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두막의 꿈
"촌장은 허름한 집에 살아야 할 팔자야"
무주에 정착하기 전, 새막골에서 3년을 살았다. 그때 집에 놀러 온, 뭐 좀 볼 줄 안다는 오지여행 회원이 나를 보더니 "촌장은 허름한 집에 살아야 할 팔자야"한다. 나는 그를 ‘무늬만 도사’라고 불렀다. 뭐 좀 볼 줄 아는 것 같기는 한데, 하는 말들이 죄다 엉뚱한 얘기들 뿐이니... 무늬만 도사는 새막골에 있는 내 모습이 가장 편안해 보인다고 했다. 평소와는 다르다는 애긴데, 믿거나말거나지만, 이따금 새막골 생활이 그리울 때가 있다. 잠시지만, 행복했었다.
새막골은 충청북도 영동군 상촌면 궁촌 2리에 속한 자연부락 중 하나로 해발 1,111m 황악산 7부 능선에 자리한 중부 이남에서는 가장 깊은 골짜기라 할 수 있는 곳이다. 궁촌 2리는 영화 '집으로'를 촬영한 곳. 모두 세 개의 골짜기로 나뉜 마을은 황악산을 사이에 두고 경북 김천과 충북 영동이 접해있다. 같은 마을인 점마와 지통마는 2km가량 떨어져 있어 한 마을이지만 분위기는 사뭇 다른 풍경이다.
궁촌리는 오래전, 백두대간 길을 걸을 때 지친 몸을 잠시 쉬기 위해 찾으면서 인연이 시작됐다. 몸살감기에 더 이상 산행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30분 거리인 황악산 정상 바로 아래 지통마에서 며칠 쉬어 가게 되었다. 마을 주민들은 몸져누운 나를 위해 몸에 좋다는 온갖 약초를 달여 마시게 했고, 따뜻한 밥과 왕복 두 시간을 걸어서 나가야 하는 면소재지까지 나가 약을 지어다 줬다. 덕분에 몸을 추스른 나는 가던 길을 계속 갈 수 있었다.
다시, 그 인연을 만난 것은 영화 ‘집으로’ 덕분이다. 온 나라를 눈물바다로 만들었던 영화 속 풍경이 낯익어 보니, 바로 그곳이 아닌가. 마지막 추위가 맹위를 떨치던 2월 말, 그동안 까맣게 잊고 있었던 궁촌리를 찾았다. 이 골 저 골 둘러보던 차에 새막골에서 쓰러지기 일보 직전의 오두막을 만났다.
새막골에서도 외딴 집인 이 오두막을 처음 본 순간, 온몸에 전율을 느꼈다. 가슴은 벌렁대고, 금단현상 같은 묘한 기운은 머리 끝에서 발끝까지 타고 흘러 내렸다. 나는 분명 이 오두막을 어디선가 본 적이 있었다.
숲 한가운데 자리한 오두막에서는 하늘이 손바닥으로 가려질 만큼 좁게 보였다. 달빛이 나뭇잎 사이로 빼꼼히 얼굴을 내밀고, 서걱이는 바람에 오두막은 함께 춤을 추었다. 나는 속옷 하나 걸치지 않은 채 맨몸으로 마당을 걸어 나가 개울물에 몸을 담갔다.
“아, 꿈속에서 만났던 바로 그 오두막이잖아”
꿈이었지만, 너무나 생생하게 기억나는 그 장면. 꿈속에서 만났던 그 오두막이 지금 내 눈 앞에 있다. 회색빛 호두나무에 둘러싸인 숲 속의 집이었다.
누굴까. 이 집에서 살았던 사람들이 궁금했다. 다시 아랫마을로 내려가 오두막에서 살았던 사람들이 어디로 갔는지 물었다. 대구에 산다고 했다. 오래전 새막골을 떠난 오두막 주인은 봄이면 산나물을 뜯으러 온다고도 했다.
“그 집에서 잠시 살고 싶은데, 연락처를 좀 알 수 있을까요?”
