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평론

김지우: 눈 먼 여자들

Kim Jiwoo: The Blind Women

by oybk


눈 먼 여자들

안내를 따라 전시장 안으로 들어서면, 어두운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다. 그 끝에 하나의 신체가 놓여 있다. 자의인지, 타의인지 모른 채, 마치 굴러 떨어진 듯 그 자리에 얹혀 있다. 머리는 더 깊은 곳을 향하고, 그 자세에는 하강의 이미지가 있다. 우리는 생명이 미약한 그 신체 위를 조심스레 건너가야 한다. 계단을 모두 내려서면 또 하나의 신체가 눈앞에 나타난다. 그것은 앉은키 높이의 좁은 통로—혹은 동굴—입구에 누워 있다. 그리고 이번에도 우리는 그 옆을 지나, 어둠 속을 통과해야 한다. 그 순간, 그 신체가 숨을 내쉬듯 낮게 울었다. 질식에서 벗어나려는 듯한, 거의 들리지 않을 듯이 작지만 날카로운 비명이었다. 불편한 통로를 꽤 오래 동안 걸으면 다시 처음 그 통로로 들어왔던 공간에 돌아온다. 이곳은 출구가 없는 입구였다.


다시 계단의 신체를 넘어 올라가면, 또 하나의 독립된 공간을 마주한다. 그곳에도 하나의 신체가 있다. 그것은 고인 웅덩이의 물을 반복적으로 퍼올리며, 손과 얼굴을 적신다. 웅덩이 속에 비친 무언가를 바라볼 수 없기에, 그것이 무엇을 향한 갈망인지 알 수 없다. 차라리 익사하고 싶은 것처럼, 그 신체는 절망을 반복한다. 그 공간을 나와 옆의 좁은 통로를 지나면, 이윽고 거대한 무대가 나타난다. 그러나 무대를 자세히 들여다보려는 순간, 옆에서 기이한 소리가 감각을 붙잡는다. 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리면 또 하나의 방이 있다. 그 방에도 하나의 신체가 있다. 그 신체는 손에 든 나뭇가지를 반복해서 지면에 내리꽂는다. 이윽고 그것을 입속으로 밀어 넣으며 절규한다. 반복되는 절규는 의미를 무력하게 만들고, 우리의 이해를 감각의 안쪽에 가두어 버린다.


뒤로 물러서 무대를 바라보면, 무언가로 빚어진 무대 위를 한 신체가 걷고 있다. 그 몸에는 나무와 잎이 돋아나 있으며, 한 뼘 남짓한 거리만을 오갈 수 있다. 신체가 공간을 더듬듯 배회하는 동안, 우리는 무대 앞 의자에 앉아 그 느린 발걸음과 공간을 관조한다. 시간이 흐르자, 하나둘씩 다른 신체들이 무대로 모여든다. 그들은 서서히 공간을 공유하며 안무가의 신체로 변화한다.


신체들은 각자 자신만의 반복강박[1]을 가지고 있다. 하나의 신체는 긁음과 긁힘을 반복하며, 세계와 자신을 확인한다. 하나의 신체는 끝없는 굴레를 배회하며, 따스함을 갈망한다. 하나의 신체는 씻음과 씻김을 반복하며, 기대 없는 기다림을 예비한다. 하나의 신체는 희망을 갈망하며, 매 순간 절망만을 마주한다[2]. 이 반복강박들은 결국 신체들을 소멸로 이끌지만, 동시에 찰나의 저항을 포착한다. 이러한 신체들은 자연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와 겹쳐진다. 우리는 자연을 소모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지만, 그 소모의 과정 속에서 스스로는 여전히 생명을 지속한다. 그리고 우리 또한 자연이다. 이 모순적인 과정에서 우리는 일종의 부채의식을 공유하고 있다. 이 부채는 억압하려 할수록 더욱 큰 부채를 남기며, 마주하려 할수록 오히려 다른 억압들로 눈을 돌리게끔 만들기도 한다[3].

런데 우리는 정말로 기후위기 앞에서 눈을 가릴 수 있는가. 가린다 한들, 타조처럼 땅속에 고개를 파묻어, 정말 눈만을 가릴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눈을 가린다 한들, 우리는 언제나 신체로 자연을 느낀다[4]. 자연과 신체를 단절된 것으로 보았던 사유들은 자연을 조작가능한 도구나 자원으로서만 바라보게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세계를 이해하는 가장 엄밀한 방식도, 올바른 방식도 아니었다. 자연은 언제나 '이미' 신체로 들어와 있다. 신체의 주관으로부터 출발하는 인간의 세계는 언제나 자연과의 관계를 전제한다. 우리는 눈이 멀어도 세계를 감각할 수 있다. 체화되어 익숙한 장소는 눈을 감고도 그 길을 찾을 수 있듯이, 우리의 감각은 언제나 무엇인가를 전제하여 '이미' 감각하고 있다.


