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대연봉을 포기하고 수입 0원을 선택한 40대 부부

단단하게 내 인생을 지켜주던 알 껍질을 똑똑. 두드려보다.

by 보통의 하루

외국계 회사 임원으로 산다는 건 24시간 회사 일을 하는 것과 동일하다. 한국 시간에 맞춰 일하는 것은 당연하고, 저녁에는 본사와 한국이 속한 아시아 리전의 여러 나라와 시간을 맞춰 회의에 참석해야 한다. 그러다 보면 저녁 7-9시는 리전 미팅, 밤 10-12시에는 글로벌 미팅, 때론 유럽과는 오전 5-7시에 미팅이 잡히기도 한다. 코로나 전까지는 출장도 많았다. 둘째는 첫째보다 예민한 기질의 아이 었고 두 아이의 엄마가 된 후 출장스케줄은 항상 여유 시간 1도 없이 빡빡하게, 공식 회의가 시작 직전 새벽에 도착해서 회의 참석하고, 마지막 회의가 끝나면 그 길로 공항으로 가서 비행기 타고 한국으로 돌아와 아이들과 마주했다. 당연한 내 삶이라 생각했고 남들도 이렇게 다 힘들게 살아내고 있다고 위로했다.


어쩌면 37세 본부장이 되고, 남들보다 빨리 이사가 되고 상무가 되면서 성공한 인생이라고 생각했더랬다. 부모님으로부터 건강한 신체 하나 물려받은 흙수저인 내가, 소위 "잘 나가는 워킹맘"이 될 수 있었던 건, 일과 더불어 대부분의 육아까지 도맡아 하느라 우울증 약까지 먹는 남편의 희생이 있었고, 엄마의 부재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아직 초등학생도 안된 두 꼬맹이 아이들의 애처로움이 있었다.

살인적인 스케줄이었지만, 외부로 보여지는 타이틀 덕분에 은행 업무도 회사 내의 직원들 태도도, 업무적으로 누군가를 만나더래도 항상 나는 대우를 받았다. 내가 그만큼 능력이 되는 거라고 스스로를 계속 다독이며 이게 성공한 삶이라고 나와 내 가족을 가스라이팅했다.


첫째 아이의 초등학교 1학년 입학을 앞둔 2023년 겨울. 사립초등학교에 보내면 유치원처럼 6시에 집 앞에 아이가 도착하니 지금처럼 두 아이가 6시경 도착하면 남편이 저녁 육아를 맡아 주면 되겠다고 달라지는 건 없다고 계획을 세웠는데 야속하게도 사립초등학교 추첨에서 보기 좋게 떨어졌다.


남편과 마주 앉아 대안을 논의했다.

요샌 길게는 3개월? 아니면 1개월 정도 휴직 내고 아이가 방과 후 학원 루틴을 혼자 다닐 수 있게 세팅해 주면 된대. 그럼 남편이 회사에 3개월 정도 휴직 이야기 해볼 거야?


11월 중순, 사립 추첨 이후 잠시 혼란스러웠던 우리 가족은 다시 평온해졌고 이 계획대로 남편이 육아휴직만 하면 모든 게 해결되는 거였다. 둘째가 태어났을 때도 남편이 육아 휴직을 냈었다. 이번에도 어떤 불평불만도 없이, 그러자.라고 선택해 준 남편에게 미안함과 고마움으로, 아이 학원이 어디가 좋을지, 스케줄은 어떻게 할지 정도는 내가 직접 짜겠노라고 큰소리쳤다.


학원을 알아보면서 정말 다양하고 많은 학원이 존재하는구나를 느꼈고, 그만큼 수요가 된다는 현실이 조금 서러운 마음이 들었다. 한창 뛰 놀고 에너지를 발산해야 하는 나이에, 학원 뺑뺑이라니,


다들 이렇게 살잖아. 금세 익숙해질 거야.

남편은 무심한 듯 나를 위로했다.


그래! 누구 아들인데, 잘 적응할 거야. 아무렴...

잘 적응하고 나면?

........


늦은 밤 야근거리 잔뜩 들고 퇴근하는 차 안에서, 빨간 신호등과 함께 차도, 내 생각에도 브레이크가 켜졌다.


내 나이 어느덧 40대, 평범한 집에서 나름 열심히 공부해서 대학교를 졸업하고 취업하고 직책도 높아졌는데, 40세가 넘도록 나는 이토록 치열하고 힘겹게 하루하루를 살아내는 중이다. 50세가 되면 퇴직의 걱정이 지금보다 더 많아질 거고, 100세 시대에 아이들은 언제까지 서포트를 할 수 있고, 우리는 언제까지 돈을 벌고 행복할 수 있을지, 걱정만 한가득한 게 40대인 내 일상이지 않던가.


우리 아들이 8살이 지나고 9살 10살, 중학생 고등학생... 클수록 더 좋아지는 게 맞을까?

요새 젊은 세대는 고령화와 성장 둔화로 더더욱 힘겨운 생활을 한다는데, 우리 아이들이 정말 더 좋아지는 게 맞을까? 참고 살다 보면 행복한 날이 정말 오는 게 맞을까?


더 이상 학원 뺑뺑이의 문제가 아니었다.

근본적인, 내 깊은 내면에서의 소리.


아들 덕분에 난생처음 "인생"에 질문을 던졌다. "행복"이라는 건 뭘까? 어떻게 사는 게 행복하게 사는 걸까?

당연했던, 굳건했던 내 인생의 알 껍질에 똑똑. 처음으로 두드려보았고,

허무하리만치 알 껍질은 금이 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