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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변정숙 Jul 21. 2016

붉은 마음

미니스커트 입은 여자

         

병원 정문을 왼쪽으로 돌면 빈 택시가 줄 서 있다. 삼삼오오 모인 기사들은 나무 아래 벤치에 앉거나 서서 담배도 피우고 두런두런 얘기를 나눈다. 기사들이 일제히 고개 돌려 보고 있는 곳을 쳐다봤다. 10미터 떨어진 내 앞에 다리가 미끈하게 빠진 여성이 제자리에 서서 휴대전화를 보고 있는 듯했다. 

순간 미끈녀의 초미니 스커트가 바람에 날리면서 아슬아슬하게 속옷을 보여주더니 바람이 더 세게 불어 치마가 위로 팔랑거리다 내려앉는다. 그녀의 나팔꽃 같은 플레어 미니 스커트는 꽃잎 벌어지듯 활짝 벌어져 날아오를 기세다. 택시 기사들 옆을 빠르게 지나쳐 그녀에게 다가가 귓속말로 치마를 가려야겠다, 속옷이 다 보인다고 말했다. 그녀는 화들짝 놀라며 짧은 치마를 쓸어내렸다. 내 오지랖으로 택시기사들의 찌릿한 볼거리를 싹둑 자른 게 잘한 건지 어쩐 건지는 모르겠다.

25년 전이다. 우리 학교는 돌연 불어오는 회오리바람에 낭패를 안 본 여학생이 없어 여간해서는 치마를 입지 않아 여학생 다운 이를 구경하기 드물다. 대구에서 맨 마지막 종점인 것도 치마 안 입기에 한 몫했다. 2시간씩 버스 타고 가려면 버스 안에서 꾸벅꾸벅 졸기 일쑤인데 졸다보면 쩍 벌어지는 다리는 '본능'인 것이다.

예쁜 치마 입고 곱게 화장한 여학생은 우리 학교 도착하기 몇 정거장 앞에서 다 내리는 여자대학교 학생들이었다. 버스에 남은 잔여 인간들은 거의 고무신 신은 아저씨 같은 복학생 형들, 여성미라곤 볼 수 없는 섬머스마 같은 여학생들이 대부분이었다. 나도 그 섬머스마 중 한 명이었다.

내가 그날 왜 치마를 입었는지 모르겠다. 도서관에 가방 던져놓고 이리저리 폴짝거리며 복학생 형들 따라다니는 메뚜기 흉내 낼 때였지 싶다. 그즈음 처음으로 내 자리에 누군지 모르는 어떤 이가 매일 캔커피를 놔두고 갔었다. 뒤늦게 섬머스마 땟국물 벗고 누군가 나를 여자로 바라보는가 보다 싶었다. 그래서 더 여자처럼 보이려고 치마를 입었을지도 모른다. 

발목까지 내려오는 긴 플레어스커트를 입고 도서관 앞 야외 휴게실 담벼락에 서서 종이컵에 담긴 커피를 홀짝거릴 때였다. 갑작스럽게 불은 돌풍이 내 폭넓은 치마 밑으로 들어가 확 올려버렸고 난 순간 치마를 부여잡는다는 게 잡고 있던 커피를 놓쳐 치마에 쏟아버렸다. 

커피를 치마에 쏟은 부끄러움보다 화장실 가려고 뒤돌아섰을 때 휴게실에 빽빽하게 서있고 앉아있는 남학생들이 먼저 눈에 들어와 얼굴이 청도 복숭아처럼 붉어졌었다. 그날 이후 다시는 휴게실 근처 얼씬도 하지 않았다. 혹여 그날 책상에 캔커피를 뒀던 그 누군가가 봤을지도 모르겠다. 캔커피는 더 이상 구경할 수 없었으니 ㅋㅋㅋ.

내게 또 한 번의 민망한 일은 그 날이후 3년 뒤에 다시 찾아왔다. 출근 시간 맞춘다고 하이힐을 신고 뛰다가 힐이 보도블록 사이에 끼면서 큰 대자로 넘어져버렸다. 금융회사 건물 바로 앞이라 양복 입은 넥타이 맨들이 함께 출근하는 길이었다. 짧은 치마는 훌렁 올라갔고 스타킹은 쭉 찢어져 무릎에서 피가 배여 나왔다. 아픈 건 둘째치고 괜찮냐 걱정하는 넥타이 부대를 피해 숨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마음이 차가워질 땐 뜨끈뜨끈 혈색 잘 돌게 그날의 민망한 일을 떠올려야겠다.


2015년 7월 어느날 일기를 꺼내 읽다. 다시 떠올려도 어제 일 처럼 마음이 붉어진다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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