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시케의 방랑
프시케는 한참 동안이나 멍하니 주저앉아 있었습니다. 에로스가 완전히 떠나갔다는 것을 깨닫기까지 시간이 걸렸습니다. 한순간에 모든 것이 사라졌다는 게 믿기지 않아서, 이대로 기다리면 다시 그가 돌아오지 않을까 하는 헛된 희망마저 들었습니다. 그러나 남은 것은 깊은 상실감과 절망, 끝없는 후회뿐이었습니다.
프시케의 눈에서는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지금까지로도 충분히 행복했는데, 욕심을 부렸어. 그래서 벌을 받는 거야. 의심하지 않았어야 했는데, 그를 믿었어야 하는데 그러질 못했어.
에로스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니 가슴이 찢어지는 듯했습니다. 그를 영영 잃어버리고 말았다는 사실에 정신이 아득해졌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습니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고, 그냥 죽고 싶었습니다.
이제 그 없이 홀로 살아갈 자신이 없었습니다. 이때만큼 그에 대한 사랑을 강하게 느낀 적이 없었습니다. 프시케는 절망감에 절벽 앞에 서서 생각했습니다. 그냥 죽어 버릴까? 여기서 뛰어내려 죽으면 이 고통도 사라질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습니다. 이대로 허망하게 끝난다고 생각하니 견딜 수 없었습니다.
이제는 그가 누군지 알았습니다. 남편의 정체가 여신 아프로디테의 아들이자 사랑의 신 에로스라는 것을 안 이상, 다시 그를 만나기 전에는 죽을 수 없었습니다. 프시케는 에로스를 찾아 나서기로 결심했습니다.
어떻게든 다시 에로스 님을 만나자. 만나서 잘못했다고 용서를 빌자.
프시케는 걷기 시작했습니다. 가족들이 있는 궁전으로 돌아가 다시 예전의 신분으로 호화로운 생활을 하며 살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니 이것은 무모한 선택이었습니다. 사랑이 그녀를 무모하게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자신이 바라는 일이었습니다.
가다가 목이 마르면 냇가에서 물을 마시고, 배가 고프면 나무 밑에 누워 잠을 청했습니다. 그러나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목이 마를 때마다 물소리가 가까이 들려오고, 지쳐 누워서 눈을 감았다가 뜨면 주변에 폭신한 풀이 마치 이불처럼 둘러져 있어 잠자리가 따뜻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누가 가져다 놓았는지 모를 나무 열매와 버섯 등이 놓여져 있어 그것으로 허기를 면할 수 있었습니다.
입고 있던 의복은 시일이 지나도 해지지 않고 은은한 향기가 감돌았습니다. 맨발로 걸어 다녔음에도 불구하고 발에는 전혀 상처가 나지 않았습니다. 프시케는 생각했습니다.
‘에로스 님이 어디선가 나를 지켜보고 계시는 것이 아닐까?’
그렇지 않고서는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없다고 생각하니 희망이 생겼습니다. 혼자 다니다 보니 위험한 순간도 있었습니다. 들판에서 여행자들과 마주친 것입니다. 낯선 사람들을 보고 프시케는 멈춰 섰습니다.
남자들은 눈앞이 아찔할 만큼 아름다운 프시케를 보고 놀랐습니다. 그러나 곧 프시케의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알고 무방비해 보이는 그녀에게 음심을 품었습니다.
귀하고 곱게만 자라 이런 종류의 위협을 당해본 일이 없는 프시케는 겁을 먹었습니다.
“싫어, 오지 말아요!”
프시케는 공포에 질려 소리치며 손을 내저었습니다. 그러자 그녀가 뒷걸음질을 칠수록 가까이 다가오던 남자들은 벌에 쏘이는 듯한 고통을 느끼고 얼굴이며 팔 등을 감싸쥐고 달아났습니다.
무슨 일일까, 프시케는 주저앉아 그 모습을 지켜보았습니다. 거부하는 몸짓에 저이들이 그대로 물러나다니. 프시케는 자신의 양 팔을 손으로 감쌌습니다. 에로스가 그녀를 지켜 주고 있는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자신에게는 신의 가호가 깃들어 있는 것입니다.
‘반드시 그를 만날 수 있어.’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프시케는 힘을 내어 눈앞에 있는 신전으로 들어갔습니다.
아프로디테 여신의 신전인 줄 알고 찾은 그곳은 다른 여신의 신전이었습니다. 대지와 곡물, 농업의 여신 데메테르에게 바쳐진 제단이 사람들의 손길이 닿지 않고 잊혀진 채로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곳곳에 거미줄이 쳐져 있고, 곡식의 낱알이며 농기구 등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어 농가의 창고나 다름없었습니다. 프시케는 아프로디테의 신전이 아닌 것에 실망했지만 낡고 더러운 신전의 모습을 보고 이곳을 청소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느 신을 섬기는 곳이든 그것은 예의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신전을 깨끗이 정돈하고 나서 프시케는 신상 앞에다 초를 하나 켜 놓은 다음 마음속으로 기원했습니다. 바칠 것은 아무것도 없었지만 정성을 다해 기도를 올렸습니다.
‘자비로우신 여신님, 부디 한 번만이라도 제 남편을 볼 수 있게 도와주십시오.’
그리고 프시케는 제단 옆에서 잠이 들었습니다. 그날 밤, 꿈속에서 프시케는 데메테르 여신을 보았습니다.
그녀는 여신의 무릎을 베고 누워 있었습니다. 데메테르는 마치 어머니처럼 인자한 눈으로 프시케를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가엾구나, 착한 프시케야. 너를 보니 마치 내 딸을 보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
데메테르에게는 딸 페르세포네가 있었습니다. 데메테르는 하나뿐인 자식을 애지중지했지만 페르세포네에게 반한 저승의 신 하데스가 지하세계로 그녀를 납치해 가고 말았습니다.
