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눈맞춤을 통해 감정을 전달하곤 한다. 사랑하는 이들과 따스한 눈빛을 주고받는다. 어떤 사람들은 낯선 동물과 교감하기 위해 눈을 지긋이 쳐다보는 전략을 사용한다. 그런데 사실 동물 세계에서 눈맞춤은 교감보다는 위협에 가깝다. 사자 같은 대형 고양이과 동물은 사냥할 때, 먹이에 시선을 고정한 채 엎드려 접근한다. 올빼미 같은 맹금류들 역시 사냥감을 놓치지 않기 위해 날고 있는 중에도 고개를 고정한다. 이러한 포식자들의 사냥 방식을 오랜 기간 경험한 동물들에게 눈맞춤은 경계해야 할 요소가 되었다.
인간도 낯선 공간에서 누군가 쳐다보고 있다는 느낌이 들 때 종종 긴장한다. 시선이 두려움을 불러일으킨다는 사실을 잘 보여주는 사례가 올빼미나비와 아델리펭귄이다. 올빼미나비는 이름처럼 날개 무늬가 올빼미의 얼굴을 닮았다. 올빼미가 노려보는 듯한 눈 모양이 인상적이다. 아델리펭귄의 눈은 사백안처럼 보이는데, 사실 아델리펭귄의 흰자는 평소에 보이지 않으며, 겉으로 보이는 하얀 부분은 눈이 아니라 흰색 털이다. 아마 두 사례 모두 시선에 불편함을 느끼는 동물의 본능에서 비롯된 진화 방식이라고 생각된다. 눈 모양과 마주친 포식자들이 함부로 접근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 가설을 뒷바침해 주는 재밌는 실험이 있다. 아프리카 오카방고 지역의 사람들은 소를 풀어 키우는데, 사자와 표범 같은 노련한 사냥꾼들이 소를 주기적으로 공격해 머리를 싸매고 있었다. 그러던 중 호주 뉴사우스웨일스 대학에서 비용이 거의 들지 않는 획기적인 아이디어를 낸다. 바로 소 엉덩이에 눈 모양의 그림을 그려 넣는 방법이다. 겨우 이런 처방으로 문제가 해결될지 의심이 드는데, 놀랍게도 엉덩이에 눈 그림을 그려 넣은 후 4년 동안 연구팀은 단 한 마리의 소도 희생시키지 않았다. 때때로 문제는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풀린다.
<차례로 올빼미나비와 아델리펭귄. 눈의 모습이 시선을 끈다.>
눈의 구조는 카메라와 매우 흡사하다. 홍채는 조리개 역할을 한다. 세상에 반사되는 수많은 빛을 얼마나 눈으로 받아들일지 조절하는 것이 홍채다. 수정체는 카메라 렌즈처럼 눈으로 들어온 빛을 적절하게 굴곡시켜 망막에 닿게 만든다. 수정체가 너무 두껍거나 너무 얇으면, 망막에 상이 정확하게 맺히지 않아 뿌옇게 보인다. 망막은 필름이라 볼 수 있다. 빛이 망막에 모여 상이 맺히면, 시신경을 통해 전기신호가 이동하여 뇌에 닿는다. 카메라의 개념이 도입됐을 때는 눈의 구조에 대해서 잘 몰랐다는 설이 있다. 만약 카메라가 눈을 모방하여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면, 일종의 수렴진화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가리비는 200여 개의 푸른 눈을 가지고 있다. 이 눈은 인간의 것과 구조가 사뭇 다르다. 망막이 인간의 눈처럼 안구 안쪽 벽에 붙은 게 아니라, 중앙 쪽에 이중으로 붙어있다. 전면으로 들어온 빛은 그대로 앞쪽 망막에 맺히고, 옆면으로 들어와 벽에 닿은 빛은 반사판에 의해 한 번 반사되고 나서야 뒤쪽 망막에 맺힌다. 이렇게 구조가 거추장스러워 보이는 이유는 넓은 영역의 빛을 받아들일 수 있어 그에 따라 시야각이 넓어지기 때문이다. 카메라와 비슷한 인간의 눈과 달리, 이 구조는 제임스 웹 우주망원경과 유사하다. 가리비는 헤엄도 칠 수 있는데, 하이 테크놀로지의 눈을 가지고 넓은 바다를 유영하는 가리비는 작은 우주선인 셈이다.
