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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ybk May 25. 2024

나: 영감주머니 6

For all artist

모든 창작자들에게 영감을 전하기 위한 토막글들을 기록해두고자 합니다.  

이름하여 영감주머니~

잘 부탁드립니다:)


1


 흄의 당구공이 굴러간다. 어떠한 자가 당구공을 당구채로 때려 공을 굴리는 것을 우리가 목격했다면, 우리는 그 장면에서 자연스럽게 그 자가 공을 때렸기에 공을 굴렸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이은 이상하다. 사실 당구공은 그 자가 아니라 당구채와 접촉하여 움직인 것이며, 당구공의 속력은 당구대의 마찰에 의해 조절된 것이며,  당구공을 때리고자 한 그 사람의 행동은 그 자의 동기가 선행되었기 때문에 행해진 것이라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여러 가지 요인이 우리가 목격한 장면에 담겨있음에도 불구하고 짧은 순간에 항상 하나의 원인만을 주목다. 어째서 인간은 다양한 원인들 속에서 하나의 원인에게만 특정한 지위를 부여하는가? 여러 요인을 순차적으로 떠올릴 수 있지만, 이것은 여러 요인을 동시에 목격하는 것이 아닌, 시선을 빠르게 바꿔가며 포착하는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결국 우리는 어떠한 사건을 인식하려 할 때 특정한 하나의 원인만을 박제하여 주목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인과성이 인간의 인식의 한계이자 조건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인과성 없이 어떠한 사건도 파악할 수 없다. 우리가 파악하는 아주 단순한 장면 속에도 자연스럽게 인과성이 전제되어 있다. 인간은 특정한 행위에 원인과 결과를 전제하지 않고서는 무언가를 기술할 수도, 사유할 수도 없다. 그런데 이렇게 전제되는 인과성은 필연적이라 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우리의 인과적 예측이나 해석은 과거에 있었던 사건에 기반하여 현재를 판단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당구공을 치면 굴러간다는 지식이 있기에 눈앞의 사람이 당구공을 쳐 굴렸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지식이 선행되지 않았다면, 어떤 자가 당구공을 쳐도 그 공이 혼자 굴러가는 건지, 아니면 주어진 힘에 비해 과도하게 덜 굴러가는 건지, 혹은 더 굴러간 건지 파악할 수 없다. 인간은 과거에 주어진 버릇적인 지식, 혹은 체화된 지식으로 사건의 인과성을 파악한다. 그러나 과거에 일어났던 일이 똑같이 현재에 재현되는 것은 필연이 아니다. 왜냐하면, 엄밀하게 같은 사건은 있을 수 없을뿐더러 사건에는 항상 예측을 벗어나는 일들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항상 당연하다 생각하는 예측을 전제로 사유하여 인과성을 만들어 행동한다.  


 세계는 복합적인 지속에 의해 이루어진다. 그러나 유한한 인간은 이를 전부 파악하지 못하여 주관적인 시선만을 포착할 수 있다. 우리는 인과성이 당연하다 생각하지만 사실 이것은 당연한 것이 아닌 인간의 편의를 위한 도구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계 그 자체에 인과성이 전제되지 않는다는 것을 추론할 수 있다. 인과성이라는 도구가 우리에게 주는 유용함은 매우 다양하지만, 이것의 한계 때문에 우리가 놓치는 것들 또한 분명하다. 세계는 시작과 끝을 포착할 수 없이 변화하는 지속이다. 그 지속 속에 유한한 인간은 잠시 머물며 세계에 동참한다. 다른 시선으로 세계를 바라보면, 우리는 세계를 이성적으로 포착하여 이해하려 할 때 보다 오히려 공감하여 느끼며 참여하고자 할 때 더욱 세계를 잘 파악할 수 있다. 이러한 시선이 현대의 지식이 당연한 우리에게 결여된 것이 아닐지 생각해 본다.