데메테르는 애타게 딸을 찾아 헤맸지만 페르세포네는 이미 하데스의 아내가 되어 일년 중 사개월은 어머니와 떨어져 있어야 했습니다. 슬픔에 잠긴 데메테르가 대지를 돌보지 않는 기간을 사람들은 ‘겨울’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런 그녀에게 남편을 찾아 홀로 떠돌아다니는 프시케의 모습은 남 일 같지 않았습니다.
“아프로디테에게 널 데려다 주겠다. 아프로디테에게 용서를 구하도록 해라. 네가 에로스와 부부의 연을 맺은 것을 모르는 이가 없으니 여신도 어쩔 수 없을 것이다. 그녀가 널 시험해도 꿋꿋이 견뎌내야 한다.”
데메테르는 프시케를 올림포스에 있는 아프로디테 여신의 거처에 데려다 주었습니다. 프시케는 온통 빛나는 황금으로 만들어진 호화로운 궁전의 모습에 놀랐고, 눈부시게 아름다운 아프로디테 여신과 대면하자 주눅이 들었습니다. 감히 가까이 다가설 수도 없을 정도의 위용이었습니다. 게다가 여신이 결코 그녀에게 호의적이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니 더욱 그랬습니다.
아프로디테의 얼굴은 차가웠습니다. 에로스와의 사이에서 벌어진 일을 그녀도 이제는 모조리 알고 있었습니다. 화가 난 아프로디테는 에로스에게 근신을 명했습니다. 원래도 싫어했던 프시케인데, 감히 신인 자기 아들과 함께 눈이 맞아 몰래 같이 살았다는 사실을 알고 나자 어이가 없고 프시케가 얄밉기 그지없었습니다.
“여기가 어디라고 왔느냐? 인간 주제에 겁도 없이!”
프시케는 고개를 조아렸습니다. 몸이 떨렸지만 그래도 해야만 하는 말이 있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여신님. 에로스 님을 만나고 싶어서 실례를 무릅쓰고 찾아왔습니다. 부디 용서해 주세요.”
하지만 아프로디테는 여전히 쌀쌀맞은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데메테르에게 잘 보여 여기까지 찾아온 걸 보니 보통 영악한 것이 아니로구나. 그 재주로 내 아들까지 나를 거역하게 만들었겠다?”
“아닙니다, 여신님. 그건…….”
“시끄럽다. 너는 하녀처럼 허드렛일을 하는 것이 몸에 맞는 것 같구나. 그렇다면 어디 내 신전도 한번 그렇게 정리해 보거라. 오늘 하루를 줄 테니 데메테르의 신전처럼 깨끗이 치워놓으면 에로스를 보게 해 주겠다. 하지만 못한다면 어림도 없을 줄 알아라.”
아프로디테의 말에 프시케는 한 줄기 희망이 보이는 것을 느끼고 기쁜 낯빛으로 그러겠다고 대답했습니다. 하지만 아프로디테는 코웃음을 칠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희망을 느낀 것도 잠시, 아프로디테가 말한 신전의 한 구역으로 안내된 프시케는 입을 딱 벌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곳은 아프로디테가 사랑하는 새인 비둘기의 먹이로 가득 찬 곡식 창고였는데,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양의 곡물들이 두서없이 쏟아져 있었습니다.
데메테르의 버려진 신전과는 차원이 달랐습니다. 한 눈으로 봐도 도저히 혼자서 다 정리할 수 있는 양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프시케는 더 생각할 겨를도 없이 곡식을 분류해 자루에 주워담기 시작했습니다. 에로스를 만나기 위해서는 못할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양이 너무 많았습니다. 벌써 저녁이 다 되었는데도 창고 안의 곡식들을 다 정리하려면 한참이나 남아 있었습니다. 프시케는 울고 싶은 것을 참았습니다. 이 일은 하루 안에 절대 끝내지 못할 것임을, 그제야 그녀는 아프로디테의 뜻을 알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포기하고 떠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도 안 돼,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프시케가 막막해 하고 있는데 어디선가 개미들이 줄지어 오고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엄청난 수의 개미 떼였습니다.
개미들이 곡식을 물어 가려는 것인 줄로 안 프시케는 놀라 개미를 흩어 버리려 했으나 가만 보니 그게 아니었습니다. 개미들은 콩과 보리, 그리고 온갖 잡곡들을 물어다 한 곳에 쌓아두고 있었습니다.
“어머나……!”
프시케는 놀랐습니다. 대체 어디서 나타난 개미들인지는 모르지만, 바닥을 까맣게 뒤덮을 정도로 많은 개미들이 빠른 속도로 낱알을 분류하기 시작하자 눈 깜짝할 사이에 신전에는 여기저기에 곡식의 탑이 쌓였습니다. 프시케는 개미들이 모아 놓은 곡식들을 자루에 옮겨 담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그렇게 개미들의 도움으로 신전 창고를 깨끗이 정리할 수 있었습니다.
시간이 다 되어 돌아온 아프로디테는 깜짝 놀랐습니다. 프시케가 어질러진 창고 안에서 어쩔 줄 몰라 눈물을 흘리고 있을 줄로만 알았는데, 말끔하게 치워져 있는 신전의 광경에 잠시 할 말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아프로디테는 프시케에게 오히려 발칵 화를 냈습니다.
“정직하지 못하긴! 너 혼자서 한 일이 아니지? 에로스가 와서 도와준 것이 아니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