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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눌산 Sep 01. 2015

5월에  시작된 산촌생활

# 1. 서창마을 펜션 주인이 되다



산촌의 5월은 눈부시다. 애기손톱만한 이파리들이 커다란 고목나무에 줄줄이 매달려 새싹을 피우는 모습은 가히 환상적이다. 무심코 돌린 발길이 다다른 곳은 적상산 등산로 입구 서창마을이다.

 

 마을 입구에는 수 백 년 된 아름드리 느티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다. 찬찬히 마을을 한바퀴 돌아본다. 대여섯 가구나 될까. 단풍 명산으로 알려진 적상산 명성에는 어울리지 않게 그 흔한 구멍가게 하나 조차 없다. 고요하다. 어지러운 마음들이 일순간에 사라진다. 마을 풍경 하나하나를 카메라에 담아본다.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등산로 입구에 섰다. "아, 이 마을에서 살고 싶다..." 나도 모르게 본심이 드러난 탄식을 내뱉는다. 20년 가까이 대한민국의 오지를 여행한 여행가이지만, 정말 살고 싶은 곳이라는 생각이 든 건 이 곳이 두 번째다. 첫사랑 여인을 먼 발치에서 바라볼  수밖에 없는 남자의 설렘 같은 것이랄까.



해질녘 무렵의 산촌에는 굴뚝마다 연기가 피어 오른다. 여행을 하면서 가장 싫어하는 시간이다. 이 시간이면 배가 고파지고, 엄마가 보고 싶어진다. 그래서 늘 서둘러 숙소를 찾곤 했다. 다시, 산을 내려선다.


"마을이 조용하네요?"


마침 마을 한가운데서 순두부집을 운영하는 식당 아주머니가 개밥을 주다 낯선 사람이 반가웠는지 친절하게 마을 설명을 해주신다.


"여긴 단풍철에만 사람이 와요. 적상산 단풍이 그래도 꽤 유명하거든. 평소에는 마을 사람 다 합해야 10명도 안되다 보니 조용해요."


아, 그렇지. 적상산 단풍 하면, 등산 좀 한다는 이들이라면 다 아는 얘기니까. 나 역시 오래 전 덕유산 종주를 위해 적상산 정상 근처에서 비박을 한 적이 있었다. 산꼭대기에 양수발전소가 건립되면서 닦여진 길을 따라 올라가니 넓은 주차장과 함께 잔디밭이 있어 하룻밤을 지내고 덕유산으로 향했었다. 그땐 사실 단풍을 즐길 여유가 없었지만, 적상산에서 남덕유까지 이어졌던 만산홍엽의 불타는 가을산이 지금도 기억난다.


친절한 아주머니와 얘기를 튼 김에  마음속에 꾹 누르고 있던 본심을 드러냈다.


"혹시 이 마을에 살 만한 빈집이 있을까요?"


"뭐하는 양반인데 빈집을 찾아요?


"아, 글 쓰는 사람이거든요. 처음 왔지만 동네가 너무 조용하고 편안해 보여서요."


"저기 마을에서 지어 놓은 펜션이 있는데.... 이장님 얘기가 운영할 사람도 없고 해서 세를 놓을까 하는 것 같던데, 한번 연락해볼까요?"



펜션? 그저 작은 오두막 정도의 빈집을 생각했었는데, 펜션이라니. 문득 오래전부터 꿈꾸던 산장지기가 떠오른다. 강원도 산촌풍경에 반해 오지를 찾아다닐 때 큰 산 아래에는 산장 하나씩은 다 있었다. 먹고 마시고 잠도 잘 수 있는 산장은 산꾼들의 아지트였고, 여행자들의 쉼터가 되기도 했다. 요즘처럼 예약하고 찾아가는 숙소가 아니라 오다가다 들린 여행자들이 밤새 술잔을 기울이며 이야기꽃을 피우던 기억 말이다. 어차피 여행을 업으로 삼은 마당에 나이 들어할 수 있는 것은 산장지기 밖에 없단 생각에, 마음 속 한구석에 묻어두었는데 어찌보면 잘 됐다 싶어 아주머니를 붙잡고 늘어졌다.


"세만 싸게 주신다면 괜찮을 것 같은데요. 한번 알아봐 주실래요?"


아주머니가 마을 이장님께 전화를 하는 사이, 마을 펜션을 돌아봤다. 그런데 생각보다 그 규모가 장난이 아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60평짜리 2층 건물이 두 동이나 된다.  과연 나 혼자 이 큰 건물을 감당이나 할 수 있을까 걱정이 됐지만, 마음은 이미 펜션 주인이 돼 있었다.


"뭐하는 사람이요?"


채 30분도 안돼서 마을 이장님이 나타났다. 그리고는 집주인의 호기심이 아닌 관상을 보는 점쟁이의 표정으로 묻는다.


