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움의 정의는 ‘혼자가 되어 적적하고 쓸쓸한 느낌’이다. 어떤 사전을 찾아봐도 ‘혼자’, ‘홀로’라는 말이 따라붙는다. 그런데 때때로 사람은 혼자가 아니어도 외롭다. 애인과 함께 영화를 보는 순간에도, 가족과 함께 식사하는 순간에도, 친구와 함께 대화하는 순간에도, 외로움은 언제나 불현듯 찾아온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인간은 무려 80억이 무리를 지어 사는데, 자연에서 이 정도로 큰 규모를 가진 동물은 산호나 곤충같이 군집을 이루는 동물 말고는 찾아보기 힘들다. 포유류, 조류, 바다생물은 말할 것도 없다. 우리와 가장 가까운 친척인 침팬지는 많아 봐야 150마리가 무리 지어 산다. 물론 현실적으로 모든 인간이 상호작용하는 것은 아니다. 그 사실을 감안하더라도 국가 단위로는 몇천만, 지역 단위로는 몇십만, 동네 단위로는 몇만의 다른 인간과 함께한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고 했던가. 지구 전체에 호모 사피엔스가 살아가는 탓에 우리는 좋든 싫든 타인과 다양한 관계를 맺는다. 그 관계란 것은 직접적인 관계만이 아니라 간접적인 관계도 포함한다. 예컨대 내가 이렇게 컴퓨터로 글을 쓰고 여러분이 스마트폰으로 글을 볼 수 있는 이유는 찰스 배비지가 컴퓨터의 개념을 만들었기 때문이고, 에이다 러브레이스가 그것을 해석해 프로그래밍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200년 전으로 돌아갈 필요도 없다. 지금 당장 사용하고 있는 컴퓨터의 부품을 누군가 만들어주지 않았다면, 우리가 이렇게 가상세계에서 소통하는 일은 없었다. 이것은 하나의 예시일 뿐, 비단 컴퓨터에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인간이 누리는 의식주 모두 누군가의 산물이다. 반대로 당신 역시 크든 작든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고 있다.
사람이 열 명이 모인다고 관계도 열 개인 것은 아니다. 관계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열 명의 사람을 각각 A부터 J라고 이름 붙여서 설명하면, A는 나머지 B부터 J까지와 관계를 맺는다. 여기서 AB와 BA가 똑같기 취급되기 때문에 B는 C부터 J까지의 관계를 맺는다. C는 D부터 J까지, D는 F부터 J까지, 그렇게 전부 계산하면, 열 명의 사람이 가지는 관계의 수는 총 45개다. 만약 무리가 백 명이면, 관계는 4,950개나 된다. 삶을 살다 보면 다양한 인연을 만나게 되지만, 막상 가까이 지내는 사람은 정해져 있는 이유다.
이렇게 인간은 자기 의사와 상관없이 인간과 부대끼며 지낸다. 길을 걸으면 어딜 가나 사람이 보인다. 한대기후, 열대기후, 극한의 환경에도 사람이 산다. 그런데도 인간은 여전히 외롭다. 왜냐하면 사람이 많다고 한들, 거대한 지구를 가득 채울 정도는 아니기 때문이다.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같은 침대에 누워 휴식을 취할 때 빼고는 떨어져 각자의 삶을 보낸다. 생물은 본디 하나의 세포로 시작되어 하나의 몸으로 살아간다. 사전적으로 외로움이 혼자일 때 느껴지는 감정이라면, 우리는 늘 외로울 수밖에 없다.
우주 자체가 그렇다. 밤하늘에는 무수히 많은 별이 흩뿌려져 있다. 지구를 누비는 인간과 함께 별들도 우주를 자유롭게 유영한다. 아득한 별을 보고 있노라면, 우주 전체가 별로 가득 채워져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우주는 대부분이 빈 공간이다. 이유는 단순하다. 별은 셀 수 없이 많지만, 우주는 그것보다 가늠할 수 없이 크다. 일례로 지구와 달 사이의 거리는 384,400km다. 이는 수성부터 해왕성까지 태양계 행성을 모두 넣을 수 있을 만큼의 거리다. 인터넷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태양계 그림은 대부분 이해를 돕도록 과장된 모습이다. 멀리서 태양계 전체를 바라본다면, 행성 간 거리에 비해 행성의 크기가 한없이 작아서 맨눈으로는 행성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렇게 먼 존재들에게도 작용하는 힘이 있다. 중력이다. 우리가 느낄 수 없을 만큼 미미할지라도 모든 존재는 분명히 서로를 끌어당긴다. 태양과 지구와 달이 손을 꼭 잡고 있어서 지구의 바다에는 밀물과 썰물이 있다. 육지를 향한 파도의 끊임없는 구애 덕에, 바다에만 있던 생물이 뭍으로 올라오기 시작했다.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 땅에는 숲이 무성해졌고, 또 거기서 시간이 더 지나 숲에 살던 원인 중 일부가 숲을 벗어났다. 대형 고양이과 동물을 피하고자 원인 가족은 손을 맞잡고 걸었다. 천체가 손을 맞잡은 것이 인간의 손을 맞잡게 했다.
자연에 덩그러니 놓인 한 명의 인간은 외롭고 두려울 수밖에 없다. 그래서 타인의 손을 잡고 끊임없이 소통한다. 외로움 자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함께 있단 사실로 큰 위로를 받는다. 인간이 외롭고 별이 외롭고 이 우주가 외롭다. 문명이 발전한 인간은 존재로서 또 외로웠다. 이 광활한 우주에 생물은 정녕 우리밖에 없을까? 살아간다는 것에 고뇌하고 슬퍼하는 또 다른 존재가 있지 않을까? 밤하늘을 수놓는 수많은 별빛 사이에 누군가 간절히 세운 등대의 불빛이 숨어 있지는 않을까?
존재 자체가 외로운 우리에게 별의 반짝임은 혹시나 외계 생물의 간절한 깜빡임이 아닐지 생각하게 만든다. 화성에서 물의 흔적을 발견했을 때, 은하수를 여행하는 보이저호에 골든 레코드를 새겨넣었을 때, 제임스 웹이 메탄과 산소를 지닌 행성을 탐색했을 때, 빙하가 있는 유로파에 탐사선을 보냈을 때, 더 이상 외롭지 않을 것이란 기대감과 설렘으로 인간은 밤잠 설치기도 했다. 외로움이 누구나 느끼는 보편적인 감정이 아니라면, 인간이 왜 집을 벗어나 외부로 향하고 그것도 모자라 우주를 헤엄치겠는가.
영화 <왕의 남자>에서 눈을 잃은 장생은 “나 여기 있고 너 거기 있지”라며 공길과 상호작용한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공길의 목소리는 한없이 밝은 빛이다. 공길의 목소리를 들은 장생은 여전히 외롭지만, 더 이상 슬프지는 않다. 간절히 소리치며 서로의 존재를 인식하고 안심한다. 선천적인 외로움은 그렇게 극복할 수 있다. 우주 자체가 외롭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외로운 이들끼리 별빛을 주고받는 것 말이다. 존재의 외로움을 이해하면,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