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를 보고 (1/2)
영화를 많이 보는 편은 아니지만 애니메이션은 꽤 좋아하는 편인데, 지브리 스튜디오 특유의 아주 작고 사소한 부분까지 신경 쓴 게 느껴지는 섬세하고 세밀한 그림과 움직임을 보고 있자면 어느새 나도 그 감각에 동화되어 나의 사소한 몸짓과 눈 깜빡임까지도 의식하게 될 때가 있다. 지브리 스튜디오는 그런 섬세함 위에 애니메이션 특유의 과장된 표현을 조화스럽게 그려내며 생동감을 더해준다. 지브리의 고유한 화풍으로 ChatGPT 이미지 생성하는 게 크게 유행을 할 만큼 매력적인 그림체를 가지고 있고, 순수한 아이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듯한 동화적 표현이 있다. 그렇게 만들어진 차분하지만 인상 깊은 이미지에는 가볍게 부는 바람에도 나부끼는 깃털처럼 몸과 마음을 둥실 거리게 만드는 힘이 있다.
감독의 전기적 내용을 담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며 영화 외적인 배경지식을 요구하는 듯 느껴지고, 다양한 상징과 은유가 복잡하게 구성되어 있어 난해한 영화라는 생각이 들어서 개인적으로 지브리 영화를 좋아함에도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추천하기 어려운 영화 중 하나였다. 우연한 기회로 이 영화를 다시 볼 일이 생기지 않았다면 이 생각은 여전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지브리 영화가 될 만큼은 아니지만, 개인적으로 이 영화를 저평가하고 있지 않았나 생각했다. 영화의 모든 요소를 빠짐없이 이해하려는 노력을 덜어내고 ‘어머니를 잃은 소년이 상처를 받아들이고 성장하는 이야기’로 바라본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시공간을 넘나드는 미지의 세계로 안내하며 아름답고 동화적인 이미지를 선물하기에 충분했다.
늦은 밤 어머니가 있던 병원에 발생한 화재는 어린 소년 마히토의 어머니를 빼앗아갔다. 군수공장을 운영하는 마히토의 아버지는 되레 전쟁으로 삶이 풍족해진 사람이었다. 그래서일까 아내를 잃었지만 아버지의 얼굴에선 그늘을 찾아보긴 힘들다. 아내가 죽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음에도, 죽은 아내를 빼닮은 여동생 나츠코와 재혼한 것도 이해하기 어렵다. 물론 어린 마히토에게는 어머니가 필요하다는 등 나름의 이유가 있었겠지만, 여러모로 아버지를 좋은 시선으로 보긴 어렵다. 마히토 역시 뭐가 뭔지 이해하기 어려운 복잡한 어른들의 사정이 맘에 들지 않아 보였다. 전쟁의 여파를 피해 찾아온 곳은 죽은 어머니와 새엄마가 된 나츠코의 본가 저택이 있는 곳이었다. 어머니를 잃었지만 씩씩하고 어른스러운 모습으로 포장된 마히토, 친절하고 배려심 가득한 말로 맞이하는 나츠코 사이엔 좁혀지지 않는 거리감이 존재했다. 마히토의 씩씩하고 어른스러운 모습은 상처가 아직 아물지 않은 어린 소년의 유약함을 감추고, 나츠코를 무뚝뚝하게 대할 명분과 충분한 거리감을 두기에 좋은 가면이었다.
저택에 들어온 첫날부터 마히토에게 무언의 경고를 남기려는 것처럼, 마히토를 위협하듯 다가오는 왜가리. 마치 마히토가 나츠코를 경계하듯 이 저택도 마히토를 환영하지 않는 것 같은 인상을 준다. 그날 마히토는 꿈을 꾸었다. 소년은 여전히 어머니를 잃은 날 밤 화마를 헤쳐나가고 있었다. 어머니의 죽음을 어린 소년이 받아들이기엔 아직은 너무 어렵고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여리기에 도리어 강한 모습을 드러내는 소년은 등교한 첫날부터 학교에서 마주한 또래 친구와 다퉜다. 집에 돌아가는 길에서 주운 돌로 자신의 머리를 깨고 피를 흘리며 집으로 돌아온 마히토에겐 거짓으로 가득한 악의가 있었다. 큰 상처로 사람들을 속여서 자신과 싸운 친구를 복수하고 싶은 마음이자, 어머니의 자리를 꿰차고 앉은 나츠코를 향한 시위이자, 상실로 인한 상처에서 아직 치유되지 않은 자신을 돌봐줬으면 하는 아버지를 향한 불만이자, 그런 아버지의 관심을 나츠코에게서 자신으로 돌리고 싶은 시기 어린 마음 등 복잡하게 얽혀 스스로 풀어낼 수 없던 꾹꾹 눌러왔던 부정적 감정이 터져 나왔다. 겉으로는 차마 드러내지 못하고 계속해서 억누르고 억눌러온 탓에 마히토의 진심은 악의로 표출되고 말았다.
