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경을 벗어야 가까운 것이 보인다. 책상에 놓인 종이 위에 그림을 그리고 있다. 처음 눈 앞의 사물이 흐릿해 보였던 때는 서른 중후반이었다. 노안이 오는 건가 싶었다. 한동안 그런 상태로 지내다가 안경을 맞췄다. 어색하던 안경은 시간이 지나면서 내 얼굴에 자리를 잡았다. 초점이 맞지 않던 사물들도 선명해졌다. 시간이 또 흐르더니 상황이 변했다. 지금은 안경을 벗어야 종이 위의 그림이 또렷이 보인다. 줄자의 눈금을 자세히 보려면 안경을 밀어 올려야 할 때도 있다. 주로 꼼꼼히 수치를 봐야 할 때이다. 그러다가 유리창 너머의 풍경을 보려면 다시 안경을 써야 한다. 하늘 꼭대기에 떠있는 게 새인지 비행기인지 구분할 때도 안경을 써야 힌다.
지난 수요일 저녁에 집에 왔다. 그날 제주도에는 비가 내렸다. 아침부터 흐리던 하늘이 하루 종일 비를 뿌렸다. 비는 세로로 곧게 내렸고 나는 일하는 중간중간에 비를 바라봤다. 육지는 가뭄으로 메말랐다는 소식을 매일 아침마다 들었다. 메르스 소식도 아침마다 식탁에 올라왔다. 물수건으로 손을 닦고 누군가의 입에 들락거렸던 수저와 젓가락으로 밥을 먹었다. 일하는 중에 집에 두고 온 내 책상과 물감과 종이가 생각날 때가 있다. 그 생각이 끈적하게 늘어질 때면 망치로 못대가리를 후려쳤다. 그렇게 2주를 지냈다. 그날이 그날이고 어제와 오늘이 다를바 없는 생활이다. 집의 형태만 쑥쑥 자란다.
이 삼일이면 끝낼 수 있을 거라 생각하고 집에 왔다. 그림 한 장 그리면 된다. 첫날은 내리 잤다. 자도 자도 계속 졸려서 이튿날도 잤다. 삼일 째에는 이러면 안되는데 하면서 잤다. 나흘이 지났다. 팀장에게 문자로 월요일에 가겠다고 말했지만 가지 못했다. 월요일 점심에 저녁 비행기를 예약했다. 밤에라도 갈 생각이었다. 월요일 저녁에 예약을 취소했다. 양치기 아저씨가 된 것 같아 찝찝했다. 비행기는 화요일로 미뤘다. 화요일 아침에 일어나 그림을 마무리하고 담당자에게 연락했다. 수정만 없으면 돌아간다.
아침에 학교 가는 아이를 바래다 주었다. 앞서 걸어가는 뒷모습을 봤다. 노란 가방을 등에 메고 두 손으로 가방끈을 쥐었다. 접힌 팔꿈치와 등을 보다가 국민학교 3학년 때의 내가 떠올랐다. 내가 저만했을 때의 어떤 느낌이 떠올랐다. 세상이 좁게 보였고 시간은 셀수없이 많은 순간들로 쪼개져 있었다. 순간순간 재미있는 일이 많았다. 하루는 길었다. 길다는 느낌도 없이 매일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느꼈다. 학교가 끝나면 돌멩이 하나를 골라 발로 차면서 집까지 오는 날도 있었다. 학교에서는 자주 혼났다. 연습장에 만화를 그리는 나를 선생들은 못마땅해하고 비아냥거렸다. 내 새끼도 만화를 좋아한다. 아이의 책상에는 만화와 낙서로 꽉 채운 연습장이 십여 권이다. 몰입도 배우는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좋아하고 즐기고 숨기지 않으면 몰입에 이를 수 있다.
그림을 그리면서도 내 그림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못나보이고 후지다. 촌스럽다. 감각에도 유행이 있어서 내 것은 이제 퇴물이 되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그러면 기분이 가라앉는다. 돌아가면 다시 툴벨트 차고 몸 쓰면서 일해야 한다. 목수 일은 메뉴얼이 있기에 복잡하지 않아서 편하다. 잡생각이 거의 없다. 그림은 메뉴얼이 없기에 나만의 방식을 찾아야 한다. 오랫동안 그려왔지만 아직도 헤맨다. 흐릿한 느낌만 갖고 있다. 조금이라도 나아지기를 바라지만 죽기 전까지 이 상태에서 뱅글거릴 수도 있다. 아침 담배를 피우는데 저쪽에서 뭔가 파닥였다. 반짝이며 땅위에서 맴도는 것이 나비인가? 싶었다. 담뱃갑을 감싸는 비닐이었다. 나비의 날개를 닮은 투명한 비닐이 바람 따라 한동안 뱅글뱅글 날았다. 거실에는 사 년 전에 옮겨 심은 외래종 대나무가 이제야 순을 틔웠다. 잘 자랄 것 같다. 거름을 줘야 할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