아랫집 어르신은 큼지막한 숫자가 새겨진 농협 달력을 한참이나 넘기더니, 대구에 산다는 오두막 주인의 전화번호를 찾아냈다. 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 자리에서 오두막 주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우연히 지나다 찾아오게 되었는데, 그 집에서 한 1년쯤 살 수 있을까요?”
“다 쓰러져가는 집이라 사람 못 살아요.”
“아, 저는 글을 쓰는 사람인데, 제가 대충 수리는 하고 살겠습니다.”
“허허 참. 그럼 한번 살아봐요.”
“정말 고맙습니다.”
나는 다시 그 오두막으로 올라갔다. 방 안의 쓰레기를 대충 치우고, 늘 차에 싣고 다니는 텐트와 침낭을 꺼내 펼쳤다. 하룻밤 자고 갈 생각으로. 그렇게 난 새막골 오두막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온갖 냄새와 쓰레기 가득한 곳이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다음날 아침, 어제 만난 아랫동네 어르신은 오두막에서 자고 나온 내 모습을 보고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여기서 잔 거요?”
뭐랄까, 당신 간첩 아니야? 하는 듯한 그 황당한 표정. 외딴집이라 마을 사람들 조차도 평소에 잘 안 오는 그런 폐가에서 잤다니…….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그 무렵 황악산에서 표범을 봤다는 사람이 있어 뉴스에까지 나온 모양이었다. 그 후로도 황악산에서는 표범의 흔적이 여러 번 발견되었다.
아침에 만난 오두막은 더 처참했다. ‘ㄷ’자 구조의 오두막은 모두 세 채로 나누어져 있는데, 본채를 제외하고는 모두 반쯤 쓰러진 폐가였으니까. 사람이 살 수 있는 집이 아니었다. 다행히도 본채는 벽채 흙이 좀 떨어져 나갔을 뿐, 수리는 가능해 보였다. 문제는 식수다. 산에서 흐르는 물을 받아쓰는 수밖에.
언제나 ‘오두막의 꿈’을 꾸고는 살았지만, 새막골은 살고 싶은 곳보다는 살아보고 싶은 곳이었다. 오지여행가란 직업으로 살면서 오지에 살아 본 경험이 없다는 게 말이 안 됐다. 다른 사람들의 삶을 수박 겉핥기식으로 잠깐 들여다보고 글로 쓴다는 게 어설프기도 했고……. 내 글을 보는 독자들에게 죄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직접 경험해보고 싶었다. ‘오지여행가답게 오지생활을 경험해 보자’는 마음으로. 그렇게 3년을 살게 된 곳이 새막골이다.
새막골은 전기 이외에는 문명의 혜택이라고는 전혀 없는 곳이었다. 70년 된 흙집은 구멍이 숭숭 뚫려 있었고, 산에서 흐르는 물을 받아 식수로 사용했다. 한겨울이면 그 마저도 꽁꽁 얼어 계곡에서 얼음을 깨고 물을 길러다 먹었다. 심지어 냉장고 온도보다 부엌 실내온다가 더 낮아 냉장고도 작동이 안 되는 일도 있었고, 채 한 뼘이 안 되는 벽채는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위태로웠다. 솜씨 없는 재주로나마 기둥을 세워 비스듬히 넘어진 벽채를 고정시키긴 했지만, 불안한 마음에 며칠 외출이라도 하고 오는 날이면 가장 먼저 벽채의 안전부터 확인하곤 했다. 800미터 거리의 가장 가까운 이웃으로 살았던 팔수 형님 얘기가 "사람이 사는 집은 절대 무너지지 않는 법이야."라는 말에 위안을 삼곤 했다.
