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그나마 행복했다. 유년기>
“이거봐바”, “여기봐바”
이 두 말이 입에서 늘 튀어나왔고, 그 말에 반응 하지않으면 늘 어깃장을 부리며 훼방을 놓았다.
이렇듯 아들에게 가장 문제가 되었던건 사회성에서 시작되는 또래관계였다.
사회성을 길러보려 노력을 하다가 불현듯 오는 현타…
‘왜 이런 것 까지 알려줘야 하는거지?’
‘어디까지 알려줘야 하는거지?’
‘자연스레 습득해야 하는거 아닌가?’
유년기시절에 남부럽지 않은 교우관계를 갖고 살았던 나로써는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었고, 당시 아들과 동성인 남편은 바쁜 업무로 도움을 줄 여력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아이의 문제를 온전히 혼자서 해결해나가야 했다.
사설상담센터도 물론 가봤다.
허나, 늘 돌아오는건 아이의 마음을 더 읽어주시라(병원진단받기전임)는 처방이 우선이었고 긴 시간동안 훈련을 하려 들었으나, 그것에는 유독 반감을 갖았던 아들덕분에 오래 유지되진 못하였다.
그래도 기관에는 다녀야 하는 나이이니 계속 친구들이랑의 관계는 필요한 부분이고 그러면서 생기는 자잘한 사건 사고들에 내 자존감까지 무너지는 나날이 계속되었다.
과수원집 딸도 아니고 이곳 저곳 다니며 사과를 드려야하는 일이 소극적인 나에게는 엄청난 스트레스였다.
조금만 더 대범하고 쿨한 성격이었더라면, 점점 주눅들어 땅굴파는 일을 시작하진 않았을텐데, 좀 더 세상에 나와 아들을 위해 적극적으로 힘써주었을텐데… 나는 되려 더 주눅이 들어 점점 내 존재가 희미해지는 것 같았다.
내가 더 소심해진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그러다 내가 상황을 바꾸기 시작했다. 아이 친구들과 편치않은 마무리로 끝내는 모임에서 빠져나와 아들이 좋아하는 것들을 찾아 다니며 지내기 시작했다.
공룡과 레고를 좋아하는 아이와 둘이서 보내는 시간이 더 행복하고 마음이 편했다.
전국의 공룡전시장을 찾아가고, 레고박람회, 체험장을 다니며 체험을 했다.
미술관, 박물관, 과학관을 데리고 다니며 둘만의 데이트를 신나게 즐겼었다.
부족함 없이 경험을 시켜주는 시간이었다.
이렇게 우리둘만의 시간동안은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고, 잔잔한 행복까지 느낄 수 있었다.
둘이 보내는 시간은 불편함이 없었다.
나는 늘 그 아이와 주변을 함께 살펴오다 오직 우리 아이만 바라보고, 이 아이는 온전한 관심과 집중을 받을 수 있으니 불편함도 불쾌함도 없었을 거다.
감히 말할 수 있다.
나는 최선을 다했다.
그럼에도 이 아이는 늘 제자리인듯 싶었다.
문제는 해결되이 않았고, 나는 더더 작아져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