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다란 창 앞으로 외국인이 걸어갔다. 턱수염이 덥수룩하다. 영화에서 본 사람 같다. 창 밖은 활주로다. 비행기들이 올망졸망 모여있다. TV에서는 쉼 없이 세상의 이런저런 얘기들을 쏟아낸다. 누군가 잘못을 저질렀고 어떤 일이 꼬였고 어떤 이는 죽었다고 한다. 변명과 추측과 설명이 뒤 따랐다. 며칠 집에서 쉬고 오니 몸이 나아졌다. 허리의 통증도 풀렸다. 몸을 잘 챙겨야 할 나이이다. 이곳에 글을 쓰는 게 어색하다. 기껏 블로그인데 왜? 아마도 '작가'란 단어가 긴장을 하게 하는 것 같다. 작가. 오랫동안 꿈꿔왔고 지금도 꾸는 꿈이다. 어쩌면 할아버지가 돼서도 같은 꿈을 꾸고 있을지도 모른다. 빤닥한 새집에 이사 온 것 같다. 뭔가 근사한 것을 써야 할 것 같다. 근사한 일기라도. 피식 방귀가 샜다. 그저께는 낮잠 중에 화들짝 놀라 깼다. 순식간에 늙은 내가 보였다. 죽음이 코 앞이었다. 끝없이 깊고 질척이는 어둠이 보였다. 빠질 것 같았다. 이런 꿈을 여러 번 꿨다. 늙어가는 증상이라고 생각했다. 서둘러 뭔가 해야 할 것 같은 초조감이 들었다. 그림이든 돈이든 뭐든.
내 새끼가 자라고 있는 모습을 보는 게 좋다. 나와는 다른 어린 시절을 물려주고 싶었다. 만화를 그린다고 혼내지도 않고 걱정하지도 않는다. 그런 티를 일부러 낸다. 하고 싶은 게 있으면 숨기지 말고 속이 풀릴 때까지 하도록 둔다. 방금 그린 그림을 내게 보여주고 옆에서 내 반응을 살핀다. 만화를 좋아하고 끄적이는 놀이에 시간 가는 줄 모르는 모습이 내 것을 물려 받은 것 같아 미안한 마음도 든다. 그러면서 자신의 재능을 남김없이 쓸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그 뒤에 무엇이 있을지는 모른다. 그러나 자기 길을 찾으려 한다면 이 방법 외엔 알지 못한다.
어젯밤엔 잠이 늦었다. 술은 마시지 않았다. 새벽에 일어나 그림을 마무리하려다 소파에 누웠다. 5분 간격으로 알람이 울었다. 마누라가 놀라 깼다. 몇 번을 반복하다가 아침이 됐다. 그림은 열 시 경에 끝냈다. 편의점에서 일회용 면도기를 사고 약국으로 가는 길에 이웃을 만났다. 웃으며 인사를 하고 곧 현장으로 내려간다고 말했다. 그는 몸조심하라고 나를 걱정해줬다. 나는 케토톱 사러 간다고 대답했다.
비행기에서는 옆자리 젊은 사내들이 연신 들떠있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비행기의 날개와 이륙하기 전의 엔진음과 땅에서 바퀴가 떼어지는 순간마다 감탄사를 뱉으며 떠들었다. 거 참 시끄럽네. 자기들만의 여행이 처음인 것 같았다. 숙소에 돌아와서는 저녁으로 짜장면을 먹었다. 맛을 잘 모르겠다. 간단히 술을 마셨고 선물로 사 온 공보가주와 맥주를 마셨다. 안주로는 토마토와 양파를 썰어 넣고 올리브유를 두른 후 치즈를 뿌리고 볶았다. 사람들이 이 맛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술도 안 받는 것 같다. 일찍 잤다. 새벽에 눈이 떠졌다. 일어나 냉장고에 남은 캔맥주를 들고 나갔다. 모기에게 몇 방 뜯겼다. 어제 오후에 끊었던 담배를 다시 피우면서 공기 중에 물기가 베어 있다고 느꼈다. 제주의 공기와 파주의 공기가 많이 다르다. 눅눅한 물기도 다르지만 마시면 더 깊이 들어온다. 그런 것 같다. 이 생활이 지금의 내 생활이다. 한 방에서 낯선 이들과 같이 잔다. 코 고는 소리 낮다. 저마다의 사연과 저마다의 꿈이 조용히 잠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