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경삼림(1/2) 빛나는 내일을 꿈꾸며」에서 이어지는 글입니다.
223의 단골 야식집의 새로운 알바생 페이. 페이는 야식집 사장의 사촌 동생이다. 사람 말소리가 잘 들리지 않을 정도로 노래를 크게 틀어놓고 일하는 페이. 야식집 단골 손님인 633은 노래 소음을 뚫고 간신히 페이에게 샐러드를 주문한다. 질문을 주고받는 이 두 남녀 사이 미묘한 기류가 흐른다. 페이는 633의 근처를 맴돌며 633과 야식집 사장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633은 늘 셰프샐러드를 주문 했었는데, 그의 여자 친구가 별말 없이 잘 먹는다는 이유였다. 그런 그에게 야식집 사장은 피쉬앤칩스를 추천하며 샐러드와 피쉬앤칩스 둘 다 팔아먹는 장사 수완을 보여준다. 다음 방문에 피쉬앤칩스를 주문하는 633에게 사장은 이번엔 피시앤칩스와 피자를 함께 살 것을 추천하며 다시 한 번 장사수완을 발휘해 보려 했지만 이번엔 통하지 않는다. 다음에 찾아온 633은 어째서인지 야식이 아닌 블랙커피를 하나 주문한다. 사장이 물어보니 승무원이었던 연인과 헤어졌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들의 말을 엿듣던 페이는 어딘가 기분 좋아 보였다.
어느 날 낯선 승무원이 야식집에 찾아와 633을 찾는다. 휴가를 떠나 만날 수 없는 633에게 자신의 편지를 전해달라 부탁하고는 떠난다. 찾아온 승무원은 633이 헤어졌다고 말한 전 연인이었다. 낯선 여인이 아는 사람에게 전해진 편지, 심지어 그들의 연애사도 어느 정도 알고 있다면? 야식집 사람 중 그 편지를 안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당연히 페이도 그중 하나였다. 이별을 고하는 내용의 편지와 함께 동봉된 633의 집 열쇠를 확인한다.
633이 휴가를 끝내고 야식집으로 다가오는 걸 발견하자, 사장과 직원들이 갑자기 자리를 비우기 시작했다. 다가오는 633을 눈치채지 못한 페이가 이 부담스러운 일을 맡게 되었다. 멋쩍게 633에게 승무원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는 페이. 633은 차마 편지를 받지 못하고 다음에 다시 찾으러 오겠다며 좀 더 맡아달라고 부탁한다. 633은 아직 이별을 맞이할 준비가 안 됐는지, 병가를 내고 편지를 찾으러 가지 않는다.
633은 이별한 후, 집 안의 모든 것이 슬퍼한다고 느낀다. 많이 사용한 비누에게는 왜이리 야위었냐고 힘내라 말하고 젖은 행주에게는 그만 울고 강해지라는 말을 한다. 그는 지독한 이별 후유증을 앓고 있었다. 그의 슬픔과 미련을 집 안 곳곳에 투사하고 있었다. 감정을 모두 감내하지 못하고 흘러넘치고 있었기에, 그의 눈엔 그의 방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슬퍼 보일 수밖에 없었다. 휴가가 끝나고 우연히 마주친 633은 페이의 무거운 짐을 옮기는 걸 돕는다. 페이는 떠나기 위해 돈을 벌고 있다고 했다. 페이는 캘리포니아를 가고 싶다고 했다. 캘리포니아를 가고 싶은 이유는 그저 ’가고 싶으니까‘, ‘즐거울 것 같아서’이다. 페이는 자신의 감정에 솔직한 사람이었다. 누군가는 그녀를 정착하지 못하고 방황하는 불안한 사람으로 바라볼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그녀는 자신의 마음이 어떤지 잘 아는 사람이었다. 첫눈에 관심을 갖게 된 633의 모든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고, 가게로 무거운 짐을 옮기던 와중에도 마주친 633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말을 거는 게 페이라는 사람이었다. 633처럼 자신의 마음을 제대로 알지 못해서 자신은 멀쩡한데 방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왜 슬프고 힘들어 보이냐고 말을 하진 않는다. 페이는 자신이 원하는 행복을 알고 행복을 향해 떠날 용기가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기에 페이는 과감하게 편지를 우편으로 보내주겠다며 633의 주소를 물어본다. 좋아하는 사람의 집 주소와 열쇠 모두 갖게 된 페이는 은밀한 취미를 꿈꾼다.
