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자의 집 언제나 봄날
현판을 달았다. 언제나 봄날. 펜션 간판 겸, 당호랄까. 포항에 사는 서예가 심산(心山)님이 글을 써 주시고, 서각을 하는 선류 산장 산장지기인 효산(孝山) 형님이 각(角)을 해주셨다. 그 뜻은 '언제나 봄날 같은 따스한 집'이라는 의미쯤 되겠다.
서창마을에 살기 전까지는, 사계절 중 어느 계절을 좋아하냐고 묻는다면 난 주저 없이 겨울이라고 했다. 눈을 좋아했다. 얼마나 좋아했느냐 하면, 한겨울 폭설이 내린 곳만 찾아 여행을 하고, '대관령 고립'이라는 뉴스가 뜨면 일부러 달려가곤 했을 정도니까.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추운 겨울이 싫어졌다. 태백에서 부산 을숙도까지 52일 동안 낙동강 도보여행을 하고 난 후부터다. 긴 도보여행으로 10kg 가까이 몸무게가 줄면서 체력이 고갈됐다. 몸서리치도록 추운 게 싫어졌다.
영화 '집으로'를 촬영한 충북 영동의 새막골에 살 때 낙동강을 걸었다. 10월 초에 시작해 11월 말에 끝났다. 영하로 떨어지는, 제법 쌀쌀했던 가을 날씨와 낙동강 하류 구간의 '아우토반'같은 제방길은, 걷는 자에게 있어 최악이었다. 바람을 온몸으로 받으면서 끝도 없이 이어지는 제방을 걸은 일은, 지금 생각해도 끔찍하다. 만약에 도보여행이 아닌, 한나절 여행길이었다면 가히 환상적인 풍경이었다고 말할 것이다. 바람에 일렁이는 억새의 순간순간 변하는 은빛, 황금빛 물결은 상상만 해도 그림이 되니까. 하지만 그땐 달랐다. 춥고, 힘들었으니까.
특히 밀양에서 삼랑진으로 넘어가는 구간에서는 포기하고 싶은 마음도 굴뚝같았다. 낙동강과 밀양강이 만나는 삼각주에서 나룻배를 얻어 타고 건널 예정이었지만, 배가 없어 밀양 시내를 빙 돌아가야 했던 코스로 뚝 떨어진 기온과 바람 때문에 하루 하고 반나절을 고생했던 기억이 난다.
결국, 낙동강 도보여행을 마친 후 새막골 집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가장 가까운 집이 800미터 이상 떨어질 정도로, 외딴 곳에 자리한 70년 된 오두막은 겨우 비가림만 하고 살 정도로 열악한 환경이었다. 한 뼘도 채 안 되는 얇은 벽채는 추위를 막아주지 못했고, 계곡물을 길러다 식수로 쓸 정도의 열악한 환경은 추위에 지친 몸을 쉽사리 녹여주질 못했다. 그야말로, 새막골은 오지 중의 오지였다. 안타까웠지만, 자연과 가장 가까운 원시적인 삶을 택해 스스로 찾아 들어갔던 새막골을 춥다는 이유로 떠나게 되었다.
그렇게 난, 무주로, 추위가 싫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따뜻한 남쪽 나라'의 주민이 됐다.
남도는 고등학교 1학년 때까지 학창시절을 보낸 곳이다. 하지만 웬만큼 알려진 산은 다 올랐을 정도로 산을 좋아하면서도 지리산 종주는 두 번 밖에 안 했다. 그땐 강원도에 미쳐 있을 때라 남도가 보이지 않았다. 남쪽 지방의 정서보다는 강원도 산골 문화에 더 익숙해져서 그런지 고향에 대한 특별한 애착도 없었다. 그런데 단지, 춥단 이유 하나로 남쪽 지방에서 살게 된 것이다. 그 이후 사람을 만나면 "오지여행가가 왜 남도에 살아?"라는 질문을 수도 없이 받았다. 그럴 때마다 나는 "추워서"라고 했다. 그리고는 "때론 한 발자국 떨어져서 바라보는 맛도 좋거든."이라고 대답한다.
여전히 강원도를 좋아한다. 강원도 사람과 맛, 문화를 사랑한다. 하지만, '지금 이곳'의 소중함을 깨달았다. 정들면 다 고향이라 하지 않았던가.
펜션 이름을 '언제나 봄날'로 하게 된 연유도 '추워서'다. 따뜻한 남쪽나라가 그리웠으니, '언제나 봄날 같은 따스한 집'이 됐으면 하는 마음으로. 이곳을 찾는 여행자들의 편안하게 쉬어 갔으면 마음으로 말이다. 이따금 현관 앞에 걸린 '언제나 봄날' 현판을 바라 본다. 보기만 해도 포근해지는 기분이 참 좋다.
'여행자의 집 언제나 봄날'. 서창마을 황토펜션은 '눌산스타일'로의 변화를 시작했다. 명함에도, 블로그에도, 급한 김에 만든 현수막에도, '언제나 봄날'이라는 글자가 들어갔다. 마을 사람들이나 등산객들이 지나가면서 한 마디씩 건넨다. "보기만 해도 참 따뜻해 보이네요."라고.
2008년 5월. 뜬금없이, 서창마을 황토펜션 주인이 되었다.
지금은 펜션 주인이 아닌, 한 사람의 여행자로 여전히 서창마을에 살고 있다.
이 글은 그간의 기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