<제임스 웹 우주망원경의 구조. 반사판을 통해 빛을 한 곳에 집중시킨다. 그림의 'Secondary Mirror' 부분이 가리비의 눈으로 비유하면 이중 망막인 셈이다.>
우리는 종종 시각이 객관적인 정보라 생각한다. ‘본다’는 것은 어떤 물체에 반사된 빛을 눈이란 기관을 통해 받아들이고 뇌에서 해석하는 과정을 거친다. 우리가 인식할 수는 없어도 빛에는 약 30만 Km/s라는 엄연한 속력이 있다. 물체에 반사된 빛이 날아와 내 뇌에서 해석되기 전까지 미묘한 시간 간극이 있다는 말이다. 만약 빛이 어떤 물체에 반사가 되고, 내 눈으로 날아오는 사이에 빛을 반사한 물체가 사라진다면 어떨까? 아마 이미 반사된 빛을 뇌에서 받아들여 물체가 거기 있다고 우리는 믿지만, 그곳에 실제로 그 물체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이 허황한 이야기가 실제로 일어나고 있다. 기본입자, 전자, 중성자, 양성자, 쿼크, 원자, 분자 등 아주 작은 입자들이 이룬 왕국의 다른 이름은 양자세계다. 양자는 주로 원자 이하의 작은 입자를 두루 표현하는 단어다. 양자는 작다고 표현하기도 민망할 만큼 작아서, 우리가 보려고 빛을 쬔 순간 상태가 변한다. 공던지기를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친구와 5미터 거리에서 농구공을 주고받기는 쉬워도, 골프공을 주고받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보다 더 작은 공기알이나, 공기알보다 더 작은 씨앗은 말할 것도 없다. 질량이 작을수록 미묘한 힘에도 큰 영향을 받는다. 그래서 현재로서는 양자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고 그것을 오롯이 관측할 수 없다.
양자는 모든 사물을 이루고 있는 요소다. 우리는 충분히 붕괴한 입자들의 집합을 보는 것이기 때문에, ‘본다’는 것은 사실 사물의 본질을 꿰뚫는 것이 아니다. 유명한 슈뢰딩거의 사고 실험을 떠올려 보자. 내부를 절대 관측할 수 없는 상자 안에 고양이가 있고, 한 시간 뒤에 정확히 50% 확률로 고양이가 죽는다. 시간이 흐르고 나면 이 고양이는 살아있을까, 죽어있을까? 양자역학의 관점으로는 상자를 열고 관측하기 전까지 삶과 죽음의 상태가 중첩되어 있다. 쉽게 말하면, "까보기 전엔 모른다"는 것이다. 우리 주변에 가득 찬 모든 존재는 안을 들여다볼 수 없는 상자와 같다. 상자를 열기 전 내용물이 무엇이었는지 알 길이 없고 상자를 열면 내용물의 상태가 변해버리지만, 존재를 이해하기 위해선 어쨌거나 일단 상자를 열어야 한다. 이러한 사실을 바탕으로 물리학자 카를로 로벨리는 세상은 존재들의 상호작용으로만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한다.
양자보다 좀 더 일상과 가까운 예로는 동물의 눈을 들 수 있다. 가리비와 인간의 눈의 구조가 다른 것처럼, 몇몇 조류와 파충류는 인간의 가시광선보다 더 넓은 영역의 자외선, 혹은 적외선을 볼 수 있다. 게다가 시각은 몇몇 육지동물의 전유물일 뿐이다. 빛이 들어오지 않는 무광층 심해에서 살아가는 생물들은 눈 이외에도 다양한 감각기관으로 세상을 느낀다. 상어의 코 부분에 위치한 로렌치니 기관이 대표적이다. 상어는 로렌치니 기관을 통해 바닷속 생물들의 몸에서 나오는 전기적 신호를 읽어낸다. 같은 사물이더라도 생물들은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형상을 구성한다. 이마누엘 칸트의 말을 조금 빌리면, 우리가 어떤 대상을 인식하는 것은 감각기관을 통해 전기적 정보를 받아들이고 선험을 통해 개인적으로 해석한, 일종의 상상인 것이다.
인터넷에서 가끔 “색각이상자들이 보는 세상” 등의 제목으로 색을 미묘하게 바꾼 사진들을 소개하곤 한다. 알록달록하지 않은 꽃밭 사진을 보며 “색각이상자들은 아름다운 풍경을 못 보는구나” 식의 대화가 오간다. 그런 사람들의 편견과 달리, 색각이상인 나에게도 세상은 아름답다. 그들이 받아들이는 알록달록과 내가 받아들이는 알록달록은 다르지만, 다양한 색깔들이 어울려 화음을 내는 자연의 숭고함 정도는 어렵지 않게 느낄 수 있다. 그리고 그런 나 또한 부정확한 인식 체계로 세상에 관한 여러 오해를 마음에 짊어지기도 한다.
우리는 어떤 사람의 행동을 보고 그 사람의 옳고 그름을 쉽사리 판단한다. 유명인들의 가십거리와 뉴스를 보고, 혹은 친구와 이웃의 험담을 들으며 타인을 평가하거나 편견을 쌓는다. 그러나 표범이 소 엉덩이에 그려진 눈 그림을 진짜 눈이라고 느끼는 것처럼, 양자의 상태를 확실히 포착할 수 없는 것처럼, 우리가 바라보는 대상의 표면적 형상이 반드시 그 본질을 의미하지 않는다. 시각뿐 아니라, 청각, 후각, 촉각, 미각 등 다른 감각도 마찬가지다. 존재를 단편적인 모습으로만 판단하는 건 합리적이지 않다.
<사진 출처>
https://www.inaturalist.org/photos/59813785?size=original
https://www.inaturalist.org/photos/61983011?size=original
https://www.jwst.nasa.go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