계속 눈에 밟히던 왜가리의 목소리를 듣게 되는 시점이 스스로 머리를 깬 시점 이후인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불안한 마음과 상처는 점차 소년이 딛고 있는 현실 세계와 꿈과 무의식 세계 사이 경계를 무너뜨리고 있었다. 그런 마히토의 주위를 맴돌며 마히토의 어머니가 살아있다며 마히토를 꾀어내려는 왜가리를 공격하려 목검을 들고 휘둘렀지만, 왜가리는 가볍게 목검을 깨물어부순다. 마히토를 현혹하는 왜가리에게서 나츠코가 활을 쏴서 구해주는 꿈에서 깨며, 마히토는 침대에서 눈을 떴다. 꿈이라기엔 너무나 생생했기에 꿈속에서 자신이 휘둘렀던 목검을 찾아 확인한다. 목검은 제자리에 멀쩡히 있었다. 하지만 마히토가 목검을 들어 올리자 산산조각 나버렸다. 단순한 꿈이 아니라는 걸 깨달은 마히토는 왜가리를 쫓기로 마음먹는다.
말하는 기분 나쁜 왜가리를 쫓기 위해 활을 만들던 중, 마히토는 어머니가 자신을 위해 남긴 책을 발견하게 된다. 「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책으로 이 영화의 모티브가 된 책이기도 했다. 책이 담고 있는 교훈은 곧 어머니의 유언이 되어 마히토에게 상처를 딛고 나아갈 용기를 심어주었다. 책을 읽기 전 나츠코가 숲으로 사라질 때는 방관했지만, 책을 읽고 난 후 마히토는 나츠코를 찾기 위해 직접 숲으로 들어가 탑으로 들어가려 한다. 물론 여전히 마히토는 나츠코를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한 상태였다. 마히토를 따라온 키리코가 자신을 막아설 때 나츠코를 '이모'라고 불렀으며, 설령 왜가리의 말이 함정일지라도 탑으로 들어가려는 이유는 나츠코를 찾기 위해서도 있지만 어머니가 정말 살아있는지 확인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받아들이지 못하던 어머니의 죽음을 직면하려 하고 대립하던 나츠코를 찾아 위험을 감수하려는 모습은 분명히 소년에게 찾아온 변화였다. 그렇게 탑으로 들어가 나츠코를 찾는 이야기는 '어머니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나츠코라는 존재를 받아들이려는 소년의 성장'을 위한 여정이 된다.
마히토는 왜가리의 말이 사실이길 바랐다. 정말로 어른들이 자신을 속였고 어머니가 살아서 내 도움을 원하는 상황이길 바라는 아주 가느다란 한줄기 희망을 품었다. 그래서 함정이라고 생각하면서도 탑 안으로 들어갔다. 물거품이 되어 사라지는 어머니의 형상과 왜가리가 자신의 심장을 빼앗기 위해 탑으로 끌어들였다는 사실을 마주하고 나서야 미뤄왔던 어머니의 죽음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더 이상 어머니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사실 어머니가 남긴 책을 읽고 나츠코를 찾기 위해 탑으로 직접 들어가기로 마음먹고 움직인 시점에서 이미 마히토는 달라지고 있었다. 그래서 마히토는 자신의 실낱같은 희망이 사라졌지만 좌절하지 않는다. 탑에 들어온 이유를 다시금 상기시킨다. '나츠코를 찾아 가족들의 품으로 돌아간다.' 소년은 자신의 활을 맞고 약해진 왜가리를 제압하고 나츠코가 어디 있느냐고 묻는다. 탑의 높은 곳에서 들리는 탑 주인의 명령에 의해 왜가리는 나츠코를 찾기 위한 마히토의 여정의 안내자가 된다.