작업노트


 <objet a> 2024, digital photography
<objet a> 2024, digital photography

 예술 작품에 애정을 느끼는 이유가 무엇인가. 단지 자신이 그러한 취향을 가지고 있기에 자연스러운 애정이 따른다는 소박한 믿음은 그 애정을 기성품에 대한 애정과 구별할 수 없는 것으로 만든다. 만약 자신의 애정이 다른 애정 달리 고유한 가치를 지닌다면, 작품에 대한 애정은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를 묻게 한다. "그것이 좋은 것인가?" 그러나 자신의 취향을 좋은 것이라 여기며, 자신과 다른 취향을 가지거나 취향을 고려하지 않는 자들에게, 그들이 좋지 않은 취향을 가졌다는 생각은 그들과의 거리감을 생성한다. 이러한 거리감은 개인에게 일종의 자기애적 표현과 우월감의 표출이 된다. 그러나 좋음 그 자체에 대한 질문이 아니라 단순히 거리감을 위해 자신의 취향을 옹호하는 것이라면, 그 자는 무지함과 공허함 그리고 타자의 시선과 도전 때문에 자신의 취향이란 것을 유지하기 힘들 것이다. 그러니 자신의 취향이 방어적 혹은 치장적 표현이 아닌, 자신의 애정을 소중히 여기는 것이라면, 그 사람은 자연스럽게 질문을 멈출 수 없다. 결국 작품에 대한 사랑은, 질문을 멈출 수 없음 그리고 그 질문을 즐기며 애정하는 것과 다르지 않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애정하는 자들을 이해하기 위해 그들에게 질문할 수 있다. "당신은 무엇을 묻는가?"


2


 우리는 나무를 표현하고자 할 때 ‘나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우리는 왜 ‘나무’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나무를 표현할까? 실제로 밖에 서 있는 나무는 '나무'라는 단어와는 필연적인 관계가 없다. 하지만 우리가 '나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이유는 “나무를 표현할 때에는 ‘나무’라고 칭하자.”라고 사람들 사이에서 약속을 하였기 때문이다. 이렇듯 언어는 암묵적인 약속으로 인하여 사용된다. 타인과의 약속이 없다면 우리는 언어를 사용할 수 없다. 영미권에서는 나무를 ‘tree’라고 표현하기로 약속했기 때문에 한국어를 모르는 그들에게 ‘나무’라고 말하면 의미가 전달되지 않을 것이다. 언어는 암묵적인 상호인정을 통한 기초적인 문화적 장을 형성한다.


 이에 우리가 불편함을 느낄 수 있는 점은, 모든 것에 약속을 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이다. 만약에 우리가 걸어오며 보았던 나무를 나중에 만난 친구에게 설명하고자 할 때, 그 나무를 완벽하게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더욱 자세히 묘사하기 위해 “나뭇잎은 초록색, 키는 3M, 몸통은 고동색...” 이렇게 표현을 하여도 우리의 머릿속에 있는 나무를 온전히 전할 수 없다. 이러한 표현을 들은 친구는 우리가 말한 나무가 아닌 자신의 경험 속의 나무들을 상상하며 우리의 말을 이해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상 속에서는 이러한 세밀함을 요구하지 않기 때문에 불편함을 느끼지 못한다. 자연스럽게 대화로 전달되지 않는 나머지 부분들을 개인의 믿음으로 채우며 대상을 이해하기 때문이다. 일상 속의 대화에서 우리는 잠적적인 대상을 가상의 생성을 통하여 공유한다.


 그러나 우리는 타인에게 감정을 전하고자 할 때 한계를 느낀다. 감정을 언어로 표현하는 순간 그것은 우리의 감정이 아니게 되어버린다. 그것은 단지 가상을 생성하게 해주는 언어로 표출된 문장이 될 뿐이다. 반대로 타인이 우리에게 감정을 표현하고자 대화를 한다면, 그것이 표현되는 순간 그것이 상대방의 감정 그 자체가 아니라는 사실 또한 우리는 알 수 있다. 깊이 고찰할수록 타인과의 대화가 어려운 행위라 느껴진다. 우리는 표현되지 않는 것들을 어떻게 인지해야 할지 막막하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표현은 모든 것을 대변해 주지 않으며 대화의 근본적인 목적이 아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표현된 것의 해석이 아닌 표현을 나누는 행위이다. 이것은 만남을 통해 새로움을 생성하는 창조적 과정이다. 사건, 감정, 가치, 관계 등등 모든 것이 이 과정에서 탄생한다. 우리에게 내재된 창조적 역량을 실현하는 이 과정을 위해 우리는 소통을 한다. 소통의 목적을 소급하다 보면, 결국 표현과 인정을 통한 자기실현으로 이어지는 것 같다.


 타인의 말 그 자체에만 초점을 둔다면 삶 속에서 많은 것들을 지나쳐버릴 것이다. 그러니 언어만을 사랑하지 말자. 상대방이 사랑을 말한다면 그 문장을 사랑하지 말자. 사랑을 표현한 뒤의 잔여감을 사랑하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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