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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pse Sep 15. 2015

배려

071202 in 1pagestory


모해?
  
  가끔 잊을 때마다  아니 잊으려고, 잊혀졌다고 생각할 때마다 띠링- 하고 울리는 문자메세지 도착소리. 거기에 적힌 단 두글자. 이름은 보지 않아도 누군지 알고 있다. 아니 이름은 뜨지 않는다. 그냥 낯익은 번호 10자리가 문자의 마지막에 가지런히 놓여 있다. 잊을 수 없는 번호. 그가 핸드폰을 장만하러 갈 때 함께 있었다.

  
  “ 뒷자리 4자리 고르실 수 있으세요. 뭐로 하시겠어요? ”
  점원의 친절한 말에 그는 나를 봤다.
  
  “ 3927 ”
  그냥 입에서 나온 번호. 아니 3 곱하기 9는 27. 내가 좋아하는 숫자의 조합.
  
  “ 그 번호 가능하시네요. ”
  점원은 재빠르게 조회를 해보더니. 그렇게 그의 번호가 정해졌다.
  
  그땐 몰랐었다. 내가 좋아하는 번호로 인해서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는 번호가 되어버릴 줄. 만일 알았다면 기억하기 어려운 조합을 생각해냈을텐데. 아니 하다못해 무심코 내가 좋아하는 숫자를 내뱉진 않았겠지. 하긴  앞으로 어찌 될 지 알았다면 내가 이러고 있지도 않겠지.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지금 열심히 사는 것이 허무할 때도 있으니 말이다. 예전 같으면 그의 문자에 기뻐하면서 바로 답장 버튼을 눌렀겠지만. 이제는 아니다. 아니고 싶다. 눈에서 멀어질 수 있도록 책상 서랍을 열고 핸드폰을 넣어버린다.
  
  문득 오늘 한 끼도 먹지 않았단 사실이 떠올랐다. 갑자기 마음이 공허해졌다. 주방으로 가서 커다란 양푼을 꺼내고 밥을 잔뜩 퍼올린다. 있는 반찬과 고추장에 참기름까지 솔솔 뿌리고 그 고소한 냄새를 배경으로 식탁에 앉았다. 수저를 들고 미친 듯이 입에다 밥을 들이부었다. 꾸역꾸역 밥하고 싸움하듯이 한입 한입 전투하는 기분으로 마구 씹었다. 아니 그냥 목으로 넘겼다. 물 한 모금 안 마시고 그 많던 밥을 다 내 뱃속으로 넣어버렸다. 허전한 마음이 덩달아 채워질 거라고 생각했나 보다. 허전한 건  뱃속이 아니라 채울 수 없는 마음인데 단지 내 몸 속 어디라도 채우고 싶었던 걸까.
  
  갑자기 속이 답답해져 왔다. 마음이 답답한 건지 뱃속이 답답한 건지조차 모르게. 왼쪽 가슴 안에 위치한 심장과 왼쪽 가슴 밑에 있는 위가 동시에 아파왔다. 답답해져 옴에 주먹으로 가슴을 치다가 눈물이 나왔다. 나도 모르게 눈에서 뭔가가 쪼로로 떨어진다. 나쁜 자식.
  
  그래. 나 체해서 답답한 거야. 체해서 이렇게 아픈 거야. 그래서 눈물도 나는 거야. 체한 거 가시면 정말 후련해질 거야. 어차피 애써봐도 가시지 않을 답답함이기에 스스로 풀릴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양푼을 싱크대에 놓고 수도를 틀었다. 물줄기가 시원하게 쏟아져 내린다. 내 눈에도 수도꼭지가 달려있어서 시원하게 한번 틀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해본다. 쓱싹- 하고 밥 먹은 흔적들이 조금씩 지워진다. 몽글몽글 거품이 시원하게 나면서 싹싹 잘 닦인다. 내 마음에도 잔뜩 거품 낸 수세미를 들이대고 싶단 충동이 든다. 시원하게 다 씻겨 내려간다면 참 좋겠다고.
  
  방으로 돌아왔다. 굳게 닫힌 서랍 안에서 조용히 잠자고 있을 핸드폰이 문득 떠오른다. 잠시 갈등한다. 결국, 이기지 못하고 열어서는 안 될 서랍을 연다. 동시에  후회가 밀려온다. 그러면서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아무것도 오지 않았을거라 생각했는데 미확인 메시지 표시가 깜박거린다. 난 안심한걸까? 혹은….
  
  바쁘니?
  잘 지내지?
  
  또 3927. 같은 번호를 쓰는 타인이라고 생각해본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누구세요? 라고 물어보고 싶은 충동에 휩싸인다. 이미 넌 내 안에서 지워진 존재라고 외치고 싶다. 그때 벨이 울렸다. 손가락이 자기 멋대로 움직인다. 그리고 입이 말한다.
  
  “ 여...여보세요. ”
  “ 뭐야. 전화는 이리 금방 받으면서 문자는 왜 씹는 거야. ”
  
  낯익은 목소리다. 잊혀지지도 않는 목소리다. 잊으려고 애썼는데 순식간에 살아나는 목소리다. 3927. 역시 그다.
  
  “ 어. 밥 먹느라고…. 지금 봤어. ”
  태연하게 아니 태연한 척 변명을 늘어놓고 있다.
  
  “ 잘 지내지? 진짜 오랜만인 것 같아. 가끔 소식 좀 전하고 그러지. ”
  “ 어. 좀 바빠서…. ”
  
  그렇게 이어지는 그의 말. 난 할 말을 찾기가 힘들다. 아까 체한 속이 더욱 답답해져 온다. 아무렇지도 않게 그는 말을 주저리주저리 이어간다. 그는 까맣게 잊었나보다. 내 마음이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처럼 꼭 그런 것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그렇게 말을 이어간다.
  
  “ 모야, 말 좀 해. 간만에 반갑지도 않은 거야? ”
  혼자 한참 말을 하더니 간신히 응대만 해주는 나에게 참 많은 걸 요구한다.
  
  “ 아까 밥 먹은 게 좀 안 좋아서.. 그래서 그래.. ”
  그래. 나 체했었지. 거짓말 안 하고도 변명이 돼서 좋으네. 답답하다고 말할 수 있어서 좋으네. 이러려고 꾸역꾸역 먹었던 걸까.
  
  “ 정말? 약은 먹었어? 약 없음 손이라도 따지. ”
  따발총 같은 걱정이 이어진다. 답답한 속이 더 답답해지는 기분이다.
  
  “ 응. 알았어. 나 좀 쉬어야겠다. ”
  “ 어. 그래그래. 좀 쉬고…. 또 연락하자. 연락 좀 하고 살자. ”
  
  간신히 핸드폰을 내려놨다. 아무렇지도 않게. 아무렇지도 않게 연락해서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그렇게 쉽게. 내가 그의 번호를 지운 것이 무색하게. 내가 그의 목소리를 잊은 것이 무색하게. 이 단 한번의 통화로.
  
  방 안 공기가 너무 답답해서 창문을 열자 비가 후두둑- 하고 떨어지는 게 보인다. 언제부터 비가 내린 걸까.


띠링-


  간만에 목소리
  들으니까 좋더라.
  약 먹고 푹 쉬어.
  또 연락할게.
  
  순간 피식- 하고 웃음이 났다. 그리고 이상하게 순간 뭔가 쑥- 하고 내려갔다.
  아무렇지도 않게….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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