살아보고 싶은 집이었기에, 생활은 원시에 가까웠다. 있는 그대로를 느끼고 싶었다. 문짝이 떨어져 나간 변소는 굳이 문을 달지 않아도 됐다. 누가 볼 사람도 없었으니까. 그런데 어느 날 아침 볼일을 보기 위해 뒤란 변소에 앉아 담뱃불을 붙이는 순간, 눈 앞에 고라니가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는 게 아닌가. 고라니는 놀라 산으로 내달았고, 나 역시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놓치고 말았다. 하루는 산에 갔다 들어오는데, 집채 만한 멧돼지가 새끼 대여섯 마리를 끼고 뒤란 호두나무 아래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멧돼지와 나는 거의 동시에 눈이 마주쳤고, ‘우르르 쾅~’소리와 함께 흙먼지가 일더니 녀석들은 사방으로 달렸다. 나는 그 순간, 줄무늬가 선명한 새끼 멧돼지 한 마리를 잡을 요량에 달려갔지만, 결국은 놓치고 말았다. 나중에 아랫마을 어르신한테 그 얘기를 드렸더니 “새끼와 함께 있는 어미는 보호 본능 때문에 사람을 공격해. 최 선생 큰일 날뻔했어”하시는 게 아닌가. 그 후론 방문 고리에 숟가락을 걸고 자야만 했다.
오두막으로 오르는 길은 경사가 만만치 않아 눈이라도 오는 날이면 고립은 기본이었고, 평소에도 4륜 구동 아니면 다닐 수 없었다. 3년간의 새막골 생활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 '눈'이다. 황악산 7부 능선쯤 되는 고지대다 보니 아랫마을에 비해 몇 배는 더 쌓였다. 집이 무너질까 노심초사 밤을 새우며 지붕 위의 눈을 쓸어 내렸다. 그런데도 그 3년의 새막골 생활이 그리울 때가 많다. 그것은 아마도, 순박하고 유독 정이 많은 새막골 사람들 때문이리라. 그 오두막보다, 그 사람들이 더 그리운 것을 보면 말이다.
새막골에서 내 호칭은 상황에 따라 달랐다.
아랫집 어르신은 ‘최 선생’이었고, 팔수형님은 그때그때 달랐다. 술 한잔 하면 아우님, 다음날 아침이면 선생님으로. 유독 정 많은 팔수형님과는 술친구였다. 형수님이 장이라도 보러 가는 날이면 어김없이 전화가 걸려온다.
“닭 잡고 있으니까, 빨리 건너와요~”
나 보다 나이는 한창 위지만, 맨정신에는 어김없는 존댓말이다. 닭다리 하나씩 잡고 한잔 하면서 형님, 앞으로 존댓말 하거나 선생님이라고 하면 저 절대 형님 집에 안 옵니다. 하면 아, 알았어~어, 아~우~님. 세상에서 가장 무섭다는 형수님 없는 날 말고도 비 오는 날이면 난 어김없이 팔수형님 집에 있었다. 요즘 무주에서도 즐겨먹는 가죽나무 새순은 팔수형님 집에서 처음 맛봤다. 이름 그대로 가죽 냄새가 나서 가죽나무인데 처음에는 역겨운 냄새 때문에 먹지 못했다. 하지만 그 맛을 알게 된 이후로는 일부러 찾아다니면서 먹을 정도로 좋아한다.
여러 호칭 중에 가장 마음에 드는 호칭은 영화 ‘집으로’의 주인공 김을분 할머니가 부르는 ‘최씨’였다. 최씨~하고 불러 달려가면 언제나 맛있는 음식이 차려져 있었다. 할머니집은 늘 새막골과 점마, 지통마 사람들의 사랑방이었다. 가마솥에 보리밥을 해서 밭에서 금방 뜯어 온 채소를 넣고 버무린 비빔밥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대 여섯 명이 툇마루에 둘러 앉아 먹는 맛이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최고였다.
새막골에 살면서, 산촌생활을 몸소 체험하면서, 내 글이 달라졌다. 여행자의 눈으로만 바라보던 산촌풍경이, 그곳에 사는 사람들 입장에서 바라보게 된 것이다. 그런 이유로, 그 무렵 쓰고 있던 오지마을에 관한 책 쓰기를 접었다. 오지를 세상에 알리는 일이 내 밥줄이었지만, 더 이상 알려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신문 잡지에 기고하던 여행칼럼 역시, 사람 중심의 글을 쓰게 되었고, 풍경에 집착하던 여행이, 사람을 만나는 여행으로 바뀌었다.
여행은 ‘사람’이니까.
2008년 5월. 뜬금없이, 서창마을 황토펜션 주인이 되었다.
지금은 펜션 주인이 아닌, 한 사람의 여행자로 여전히 서창마을에 살고 있다.
이 글은 그간의 기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