다.
여전히 우수에 빠진 왼쪽 얼굴만을 보인 채로.
꿈속 소녀는 내게 말했다. '그만 나를 놓아줘.'
이 또한 내가 만든 환영일지도 모른다. 어느 것도 확신할 수 없는 것이 인생이다. 비장한 맹세를 하더라도, 소녀의 얼굴이 흘러내리는 것을 막지 못한다.
평생 살아온 고향이라고 자신해 봤자, 무엇 하나 정확히 기억하지 못한다.
8년 전 고향을 떠날 때도 정확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 아니다.
그저 어떠한 상념이 내 머릿속을 가득 채웠고, 나는 그것에 무너져 내리기 싫었다.
오늘도 마찬가지이다. 8년 만에 명확한 이유 없이 고향을 찾아왔고, 이제 오른손에 들린 누런 종이를 떠나보내려 한다.
나는 누런 종이를 잔잔한 호수의 물결 위에 띄운다.
8년 전에 소녀의 유골을 뿌린 그곳에, 오늘 나는 소녀의 마지막 잔해를 뿌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