페이는 633 몰래 그의 집에서 화분에 물도 주고, 밥도 먹고, 집 안 곳곳을 누비며 어지르고는 다시 원래대로 정리하고 떠난다. 아무도 없는 집에서 벌이는 그녀의 기행이 스토커 같아 보이기보다는 동화같이 귀엽고 꿈 속의 모습처럼 보였다. 방 주인 허락 없이 누군가 몰래 들어왔다가 헤집어 두고 떠나는 모습이 마치 당사자는 아직 모르지만 그의 마음에 들락거리며 점차 사랑에 빠지는 모습으로 표현한 것처럼 다가왔다.
페이의 은밀한 취미생활은 점점 과감해진다. 몰래 찾아와 흔적 없이 떠나는 것을 넘어 자신의 흔적을 잔뜩 남기기 시작한다. 어항에 새로운 물고기를 넣어주고, 식탁보를 바꾸고, 커플 슬리퍼로 추측되는 슬리퍼를 숨기고, 칫솔을 담은 컵을 바꾸고, 전 연인의 승무원 옷을 숨기고, 자신의 어릴 적 사진을 거울에 붙이고, 통조림 라벨을 서로 바꾸고, 옷장엔 화려한 체크 셔츠와 빨간 양말을 넣어둔다. 이게 끝이 아니다. 전 연인의 흔적이 발견된 그의 침대 위에서 분한 듯 발을 동동 구르다 침대보를 바꿨다. 커다란 하얀 곰 인형은 커다란 노란 고양이 인형이 되었다. 633이 위로의 말을 건넸던 오래된 행주도 새것으로 바꿔 놓았다. 자신이 집에 있을 때 전 연인이 보내온 음성메세지를 삭제한 것은 덤이다. 페이의 범죄에 가까워 보이는 기행도 고개를 가로젓게 만들지만, 이쯤 되면 변화를 눈치채지 못하는 633도 만만치 않아 보인다.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기시감에 자신의 집으로 향한 633은 물바다가 되어버린 집을 마주한다. 별안간 집 청소를 하게 된 633은 물난리를 방이 감성적으로 되어 많이 울었나 보다고 덤덤히 말했다. 방이 대신 울어준 만큼 그의 눈에서 눈물은 나지 않았지만, 전 연인에 대한 그리움과 미련, 슬픔이 가득하다 못해 넘쳐흐르고 있었다. 예정에 없던 물난리로 인해 은밀한 취미생활을 이어오던 페이와 마주치게 된다. 페이는 어찌나 당황했는지 말도 안 되는 말로 둘러대다 다리에 쥐가 나버렸다. 633은 이 황당한 손님의 다리에 난 쥐를 풀어줬다. 긴장이 풀리자, 페이는 그의 집 소파에서 잠들어버렸고 633도 그 옆에서 잠들었다.
그날 이후 633은 집에 생긴 변화에 민감해졌다. 페이가 라벨을 죄다 바꿔놓은 탓에 통조림 맛이 이상해졌고, 처음 보는 듯한 사람의 어린 시절 사진이 거울에 붙어있었다. 인형도 생김새가 달라졌고 욕실의 비누는 뚱뚱해졌고 낡고 헤졌었던 행주는 멀쩡해졌다. 자신도 모르게 변해버린 방 안의 모든 것에게 왜 변했냐며 핀잔을 늘어놓았지만, 633의 방이 겪는 변화만큼 실제 633 역시 변화하고 있었다. 633 역시 우연히 길에서 마주친 페이를 그냥 지나치지 못했고, 인사를 나누고 떠나는 페이의 뒤에서 그녀를 바라보며 미소를 짓기도 했었다.
