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기적으로 옆집미술에서 전시 관람에세이를 쓰고자 합니다. 이번에는 아트선재센터에서 진행되고 있는 정지현 작가의 《행도그》를 감상해 보았습니다. 이 글은 정답이 아닌 저의 주관적인 감상입니다. 저의 감상이 여러분만의 의미를 발견하는 데에 도움이 되면 좋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전시 제목 ‘행도그(hangdog)’는 클라이밍에서는 등반하다 추락했을 경우 그 자리에서 매달려 있는 것을 뜻하는 용어로 쓰인다고 한다. 등반의 실패, 목적과 떨어져 힘 없이 매달려 있는 상태의 무력함을 작가는 전시의 주제로 잡은 것 같다. 자연을 가공하여 빚어낸 결과물들은 저마다의 기능과 목적을 지니게 된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렇게 담긴 기능과 목적을 고려하여 사물을 선택하며 사용한다. 하지만 선택받지 못하여 목적을 이룰 수 없게 된 사물들은 어떠한가? 선택받지 못하여 방치된 사물은 스스로 자신에게 내재된 목적에 다다를 수 없다. 선택받지 못한 사물들은 그저 힘없이 세상에 매달린 채로 부유할 뿐이다.
인간의 선택에서 멀어진 사물들은 방치됨으로 인하여 점차 인공적인 배치가 해체되어 자연으로 돌아간다. 오랫동안 방치된 인공적인 사물은 자연과 구별되기 어렵다. 왜냐하면 사물의 외관이 마모되어 자연의 물체와 구별이 어렵게 되거나, 인간에게 선택받지 못해 자연 속에 방치되어 본래의 기능을 수행하지 못해 개념적으로 자연과 구별되기 어렵게 되기 때문이다. 후자의 의미로, 자연에 방치된 사물은 인공적임과 자연적임 사이에 위치한 존재이기 때문에 그 자체로 자연스러움에 대한 의문을 던지는 존재가 된다. 정지현작가의 작업에는 이러한 존재적인 의문이 녹아들어 있다.
⟨왼쪽 페기⟩, 2023, 혼합재료,
인간이 제작한 인공적인 사물이란 자연의 재료들을 가공하여 물질들을 인간의 의지에 맞게 재배치한 것이다. 그러므로 자연에서 인공적인 사물을 제작할 때. 사물에 인공적임이라는 속성이 추가된다는 것의 의미는 물질의 성질변화나 물질의 추가가 아닌 물질들의 배치가 인공적임을 뜻한다. 또한 인공적인 배치는 사물을 이루는 물질들의 배치를 의미함과 동시에 사물들끼리의 배치도 의미한다. 칼과 도마가 함께 있음으로써 요리를 수행하듯 사물과 사물 간의 배치도 인간의 의지가 담겨 사물에 인공적인 속성을 가지게 한다.
반대로 인공적인 사물이 자연 속에 녹아든다는 것은 인간의 의지가 담긴 인공적인 배치의 해체를 의미한다. 사물들이 마모되어 그 기능을 다하지 못하거나, 혹은 인간에게 선택을 받지 못해서 다른 사물들과 함께할 수 없을 때, 사물들은 자연스럽게 방치된다. 정지현 작가는 알루미늄망, 폐간판,.. 등과 같은 인간의 선택받지 못하여 인공적임과 거리를 두게 된 사물들을 재료로 사용한다. 방치된 사물들을 작가의 의지를 담아 재배치하여 본래 그 사물이 가지고 있던 목적과 기능에서 거리를 두게 한다. 이때의 거리둠은 인공적임 그 자체에 거리를 두게 만드는 인공적임이 된다. 그렇다면 이러한 거리둠은 자연스러움과 어떤 관계를 가지게 하는가? 이러한 의문스러움을 통하여 정지현 작가의 작품들은 관람자에게 당혹스러운 의문을 제기한다.
⟨공원⟩, 2022, 철재 파이프, 나무, 스테인레스
어떠한 사물을 보며 "이것은 무엇일까?"라고 질문하는 것은 사물의 기능과 목적을 묻는 질문이다. 사물의 기능과 목적은 인공적으로 의도된 물질의 배치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지현 작가의 작품들에 담긴 재료들의 배치는 목적이 느껴지지 않는다. 이것을 다르게 표현하면, 목적 없음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한다. 그것들은 '사람의 손길에서 거리를 둠'이라는 의지를 담고 있는 사물들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느껴지는 '목적이 없음'은 맹목적임이 아니라 '그저 있음'이다. 관람자들의 눈앞에 놓인 인공적인 작품에서 인공적인 목적이 느껴지지 않을 때, 관람자들은 그곳에서 인공적인 배치와 자연의 배치가 혼재된 지점을 경험하게 된다. 이러한 정지현 작가의 작품들은 자연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풍화와 마모와 같은 배치와 함께, 작가의 의도가 담긴 자연을 모방하는 인공적인 재배치로 이루어져 있다. 이러한 두 배치의 구별은 애매한 가름선 속에 뭉개져 있는 상태로 있다. 이러한 배치에 담긴 의지들을 관람자가 뚜렷하게 파악하고자 할 때, 작품에 담긴 의지들은 끝없이 무한히 소급되기 때문이다. 정지현 작가의 작품은 이렇게 인공과 자연의 배치의 불가분성을 수면 위로 드러낸다.
정지현 작가의 작품들은 사물들이 변화해 온 역사나 의지의 끝없는 소급을 해명하지 않은 채 그대로 방치한다. 이러한 방치는 관람자들에게 일종의 공허함을 느끼게 한다. 전시장을 비추고 있는 작가의 <더블데커>(2018, 2022 재제작)는 이러한 공허함을 관람자에게 전달한다. 더블데커의 빛은 관람자를 특정한 목적이나 기능으로 인도하지 않으며 오로지 비출 뿐이다. 더블데커의 빛 앞에서, 그 앞에 놓인 차가운 작품과 관람자의 경계는 모호해진다. 이러한 모호함은 알 수 없음이 가득한 세계 속에 던져진 알 수 없는 나를 느끼게 한다. 이러한 당혹감을 작가의 전시 《행도그》에서 느낄 수 있다. 이때 관람자들은 자연스러움과 인공적임의 경계를 지을 수 없는 당혹감에서 인식의 한계를 느끼게 된다. 관람자들이 인식의 한계에 마주 했을 때 느끼는 표현불가의 영역을 정지현 작가는 새로운 재배치를 통하여 자신의 작업으로 표현하고자 한다.
정지현 작가님의 《행도그》에서 저는 당혹스러움과 공허함, 퀭함..등을 느꼈습니다. 어쩌면 현대인들에게 가장 보편적임과 동시에 가장 외면하기 쉬운 느낌들이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어요. 하지만 오히려 외면하기 쉬운 것들 이기 때문에, 작품들을 보았을 때 이러한 느낌들을 마주하며 생기는 약간의 시원함과 통쾌함 또한 느낄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여러분들은 정지현 작가님의 《행도그》를 감상하며 어떤 느낌을 받으셨나요? 같이 공유해 보았으면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