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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늘윤 Nov 04. 2020

홋카이도 3. 숲의 시계는 두근두근

러브레터의 흔적 찾기를 실패했다고 생각했던 당시, 그 아쉬움을 달래어줄 또 다른 장소가 생각났다.

 <상냥한 시간>이라는 2005년 일본 드라마의 배경이 홋카이도라는 사실이 뒤늦게 떠오른 것이다. 트렌디한 드라마이거나 인기가 많은 드라마도 아니었고 처음 봤을 땐 지루한 드라마라고만 생각했었다. 그러다 몇 년 뒤 우연하게 다시 보았을 땐 처음과 사뭇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지루하다고만 생각했지만 꽤 섬세한 감정선이 돋보이는 깊이감 있는 드라마였고 결국 두세 번 정도 되돌려 볼만큼 좋아하는 드라마가 되었다. 극본도 좋고 배우들의 연기도 좋았지만 그중에서 가장 좋아했던 건 드라마의 배경이 되었던 숲 속 카페였다.


카페 손님들이 바에 앉아 직접 마실 커피의 원두를 그라인더로 드르륵드르륵 가는 소리를 좋아했다. 한 번쯤 경험해 보고 싶은 탐나는 장면이었다. 여과지에 손님이 갈아준 원두를 넣고 주전자로 김이 모락모락 나는 적당한 온도의 뜨거운 물을 부을 때 보글보글 올라오는 커피의 거품에서 나는 향이 모니터 밖까지 전해져 오는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나무 냄새 가득한 숲 속에 커피 향 가득한 카페라 상상만으로도 심신이 편안해질 것 같은 카페 아닌가 


드라마 이름과 촬영장이 홋카이도였다라는 단 두 가지의 단서만으로 찾을 수 있을까 싶었으나 아주 오래된 드라마가 아니어서인지 버스 가이드를 했던 언니의 경력 때문인지 언니는 꽤 단시간 내에 촬영 장소를 알아내 주었다. 어떻게 이렇게 금세 찾을 수 있었는지 궁금해 하자 우리나라로 치면 전원일기 같은 국민 드라마가 촬영됐던 장소기도 해서 홋카이도에선 꽤 유명한 곳이라 쉽게 찾을 수 있었다고 이야기해주었다.



나는 상냥한 시간이라는 드라마의 촬영지로 알고 있던 곳이지만 현지에선 옛날 국민 드라마 촬영지로 더 유명하다는 이 곳은 키가 큰 나무들이 입구에서 먼저 우릴 만겨 주었다. 숲 속에 들어서자마자 나무 냄새가 온몸을 감싸 안았다. 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D상과 함께 나무 냄새를 폐 깊숙한 곳까지 닿을 수 있도록 꽤 오래 숨을 들이켰다. 몸속 저 깊숙한 폐부까지 이 신선한 공기 씻어 내듯이


그저 나무로만 가득할 것 같은 촬영지에는 의외로 요정들이 살 것 같은 작은 오두막 집들이 즐비했고 그 오두막 집마다 숲이라는 콘셉트와 어울리는 소품들을 파는 가게들이 입점해 있는 아기자기한 관광지였다. 눈을 두는 곳마다 어찌나 예쁜 물건들이 많은지 카페에 가기도 전에 결국 소품샵에 들러 나무로 만든 기차모양의 호루라기를 족히 열개는 사고서야 발길을 돌릴 수 있었다. 물론 그 기차 호루라기는 지인들의 선물로 유용하게 사용되었다.


그리고 진짜 최종 목적지, 나를 숲으로 인도한 그 이름 카페 앞에 도착하자 입구에 쓰여 있는 간판 이름부터 눈에 들어왔다. 숲의 시계... 드라마 속에서 내가 사랑했던 그 장소 그 이름 그대로였다.



카페 안에는 드라마 ost 경음악이 반복해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것은 일본에서 겨울연가가 한창 선풍적인 인기를 얻던 시절, 남이섬에 여행 갔을 때 남이섬에 내내 울려 퍼지는 주제곡을 아련하게 듣고 계시던 일본 관광객분들의 기분이 이러했을까? 당시엔 이해하지 못한 그분들의 떨림과 설렘을 뒤늦게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카페에 들어섰지만 언니는 어린 아들을 데리고 안에서 우아하게 앉아있긴 힘들 거 같다며 혼자 조용히 이 기분을 만끽하라며 D상과 야외 테이블에 자리를 잡기 위해 나가셨다. 마음 같아서는 바 자리에 앉아 커피 그라인더로 내가 마실 커피의 원두를 갈아보고 싶었으나 자리를 이미 잡아버린 뒤였기에 그 망은 고이 접기로 했다. 물론 조금만 용기를 내서 "자리를 옮기고 싶은데요."라고 말하면 될 일이었지만 그땐 왜 그 말 한마디 하는 게 부끄럽고 민망했던 건지 그렇게 나의 작은 로망은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한 채 아쉬움으로 남기게 되었다.


기념품으로 갖고 온 티 코스터


얼마 뒤 진한 커피 향기가 점점 나에게 다가왔다. 예쁜 커피잔에 담긴 커피를 한 모금하고 분위기만끽하고 싶었으나 지금도 그렇지만 그땐 더 커피맛을 모르던 시절이라. 몹시 쓰고 진한 커피맛에 당황했다. 원두는 확실히 좋은 걸 쓰는지 커피를 즐기는 C언니가 커피맛이 유난히 좋았다고 칭찬을 아끼질 않던걸 보면 내가 모를 영역일 뿐. 커피의 퀄리티는 꽤 좋았던 모양이었다.



커피 값도 꽤 비쌌던 걸로 기억하는데 아쉽게도 커피가 너무 써 반잔도 마시지 못한 채 음악과 분위기만을 즐기다 나오게 되었다. 나가는 길에 수줍게 지배인님께 상냥한 시간이라는 드라마를 보고 찾아왔다고 말씀드리자 한국에서 그 드라마를 보고 찾아오시는 분들이 꽤 계시다면서 이곳에서의 시간이 좋은 기억으로 남으셨으면 좋겠다는 인사를 건네받았다.


그저 공기 좋은 관광지에 수많은 오두막 가게 중 하나였을 뿐이고 커피 향이 좋은 카페였을 뿐이지만 나에게는 입구에서 카페의 이름을 보는 순간부터 두근거리고 설레게 만들었던 곳이었다. 이미 그곳은 내겐 단순한 카페가 아닌 한 편의 드라마였으며 영화 그 자체였다. 이때의 경험은 너무 소중하고 특별했던 기억으로 남아 후에 라다크에 가게 하는 큰 원동력이 되어주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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