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평론

노채연: Transeunt

Roh Chaeyeon: Transeunt

by oybk

<거대한 땅이 허물어지며> 2025, 장지에 분채, 백토

돌이켜보면, 우리는 언제부턴가 이 세계가 인과성으로 가득 차 있다는 믿음을 당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다. 대기의 수분은 비를, 지각의 운동은 지진과 화산 폭발을 불러온다는 것을, 괴력난신의 시대를 지난 우리들은 알고 있다. 이때의 앎은 인과성으로 연결된 하나의 끝없는 시스템에 대한 앎이다. 우리는 이 시스템을 자연법칙이나 과학, 논리 그리고 '사실'이라는 이름으로 받아들인다. 이러한 '사실'은 점차 인간에게로, 나아가 인간 정신에게로 그 범위를 넓혀가며 포섭시켰으며, 그리고 점차 우리의 앎은 비인과성을 사실이 아닌 것으로 치부하게 되었다.


그러나 노채연은 '사실'을 바라보지 않는다. 그러면서 동시에 사실을 외면하지도 않는다. 노채연은 ‘사실’을 그리는 대신, ‘사실 이전의 감각’들을 회상한다. 이러한 감각들은 ‘사실’을 구성하기 이전, 그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원초적 실재의 감각들이다. 과거로부터 전승되어 온 신화적 기호들은 우리의 일상에 자연스럽게 녹아있다. 그리고 동시에 그 자연스러움이 시원을 포착할 수 없는 불가능성과 신비를 만든다. 이때의 불가능은 인과성의 언어로는 결코 다다를 수 없는 감각에 대한 불가능이다. 노채연은 이 불가능에 대한 해명을 시도하지 않고, 그 앞에서 판단을 중지(epoché )한다.


그리하여 노채연의 판단 중지(epoché )는 잊혀진 신화적 감각들을 환기시킨다. 작가의 화면 속 존재들은 인과적이거나 논리적 기술이 아닌, 직감과 감정, 혹은 원초적 불안의 진동 속에서 나타난다. 이는 어떤 명확한 서사로 환원되지 않으며, 자연과 짐승, 인간과 환영들이 서로를 지나치고 교차하는 순간들의 연쇄로 구성된다. 이러한 연쇄는 하나의 서사적 장면으로 정리되지 않는다. 대신 그것은 ‘무엇인가가 지나간다’는 감각, 곧 transeunt 한 작용의 흔적을 남긴다.


라틴어 'transeunt'는 ‘지나가는 것’ 그리고 ‘바깥으로 나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Transeunt는 세계를 구성하는 인과적 과정을 넘어, 존재가 자신 바깥으로 흘러나오는 근원적 운동으로 표현할 수 있다. 플로티노스는 존재를 고정된 실체로 보지 않았다. 그에 따르면 모든 존재는 일자로부터 끊임없이 흘러나오며, 그 흐름 속에서 자신을 드러낸다. 존재는 일자에서 유출되어 점차 개체화되며 형상으로 굳어지지만, 그 안에는 언제나 자신이 떠나온 근원을 향한 회귀의 욕망을 내재하고 있다. 이러한 운동은 존재가 자기 자신을 유출하여 바깥으로 흐를 때, 그 흐름 속에서 스스로를 인식하는 운동, 즉 지나감(transeunt)에 대한 인식으로 이해할 수 있다. 신화적 기호로 환기되는 자연적 힘이 나를 스쳐 지나갈 때, 나는 나이면서도 동시에 그 자연이 된다. 작가는 이 '지나감'의 순간에 주목한다.


지나감을 바라보는 노채연의 신화는 귀환하지 못한 형상들의 움직임을 포착한다. 작가의 신화는 고정된 상징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그것은 어떤 존재가 세계로 드러나기 직전의 징후처럼, 뚜렷하면서도 단절되어 있고, 형태를 이루었지만 불분명하다. 회화 속 상징들은 유출과 귀환 사이에 위치한 감각처럼, 존재가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가기 이전의 여운처럼 남아 있다. 작가에게 신화는 세계를 설명하는 도구가 아니라, 세계가 자신을 드러내는 원초적 방식 그 자체이다. 그러므로 회화 속의 신화는 작가가 세계의 원초적 운동에 다가가고자 하는 시도가 된다. 노채연의 회화는 유출과 귀환 사이, 형상과 그 이전의 경계에 놓인 감각을 포착하고자 한다. 우리는 그 장면 앞에서 존재가 세계로 드러나기 전, 아직 기호화되지 않은 상태의 불안을 감지한다. 이때의 불안은 이미 도래했지만 아직 도달하지 못한 신화에 대한 불안이자, 존재가 아직 분화되지 않았던 시간, 하나의 자연이었던 상태에 대한 그리움일 것이다. 이제는 '사실'이 아니게 느껴지는, 우리가 잃어버린 감각들에 대한 그리움이다.


<낯선 땅> 2024, 장지에 분채, 백토, 과슈
<Untitiled Series> 2025, 장지에 백토, 분채
<Red Lake> 2025, 장지에 분채 외
<Dead Horse Bay> 2025, 장지에 분채, 백토

artist: @chaeroee

writer: @oy_bk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