꼬리가 길면 잡히는 법. 물난리 사건을 겪고도 취미생활을 끊지 못한 페이는 결국 현장 검거된다. 이제서야 모든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된 633은 야식집에서 일하고 있는 페이에게 찾아가 맡겨둔 편지를 달라고 말한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당황해하는 그녀에게 다음 날 저녁 술집 캘리포니아에서 보자며 데이트 신청을 했다. 그는 비로소 집에 남아있던 지난 연인의 흔적을 모두 정리하고 페이가 옷장에 몰래 넣어두었던 체크 셔츠와 빨간 양말을 신고 데이트 장소로 나간다.
페이가 633을 좋아하는 건 자명한 사실이다. 좋아하지 않고서야 설명 할 수 없는 일들을 이미 너무나 많이 했다. 633의 집에 무단침입하려던 낌새가 느껴졌던 물난리 때는 도리어 쥐가 난 페이의 다리를 마사지까지 해주고 긴장을 풀어줘서 잠까지 잘 수 있게 해줬다. 심지어 자기 집에 무단침입한 현장을 적발하고 나서도 이 일에 대해선 한 마디도 꺼내지 않았고, 불쑥 찾아와 당황한 페이에게 데이트를 신청한 남자다. 또한 캘리포니아로 떠나고 싶다는 말을 기억하고 첫 데이트 장소로 캘리포니아라는 술집으로 고른 센스 있는 남자다. 이렇게 섬세하고 로맨틱한 남자의 데이트를 거절할 여자가 있을리 없었다. 하지만 세상에 절대라는 건 없다 했던가? 페이는 술집 캘리포니아가 아닌 진짜 캘리포니아로 떠났다. 하염없이 페이를 기다리던 633에게 야식집 사장이 찾아와 페이가 캘리포니아로 떠났다며 페이의 편지를 전할 뿐이었다.
이번 사랑은 다를 거라고, 이번 사랑이 슬픔과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줄거라고 생각했는데, 제대로 시작도 못 하고 맞이한 사랑이 준 충격은 매우 컸다. 그렇게 633은 또다시 편지를 받았고, 633은 또다시 편지를 보지 않았다. 페이에게 바람맞은 그날 들린 편의점에서 우연히 전 연인을 만났다. 뭐? 633이 입은 옷을 훑어보더니 제복입은 모습이 더 멋지다고? 새로운 사랑에게 떠나며 자신의 물건 값까지 부탁하는 그녀를 보고 633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그토록 그리워했던 전 연인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새로운 사랑에게 떠나는 모습을 보며, 자신만큼 지난 인연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다는 사실에 배신감을 느끼고 더는 사랑을 믿지 않겠다고 다짐하진 않았을까? 633은 편의점에서 나오며 입구에 놓인 쓰레기통에 페이의 편지를 버렸다.
곧 비가 쏟아지고 쓰레기통에서 젖어버린 편지를 집어 드는 633. 그는 젖은 편지가 찢어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아주 소중히 펴서 말린다. 페이는 1년 후에 탑승하는 비행기 티켓을 손수 그려 편지로 보냈다. 젖어버린 탓에 장소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633은 과거와 다르게 편지를 버리지 않고 읽었다. 그는 지난 사랑을 답습하지 않았다. 이번엔 지난 사랑과 다른 선택을 함으로써 더 나은 사랑을 꿈꾸고 있었다.