다섯 명의 안무가들은 눈을 감은채 서로의 공간을 공유한다. 이들은 시각 없이 불안한 감각을 유지하지만, 분명 공유된 세계를 인식하고 있다. 피부의 압력과 신체의 체온이 서로를 감싸며, 다섯 개의 신체는 하나의 감각망을 이루어 서로를 인식한다. 이들은 시각의 부재를 통해 오히려 서로를 더 가까이 느낀다—그리고 느낄 수 밖에 없다. 개인은 바닥을 하염없이 방황했지만, 어느새 서로를 감각하고, 인식하며 천천히 조화의 운동을 이룬다.


이들은 어떤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이들 중 보다 더 자연적인 신체가 있다. 몸에 풀과 나뭇가지가 돋아난 그 신체는 점진적으로 변화하는, 한 뼘밖에 움직이지 못하는 자연의 기호처럼 보인다. 이 자연의 신체는 공간을 배회하며, 다른 신체들의 감각을 끌어당기듯 소리를 낸다. 다른 신체들은 그 자연적인 신체를 갈망하기도 하고, 망각하기도 하며, 동시에 애도한다. 그들의 애도는 서로가 하나의 몸이 되어 자연의 운동을 반복하는 것으로, 혹은 제의적인 행위를 통해 이루어진다.


애도의 끝은 황혼으로 이어지는 듯했다. 신체들은 쓰러지고 서글픈 태양이 무대를 비췄다. 그러나 빛 속에서 어린아이가 천천히 걸어 나와 자연에게 다가간다. 이 아이는 앞을 '보고' 있다. 아이의 등장을 통해 무대는 황혼에서 개벽으로 전환된다. 아이는 나무가 돋아난 신체를 잡고 천천히 무대밖으로 인도한다. 이때, 이전 세대의 고뇌는 다음 세대의 희망으로 화답된다. 아이의 시선은 인간이 자연을 다시 ‘보는’ 방식의 전환이며, 감각의 윤리가 새로이 태어나는 징후로서 표현된다[5]. 그렇게 무대의 막이 내린다.


신체는 우리의 생각 보다 세계를 더욱 정교하고 예리하게 감각한다. 기후위기의 시대에, 보지 못한다는 것은 감각의 무지가 아니라 피로의 증상이다. ‘눈 먼 여자들’은 그 피로 속에서도 감각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들은 절망을 감내하며 세계의 미세한 숨결을 느끼고, 감각의 윤리를 다시 세우고자 한다. 어둠 속에서 움직이는 그들의 신체는 묻는다. 우리는 여전히 무엇을 느낄 수 있는가, 그 느낌으로부터 다시 살아갈 수 있는가. 그리고 여전히 우리의 눈은 멀어있는가?



[1] 프로이트는 『쾌락 원칙을 넘어』에서 인간이 고통스럽고 파괴적인 경험조차 반복하는 이유를, 억압된 기억이 해소되기 위해 다시 ‘행위로 돌아오려는 충동’에서 찾았다. 이러한 반복은 생을 유지하려는 충동(Eros)과 죽음을 향하는 충동(Thanatos)이 얽힌 자리에서 나타난다. 신체는 이 두 충동 사이에서 진동하며, 파괴와 보존, 소멸과 저항을 동시에 수행한다.

[2] 나는 이 신체의 동작이 흥미로웠다. 나뭇가지를 땅에 심으려 반복하지만, 끝없이 절망하고, 이윽고 차라리 자신의 몸속에 심으려는 듯이 그것을 입에 찔러 넣었다. 이 위를 게워내려는 듯한 동작에서 나는 채식주의자의 윤리적 고뇌와 고독이 겹쳐 보였다.

[3] 예: 경제의 논리, 생존에 대한 염려, 세계에 만연한 부조리와 같은 것들.

[4] 메를로퐁티는『지각의 현상학』에서 신체를 단순한 감각의 매개체가 아니라, 세계가 스스로를 드러내는 현상적 지평으로 이해한다. 그는 신체를 세계 인식의 전제 조건으로 보았다. 신체는 주체와 객체의 경계를 매개하는 ‘살(flesh)’이며, 세계와 나 사이의 상호침투의 장소다.

[5] 이때, 아이의 어깨가 너무 무겁게 느껴지기도 했다. 이것이 유보가 아니라 희망이 되기 위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단순한 희망의 기호가 아니라 현재의 우리에게 책임감 또한 전해주는 것 같다.



안무 및 연출 l 김지우

무브먼트 어드바이저 l 이규성

리서치 및 출연 l 김선진, 김혜윤, 박규리, 이연지, 김지우 / 특별출연 l 노규빈

기획 및 홍보 l 이선민 / 조명 디자이너 l 강상민 / 조명 어시스턴트 l 이아현

사운드디자인 l 고태현 / 작곡 l 한민희 / 공간연출 l 정유완

분장 l 조채은, 이연재 / 의상 l DANCE ON 김유림 / 홍보물디자인 l 홍수경

홍보영상 l 송우람 / 기록촬영 l 잔나비와 묘한계책

주최·주관 l 김지우 / 후원 l 한국문화예술위원회

협력 I 서울어텀페스타, 탈영역우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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