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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예오예 Mar 08. 2018

있는 듯 없는 듯 알듯 말듯,
당신의 벽지 문양



   우리 회사에는 있는데 없는 사람이 있다. 분명 봤는데 기억 안 나는 벽지 문양 같은 사람이 있다. 퇴근 후 집에서 커피 맛 아이스크림을 한술 떠 목으로 넘기며 문득 그녀가 생각났다. 그녀를 찾아 오늘을 더듬었다. 



   오전 9시 30분 중요한 회의가 있어 이른 출근을 했다. 나와 다른 부서인 그녀의 출근 시간은 9시. 내 자리로 가기 전엔 그 부서 자리를 지나야 한다. 이 사람 기억나고, 저 사람 기억나는데 그녀는...기억에 없다. 정말 없었던 걸까. 잠시 자리를 비웠던 걸까.



   그다음 기억의 조각은 오후 12시. 나도 그녀도 도시락을 먹는다. 물론 따로. 12시에 탕비실 전자레인지 앞에서 가끔 그녀를 마주치므로 잘 알고 있다. 그녀는 늘 순서를 놓친다. 뒤늦게 온 어떤 사람이 주황빛 뿜어대는 네모난 상자 안에 새치기로 제 그릇을 불쑥 밀어 넣는데도 아무런 말도 움찔거림도 없다. 손끝으로 도시락 끈만 매만지다 오분 십분 전자파를 쬐며 다시 제 순서를 기다린다. 나도 그녀의 순서를 침범한 적 있던 것 같아 아이스크림 숟갈을 머금은 어금니가 괜히 시큰하다. 그나저나 오늘은 내가 외식을 해서 그녀가 제 순서를 사수했는지 아니, 회사에는 있었는지 이때까지도 알 수 없다.



   오후 3시. 나른하고 배고픈 시간. 그녀의 구역을 지나 간식 사냥에 나선다. 그녀의 자리에는 컴퓨터와 챕스틱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지난 간식 사냥 때 과자에 눈멀어 그녀의 책상에 허벅지를 부딪친 적이 있는데 그때 짧고 둥근 챕스틱이 도르르 굴러떨어져 죄송하다며 주워 건넨 기억이 있다. 누가 요즘 이런 걸 쓰나 궁금해서 자리를 훑어봤다. 그것도 체리 향이었다. 최근 자리 이동이 잦았는데 그때마다 가장 먼저 짐을 옮기고 퇴근하던 것도 그녀였다. 당장 오늘이라도 사직서를 내고 미련 없이 떠날 마음가짐이 되어 있는 자리의 형태였다.



   그녀는 글씨를 못 쓴다. 우연히 회의를 함께한 적 있는데 그 시간이 지루했는지 어디에서 난 두루마리 휴지 한 칸 귀퉁이에 가사 같은 걸 쓰고 있었다. 그 작은 한 칸 안에서도 아주 구석에 매우 작은 글씨로 아주 불편하게. 얼마나 중요하면 휴지에 적나 해서 쳐다본 것인데 아주 의외였다. 존재감 없는 사람이라 감정까지 없을 거라 생각한 거다.



   그렇다고 그녀가 소심한 건 아니다. 일 때문에 대차게 민망한 상황이 있던 날에도 그녀의 자리에서 보여준 여백의 미 같은 태도처럼 대꾸 없이 6시에 홀연히 아니, 당연히 자리를 비워 부장의 노여움을 샀다. 훗날 밝혀졌지만 그날의 업무 과실은 부장 탓이었다.



   그녀는 본인의 생각을 관철시키기보다 듣고 수렴하기만 하는 쪽에 가까웠다. 그래서 하루 중 그녀의 목소리를 들을 기회가 적다. 오죽하면 부장이 쇼트트랙 계주 1등 했는데 오판으로 실격 처리돼도 아-도 안 할 사람이라 했다. 면접은 어떻게 봤고, 회사는 어떻게 다니나 의아하기까지 했다.



   회계팀 그녀는 꼼꼼함 하나만큼은 타의 추종을 볼허한다 했다. 그래서 회사 전체 회계 마감은 그녀의 몫이라 했다. 밥 먹을 때를 제외하고 웬만하면 얼굴 근육을 쓰지 않는데 지난달 말에는 숫자가 안 맞아 눈썹을 움찔했다는 그녀. 결국 그달에 어떤 간부가 감사팀 징계를 받아 감봉 됐다나 뭐라나. 



   아, 그래서 그녀는 오늘 출근을 했나? 결국 메신저까지 들췄다. 정산 때문에 우연히 톡을 나눈 적이 있었는데 세상 친절한 문장이 흔적으로 남아있었다. 그 당시 화들짝 놀랐던 기억이 떠올랐다. 이런 사람이 아닌데. 메신저 세상 속 그녀는 엄청난 눈웃음과 이모티콘 만발로 화려하게 나를 대하고 있었다. 뭐지, 이 사람.



   커피 아이스크림을 입에 밀어 넣으며 왜 그녀가 갑자기 생각났나 싶었다. '벽지 문양'. 누가 오늘 내게 그랬다.

   "너, 집안 벽지 문양 기억나? 난 회사에서 그런 존재가 되고 싶어. 있긴 있는데 딱히 기억 안 나는 그런 것. 그렇게 눈에 안 띄게 근근이 길게 회사 다니고 싶다."

   이상적이라 생각했지만 이내 손사래 쳐 뜬구름 같은 소리를 부숴냈다. 욕심이 넘쳐 온갖 프로젝트를 자기 것으로 만드는 그가 모순으로 찰지게 빚은 말 덩어리였기 때문. 그런 게 어울리는 사람은 따로 있어. 그래서 그녀가 생각났던 것이었다.



   오늘 난 똑똑히 본 것 같다. 이렇게 기억을 부풀려 보니 분명 회사에 그녀가 있었다는 결론에 닿았다. 하지만 그녀의 카톡 프로필에는 내가 못 본 한 문장이 있었다.



   "1월에 퇴사했으니 법인 카드 정산은 제발 그 회사 담당자 찾아 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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