"아, 네. 글 쓰는 사람인데 조용히 살 만한 집이 있나 하고 여기 아주머니한테 여쭤봤더니 펜션 세를 놓는다고 해서요."


펜션 용도로 지어진 건물이지만,  정확한 명칭은 마을 복지회관이다. 정부에서 마을 주민들의 소득을 위한 지원사업으로 지은 건물인데, 주민들이 직접 1년 반째도 운영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펜션이라는 게 홍보와 관리가 잘 돼야 하는데 농사가 주업인 마을 주민들이 예약을 받고 손님 뒤치다꺼리를 하면서 청소까지 한다는 게 쉽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래서 개인에게 임대를 줄까 고민하던 차에 나를 만난 것이다.


이장님의 점쟁이 같은 표정이 풀리지 않는다. 뭔가 맘에 들지 않는다는, 그런 표정 말이다.


"나 혼자 결정할 문제가 아니니까, 일단 여기 펜션 방 하나를 내 줄테니까 자고 내일 다시 얘기해봅시다."


마음 먹었던 일이 풀리지 않으면 괜히 심란해지기 마련인데, 다행히도 이장님은 여운을 남긴다. 여행 중이니 하룻밤이면 어떻고 이틀 밤이면 어떤가. "네. 기다리겠습니다."하고 방에  들어서자마자 이장님한테 전화가 걸려 온다. 잠시 후에 펜션으로 갈 테니까 기다리라고.



저녁을 먹기 위해  처음 만난 아주머니의 식당을 찾았다. 아주머니는 매일 두부를 만든다고 했다. 순두부가 전문인데 등산객들을 대상으로 식당을 운영한 지 10년 째라 한다.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적상산 등산로 입구가 왜 이리 조용한지 아주머니 얘기를 통해 알 수 있었다. 그것은 몇 해 전 이 마을 땅 대부분을 무주군청에서 사들였다고 한다. 적상산 관광지 조성을 위해서인데, 케이블카를 놓고 리조트도 유치할 계획이 있었던 모양이다. 이러한 이유로 개인 땅이 거의 없다 보니 더 이상의 이주민이 없었던 것이다. 결국 관광지 개발은 무산되고 택지를 개발해서 전원주택단지를 조성했다고 한다. 듣고 보니 이 마을이 더 맘에 든다.  관광지로 개발될 가능성이 없어 보였기에.


식사를 마치고 이장님을 다시 만났다. 마을추진위원장이란 직함을 가진 분과 총무님, 그렇게 셋과 마주 앉았다. 꼭 회사 면접 보는 기분이라 먼저 긴장이 된다. 그러나 질문은 간단했다.


질문 1. 글 쓰는 사람이라고 했는데, 무슨 글을 쓰는가?

질문 2. 펜션 운영 계획은?


"여행 전문가로 여행지 소개글을 신문이나 잡지에 기고하는 일을 합니다. 가끔은 방송에도 출연하고 강의도 다닙니다. 제가 여기 살게 되면 마을을 적극적으로 홍보해서 여러분들에게 도움이 되도록 하겠습니다. 또한 마을에 누가 되지 않도록 조용히 쉬러 오는 손님 위주로 받을 계획입니다. 그리고 하나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는데, 펜션 건물 두 동 중에 한 동만 제게 임대를 주시면 어떨는지요. 한 동은 지금처럼 주민들이 그대로 운영하시고..."


생각지도 못했던 펜션, 그것도 두 동이 나 혼자서 운영한다는 것이 부담이 되었다. 내가 그리던 산장 역시 한 동이면 충분했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마을 대표 세 명은 나의 생각에 흔쾌히 동의를 해준다. 마을 주민들의 입장에서 보면 그동안 애물단지나 다름없던 문제를 해결하고, 마을 복지회관의 유지도 가능해야 하기에 한 동만 임차하는 게 그리 나쁜 일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또한 조용히 운영하겠다는 내 말이 맘에 들었던 모양이다. 그동안 주민들이 운영하면서 온갖 무례한 손님들을 상대하다 보니 지칠 대로 지친 상태였으니까. 그리고 가장 중요한 임대료는 예상했던 금액과 별 차이가 없다. 보증금 500만 원에 월세 30만 원. 허름한 빈집을 얻어도 그 정도는 줘야 하기에 그냥 월세 산다고 생각하면 가격 역시 큰 부담이 되지 않았다.


황토 벽돌로 지어진 펜션에서의 첫날밤은 정말 편안했다. 이런 저런 생각에 밤 늦게서야 잠이 들었지만 이른 새벽 일어나 마을 산책까지 했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2008년 5월. 뜬금없이, 서창마을 황토펜션 주인이 되었다.

지금은  펜션 주인이 아닌, 한 사람의 여행자로 여전히 서창마을에 살고 있다.

이 글은 그간의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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