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연말정산
올해 나의 일상의 가장 큰 변화라면 혼자 살게 된 것이다. 잠자고 그저 휴식하는 공간이었던 집이, 나의 의식주를 영위하기 위한 생존의 공간으로 변화하였다. 처음 하는 살림살이라 매우 재미나게 하고 있긴 한데, 덕분에 새롭게 생긴 루틴들도 많다.
유튜브와 함께 식사하는 습관이 생겼다.
적막하게 혼자 밥먹는게 어색한데 티브이도 없다보니 유튜브를 반려식사인으로 삼게되었다. 식사를 준비하면서 오늘은 뭐를 볼지 고르는게 또 하나의 루틴이 되었다. 유튜브 알고리즘에 빠지다보면 밥 먹는건 10분, 유튜브는 1시간이고 볼 때도 허다하다.
감정을 말로 표현하는 습관이 생겼다.
재밌거나 웃긴 동영상을 보면 예전에는 그냥 끅끅 거리며 웃고 말았는데, 소리내어 웃는 버릇이 생겼다. 친구랑 대화할때처럼 꺄하학 웃고, 아 웃겨죽것네- 라는 혼잣말도 덧붙인다.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도 자꾸 음~~! 맛있구만 이라고 말하고, 뭔가가 잘 안되서 답답할때는 아 짜증나- 라고 확 내뱉어 버린다. 외출 준비를 할 때도 이제 좀 씻어볼까~ 라고 괜히 선언한다. 그냥 혼잣말이 늘어난 것 같기도 한데, 입밖으로 감정을 내뱉으니 내 기분이 확실해지는 것 같아서 뭔가 명쾌해지는 기분도 든다.
건강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건강하게 챙겨 먹는것과 운동을 중요시하기 시작했다. 배달음식이 아닌 이상, 집에서 차려먹는 음식은 최대한 육식과 기름진 것을 멀리하여 노력한다. (지금은 아니지만) 주에 3-4회씩 러닝을 하기 시작했고, 근육을 키우고 싶어 단백질 쉐이크도 따로 챙겨먹기 시작했다. 엄마가 그렇게 먹으라고 했지만 귀찮다고 외면했던 각종 비타민과 영양제들을 이제 내가 사서 먹는다.
샤워를 자주하게 되었다.
본가에 없던 샤워부스가 생긴 덕분에 + 혼자있어서 훌러덩 벗기 쉬우니까 + 본가에 비해 뜨신물이 기다림 없이 바로 나오니까, 샤워를 예전보다 좀 더 자주하게 되었다. 원래 저녁에만 샤워하고 아침에는 머리만 감는 편이었는데, 이제 아침 저녁으로 샤워하는 습관이 생겼다. 새롭게 알게된 샤워의 맛도 있다. 올해 운동을 주기적으로 하게 되면서, 땀 흘린 후의 샤워의 맛을 알게 되었고, 스트레스 받았을 때는 뜨신물로 샤워하면 머리가 가벼워진다는 스트레스=수용성 썰도 믿게 되었다.
되돌아 보는 감정의 소중함을 알게 되었다.
여러 의미를 내포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우선은 회고의 중요성을 알게 되었다. 빌라선샤인을 통해 배웠던 나의 일상과 일을 돌아보는 주간 회고, 그리고 지금 하고 있는 월말 정산과 연말 정산 모두 회고의 하나라고 할 수 있는데, 덕분에 나의 지난 시간의 밀도가 높아졌다. 그저 정신없이 흘러간 시간 끝에서 내가 무엇을 해왔는지 한 가닥 한 가닥 잡고있자니, 흩어져버린 시간이 한 데 모아진 느낌이다. 다시 정리하고 곱씹으며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일은, 지나간 시간의 반복이 아니라 시간을 새롭게 쌓아올려가는 일임을 깨달았다.
또 한편으로는 이미 본 책이나 영화를 반복해서 보는 맛을 알게 되었다. 원래의 나는 한 번 본 콘텐츠는 다시 보는 일이 없었다. 오히려 이미 다 아는 내용인데 무슨 재미로 또 보는지 이해를 못하던 사람이었으나, 올해는 유독 다시 본 영화 다시 본 책이 많았다. 다 아는 내용이라서, 그래서 더 천천히 가만한 호흡으로 보게 되고 그러다보니 콘텐츠를 즐기던 시선에서 맥락 속 감정선에 공감하며 콘텐츠를 바라볼 수 있었다. 올해 다신 본 콘텐츠 중에 가장 인상깊었던 것은 쇼코의 미소(책), 그리고 윤희에게(영화) 이다.
사람들과 부대끼는 것을 좋아하게 되었다.
디폴트가 함께이던 생활에서, 디폴트가 혼자인 생활로 변해서 그런것일지도. 혹은 코로나가 기존의 연결 고리를 단절시켜놓아서 그런 것일수도 있다. 작년보다 사람들과 함께하는 일을 좋아하게 되었고 내가 주도적으로 약속을 잡는 일이 많아졌다.
내 감정에 빠지지 않게 되었다.