탑으로 빨려 들어간 마히토는 현실과는 완전히 다른 세상을 마주한다. 펠리컨 무리에 의해 거대한 황금문을 넘어 금지된 영역에 들어서서 벗어나지 못하는 마히토를 구해준 건 젊은 모습을 한 키리코였다. 키리코를 따라다니며 배운 건 삶과 죽음, 생명의 순환이라는 세계를 유지하는 거대한 흐름이었다. 이 세계에서 살생을 허락받은 사람이라는 키리코가 알려준 건 단순히 물고기 손질하는 방법이 아니었다. 자신의 손으로 직접 물고기의 손질하며 마히토가 느낀 것은 생명의 무게였다. 물고기의 생명은 죽음으로 끝나지 않았다. 와라와라가 물고기를 양분 삼아 다음 생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자신이 직접 거둬들인 생명의 무게를 깨달으며 소년의 의식은 조금 성숙해진다. 그래서 다음 생이라는 숭고한 목적으로 날아오르는 와라와라들을 응원했고, 와라와라를 잡아먹는 펠리컨들을 보며 마히토는 분노했다. 또한 펠리컨을 쫓으려 내뿜은 히미의 불꽃에 와라와라들도 함께 불타오르자 히미를 향해서도 불꽃을 쏘지 말라고 고함을 쳤었다.
마히토의 선과 악은 네 편과 내 편처럼 분명하게 구분되는 이분법적인 가치관이었다. 그날 밤 마히토는 죽어가는 펠리컨 하나를 마주한다. 마히토에게 펠리컨은 와라와라를 잡아먹는 나쁜 존재이기만 했지만, 죽어가는 펠리컨의 말은 소년의 작은 세계를 깨뜨려주었다. 펠리컨 역시 생존을 위해 와라와라를 먹어야만 이 세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생사의 경계에서 방황하는 또 하나의 생명일 뿐이었다. 펠리컨은 자신도 이런 굴레에서 벗어나고자 했으나 벗어날 수 없는 이 세계를 지옥이라 말하며 자신의 목숨을 거두어달라 부탁한다. 펠리컨의 이야기를 들은 마히토에게 죽음과 선악의 개념은 더욱 입체적으로 변화하며 소년의 의식은 다시 한번 성숙해진다. 마히토는 펠리컨을 더 이상 악한 존재로 바라보지 않게 되었다. 마히토는 존중의 의미로 펠리컨을 땅에 묻어준다.
물고기가 양분되어 다음 생을 향해 날아오르는 와라와라처럼, 어머니의 가르침은 사라지지 않고 마히토에게 이어져 자신과 함께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떤 악한 존재에 의해 어머니의 죽음이 발생한 것으로 여겨 소년의 분노가 향할 곳을 찾아 헤매고 있었다면, 변화한 선과 악에 대한 가치관은 소년 안에 끓어오르는 분노를 사그라들게 만들었다. 죽음은 생명의 순환 속에서 아주 자연스러운 일부일 뿐, 어머니를 죽인 건 병원 관계자도 아니고 아버지도 아니고 자신도 아니었다. 죽음을 받아들이고 나면 비로소 계속해서 삶을 이어나갈 미래가 찾아온다. 물고기와 와라와라 그리고 펠리컨으로 이어지는 하나의 큰 생명의 순환은 마히토에게 죽음을 더 이상 부정적인 개념에서 머무르지 않게 만들고 있었다.
성숙해진 소년은 과거엔 적이었지만 이제는 자신의 안내자가 된 왜가리와 함께 여정을 이어간다. 자신에 의해 힘을 잃은 왜가리의 상처를 치료해 주면서 마히토와 왜가리 사이의 관계에도 변화가 찾아오고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히미를 만나게 된 마히토는 나츠코를 찾아가는 자신의 여정에 대해 설명해 준다. 히미는 나츠코가 자신의 동생이라며 흔쾌히 자신이 나츠코에게 데려다주겠다며 여정에 합류한다. 히미와 마히토는 직접 언급하지 않고도 짧은 대화를 통해 마히토는 히미가 어머니의 어린 시절이라는 사실을, 히미는 마히토가 자신의 자식이자 자신에게 찾아올 죽음에 대해 짐작할 수 있었다. 마히토는 자신을 낳고 화재로 떠나간 어머니와 지금 자신의 눈앞에 있는 어린 모습의 어머니가 다른 사람이라는 걸 알았다. 탑에 들어오고 어머니의 죽음을 받아들이게 되었고 어머니의 죽음은 부정적으로 끝맺지 않고 자신 안에 가르침으로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눈앞의 어머니를 마주하고도 그 어떤 감격의 재회 없이 '나츠코를 찾아 가족들의 품으로 돌아간다.'는 탑에 들어온 목적을 향해 나아갈 수 있었다. 소년은 상처를 마주하고 받아들이며, 상처는 아물고 새살이 돋아나고 있었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를 보고 (2/2)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