633이 신청한 데이트가 있던 날, 사실 캘리포니아에 페이도 왔었다. 약속 시간보다 일찍 도착한 페이는 캘리포니아에서 진짜 캘리포니아의 날씨를 떠올렸다. 술집 캘리포니아에서 진짜 캘리포니아의 날씨의 알 수 없듯, 페이는 633의 진심을 알 수 없었다. '단지 내가 그를 좋아하기 때문에 내게 관심이 생긴건 아닐까?', '지난 사랑을 잊지 위한 사랑으로 소모되는 건 아닐까' 라는 생각을 떨쳐낼 수 없었다. 페이는 자신의 감정에 솔직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처음엔 633을 알고 싶은 자신의 마음에 과감하게 다가갔고, 지금은 확신할 수 없는 633의 마음에 서로 유예기간을 갖고자 진짜 캘리포니아로 떠났다. 그 사이 승무원이 된 페이는 편지 속 약속한 날짜에 만나기로 한 장소에서 633을 기다렸지만, 장소를 알지 못하는 633이 올 리 없었다. 실망한 페이는 자신이 일하던 사촌오빠네 야식집 앞을 지나는데 반쯤 닫힌 셔터 너머로 익숙한 노래가 들린다. 셔터를 열어보니 그곳엔 633이 있었다. 사촌오빠는 633에게 가게를 팔았고 633은 편지에 알 수 없는 장소 대신 이곳에서 페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페이는 자신의 편지를 버려서 633이 약속 장소에 오지 않은 줄 알았지만, 633은 페이의 편지를 소중히 보관하고 있었다. 페이는 달라진 633의 모습에서 633의 진심을 확인할 수 있었다.
페이는 ‘당신은 옛날 연인이 보낸 편지를 방치했던 것처럼 내가 보낸 편지를 보지도 않았을 테니 오늘 나를 만나러 오지도 않았던 거죠? 당신은 저와 같은 마음이 아니잖아요. 나처럼 좋아하지 않잖아요!’ 라는 말을 하지 않고 오늘 약속 장소에 나오지 않은 633에게 퉁명스럽게 대하며 서운함을 표현했다. 633은 ‘당신의 편지를 버리지 않고 읽었으며 장소를 알 수 없어 날짜를 알아도 당신을 만나러 갈 수 없었다’는 말 한마디 없이, 소중히 간직한 편지를 꺼내 보여주며 새로 티켓을 발급해달라며 자신 역시 페이를 진심으로 좋아하고 있다는 마음을 전달했다. 그제야 페이는 새로 비행기 티켓을 발급해 준다. 난 이 귀엽고 사랑스러운 커플이 정말 마음에 들었다. 사랑의 설렘을 말하는 왕가위의 언어가 너무 마음에 들었다.
223은 낯선 여자에게 용기를 내 다가가 자신의 지난 사랑을 딛고 나아갈 힘을 얻을 수 있었다. 마약 운반책이었던 여자는 그런 어리고 서투른 남자의 모습에서 자신의 손으로 범죄 조직과 연을 끊고 새로운 삶으로 나아갈 용기를 얻었다. 페이는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바라볼 줄 알고 행동으로 옮길 용기가 있는 사람이었다. 633과의 사랑의 시작은 페이의 용기였다. 633은 새로 찾아온 사랑을 과거의 그것과 똑같이 여길 뻔했으나, 용기를 내 과거와는 다른 선택을 하며 더 나은 사랑을 꿈꿨다. 1년 후 찾아온 페이에게 달라진 자신을 보여주며 진심을 전하고 새로운 사랑을 시작할 수 있었다.
사람은 잘 바뀌지 않는 법이다. 상처받고 고통스러운 일을 겪으면, 문제를 파악하고 선택을 바꾸려 하기보단 자신은 힘들게 만든 대상을 원망하는 게 쉬우니까. 그렇게 악순환은 고통을 끊을 수 없게 만들고, 이 과정을 쳇바퀴 돌듯 반복하며, 결국 스스로 선택하기를 포기하고, 운신의 폭은 좁아지며, 점차 삶은 축소되기를 죽을 때까지 반복한다. 더 나아지기 위해선 변화가 필요하다. 자신에게 꼭 맞는 삶의 양식과 방향성을 찾아야 한다. 늘 똑같이 반복하는 것에서 벗어나, 꿈꾸던 삶을 향해 나아가기 위해선 달라져야 할 필요성을 인지하고 받아들여야만 한다. 늘 미지의 영역으로 발을 뻗는 건 불안하고 두려운 일이지만 해내야 한다. 그래야만 더 넓은 시야를 갖고 더 많은 가능성을 마주할 수 있다. 좀 더 용기를 내보고 싶어졌다. 영화 속 네 명의 청춘들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