우울감이 몰려올때면 그냥 그 감정에 흠뻑 젖어서 괜히 더 침잠하고는 했는데, 이제 그런 감정을 몰려오는 순간을 캐치하고 벗어나는 법을 알게 되었다. 어떤 감정이든 깊게 젖어 있으면 좋을 것이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게 내 안에서 발화된 감정이라면 더욱. 스스로 센치해지지 않으려 노력하다 보니 감정의 변곡선이 작년보다 완만해졌다.
첫직장 퇴사날 퇴근길.
한때는 매일 욕했던 곳이기도 하지만, 막상 떠나려니 소중한 사람들이 떠올라 엉엉 울면서 퇴근했던 기억이 난다. 지금껏 크고 작은 이별을 경험해 봤지만, 어떠한 이별이든 헤어지는 일은 쉽지 않다고 생각했던 시간이었다. 어린애처럼 엉엉 울면서 사람들과 마지막 인사를 하고 눈물 바람으로 종로 한복판을 걸었던 기억이 난다. 언제쯤 이런 일에 의연해질 수 있을까 생각이 들었지만, 그만큼 애정과 소중함이 컸던 곳이었음을 생각하면 앞으로도 이별은 평생 어려운 일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모순적인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뭐 덤덤하지만, 첫직장을 떠나는 마음은 너무도 애렸음을 ㅎ
4월 꽃이 막 필 무렵, 휴가를 내고 집 앞 성북천을 산책했던 순간이 기억에 남는다.
독립하고 처음 나가본 집 앞 산책이었다. 저녁에 잠깐씩 산책을 나간적은 있었지만, 따스한 대낮에 동네를 거닐어 본 것은 그 때가 처음이었던 것 같다. 이제 나는 혼자 산다는 설레임이 당시의 풍경을 바라보는 내 눈빛에 고스란히 담겼던 것 같다. 꽃 봉오리가 조금씩 올라오고 앙상했던 가지에 파란 새싹이 솓아오르는 봄의 풍경이 그냥 그 자체로 내 마음과 같았다. 수많은 봄을 맞이했지만, 이토록 설레고 기대가 되는 봄은 아주 오랜만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봄의 기운을 가득 받으며 속으로 아 행복하다- 라고 되내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쫄지마! 할 수 있다!
올해 일적으로 힘들었던 순간이 많았다. 얼마전 이직했던 것까지 포함하면 더더욱.
제한된 기한 내에 내가 할 수 있을까, 좋은 결과물을 낼 수 있을까, 새로운 곳에서 적응할 수 있을까, 처음부터 다시 일을 배울 수 있을까 등등. 스스로의 가능성에 의문을 던지게끔 만드는 상황들이 너무도 많았다. 회사생활이 참으로 쉽지 않다고 느낀 한 해이기도 했고, 그럼에도 이 산을 넘어야 성장을 한다는 것, 새로운 도전은 성장통을 동반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몸소 느낀 순간들이었다. 그럴 때마다 항상 '쫄지마 할 수 있다'를 수없이 되내었던 것 같다.
감정적이고 멘탈이 약하다는 것이 언제나 나의 컴플렉스처럼 느껴지곤 했는데, 그걸 극복하고싶었던 한 해로 기억된다. 조급해하지 않고 불안해하지 않는 것 또한 감정 연습이 필요한 일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다소 유치해보이지만, 나의 경우 이 '쫄지마 할 수 있다' 를 입밖으로 자꾸 되내어야 연습이 된다는 것 또한 알게 되었다.
앞뒤 생각하지 않고 무조건 러닝하러 나갔다. 내가 왜 힘든지 이 난관을 어떻게 헤쳐나가야할지 고민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나 같은 경우는 같은 자리에서 고민하면 더 침잠하는 유형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한 발짝 떨어져 나와서 바라보아야 무엇이든 해결됨을 깨달았고, 그래서 힘들거나 우울할 때면 일단 나가서 뛰었다. 한 시간 정도 뛰고와서 다시 문제를 바라보면, 마음도 편안해지고 예상치 못했던 솔루션도 나온다. 무엇이든 유쾌한 컨디션일 때 잘 해결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비건 생활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빌라선샤인에서 비건위크를 실천했던 것이 계기가 되었다. 단 한번도 생각해본적 없던 비건 라이프를 약소하게나마 실천하면서, 건강한 식습관에도 자연히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인간이 아닌 다른생명체를 바라보는 시각을 경험하게 되었다. 비건은 그저 채소만 먹는 생활인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대체품이 다양하게 존재하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고 그 대체품이 너무나도 맛있다는 것도 경험할 수 있었다. 올해 먹어보았단 비건 식품 중 가장 맛있었던 것은 망넛이네 찹쌀루니 ㅎㅎ 쉽지 않겠지만, 내년에는 비건 지향의 식생활과 소비를 할 수 있도록 조금이나마 실천 범위를 넓혀보고 싶다.
전반적으로 슴슴해졌다. 자극적인 맛이 싫어졌다. 짜고 달고 매운 음식을 별로 좋아하지 않게 되었다. 김치볶음밥 보다는 계란볶음밥을 좋아하게 되었고, 토마토파스타 보다는 오일파스타가 좋아졌다. 노래도 영상도 자극적인 콘텐츠보다는 잔잔한 것이 좋아졌다. 말초를 자극하는 것은 피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