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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묘 May 17. 2020

민낯의 세계

<부부의 세계>, 코로나 펜더믹 등 요즘 '민낯'을 사용하는 모습

요즘 ‘민낯’이 대세다. 지금처럼 ‘민낯’이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하던 때가 있었나 싶을 정도다. 인터넷에서 다양한 기사를 읽다 보면 ‘민낯’이라는 단어를 수시로 만나게 되는데, 어떤 날은 기사 헤드라인이나 브런치 글 제목에 ‘민낯’이 얼마나 쓰였는지 궁금해서 세어본 적도 있다. 그러다 보니 수시로 출몰하는 ‘민낯’이라는 단어가 왠지 모르게 불쌍해졌다. 그것이 사용되는 맥락을 보면 때론 안타까움에 마음이 착잡하기도 하다. 남들 보기에 뜬금없는 발상일 것이다. 쓸 데 없는 것에 집착하고 있는 게 아니냐고 반문할 수 있겠다. 맞는 말이다. 집착은 확실하니까. 다만 쓸 데 없는지는 아직까지 결론 내리지 못했다. 어쩌면 우리가 중요한 사실 하나를 간과한 채 이 단어를 마구잡이로 사용하는 것은 아닐까, 그런 의문이 뇌리를 스쳤다.




<부부의 세계>가 유행이다. 박해준이 김희애에게 날린 대사 한 마디, “사랑에 빠진 게 죄는 아니잖아!”는 벌써 수많은 패러디를 양산하고 있다. 전국 시청률은 현재 24.442%, 비 지상파 드라마 역대 최고 시청률을 갱신했고 동시에 JBTC 채널 역대 최고 시청률에 등극했다. 김희애야 그렇다 쳐도, 그동안 무명에 가까웠던 한소희(여다경 역)라는 배우의 옷, 가방, 헤어스타일과 관련한 기사마저 인터넷에 쏟아져 나올 정도니, 드라마의 인기를 실로 짐작할 만하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두 사람이 가족이란 울타리를 만들어 서로의 인생을 섞어 공유하는 그 이름. 부부. (중략) 이것은 죽을힘을 다해 서로의 목을 조이는 치열한 사랑에 관한 이야기이다.’


드라마를 소개하는 문구 중 일부다. 그리고 문구대로 시종일관 배신하며 뒤통수치고, 믿었다가 다시 배신당하면서 뒤통수 맞고, 정말 혼이라도 있고 없고, 넋이라도 쏙 빠져나갈 만한 상황이 펼쳐진다. 최선을 다해 서로의 목을 조이는데, 부부만이 아닌 관련된 그 주변 사람들까지 다 복잡하게 얽힌 채로 총을 겨누고 있으니, 아무리 드라마라도 애초에 결혼은 왜 해가지고 다들 생고생인지 모르겠다. 졸이고 졸여 맛을 보면 절로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소금 맛 국물처럼 자극적인 <부부의 세계>는 연예부 기자들에게 초유의 관심사이다. 매 회가 진행될 때마다 앞 다퉈 기사를 쏟아낸다. 그런데 이 기사들을 잘 살펴보면 공통점이 있는데, 바로 <부부의 세계>가 실제 부부 관계의 ‘민낯’을 드러낸다고 한결 같이 목소리를 낸다. 실제로 기사 제목이나 본문에 ‘민낯’이 들어가지 않은 경우를 찾기가 더 어렵다. ‘부부의 세계, 사랑의 민낯과 관계의 이면’, ‘김희애가 열어젖힌 부부의 세계 민낯’, ‘부부의 세계 박해준 김희애 머리채 잡은 채 민낯 드러내’, ‘부부의 세계 이학주 죽음으로 드러난 관계의 민낯’, ‘적나라한 민낯 드러낸 부부의 세계, 시청률 폭등할 수밖에’, ‘부부 민낯 드러낸 부부의 세계’ 등과 같은 제목이 적지 않고, 제목에는 빠졌어도 본문에는 ‘민낯’이라는 단어가 빠짐없이 등장하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이쯤 되면 <부부의 세계>를 이야기할 때는 ‘민낯’을 빼놓지 말자고 기자들이 사전 협의한 느낌이다.

(좌) <부부의 세계> 인물 관계도 (우) 아, 아프겠다. 이게 부부의 '민낯'이라고?




우리는 코로나 팬더믹, 즉 코로나의 세계적 대유행 시대를 살고 있다. 근래에는 해외의 대응 방식에 대한 기사가 줄어든 편이지만, 전 세계적으로 코로나가 급속도로 확산되던 초창기에는 관련 기사가 수시로 쏟아져 나왔다. 그 당시에는 각 나라가 어찌 대응하는지를 신속하게 보도하는 것이야말로 기자들의 신성한 사명 같았다. 보도된 내용을 보면 마스크 착용 및 사회적 거리두기를 잘 실천하던 우리나라 국민의 품격 있는 모습과는 달리, 미국이나 유럽 등 선진국으로 평가받던 나라들이 보여준 모습은 그동안 잘 쌓아온 시민의식과 사회 시스템의 명성을 무색하게 만들 정도였다.(대한민국의 국민으로서 자랑스러움을 느낀다.) 그들은 정부 차원에서 코로나 방역을 섬세하고 체계적이며 폭넓게 실시하지 못했다. 교양 있는 시민의식으로 우러름 받던 그 나라의 국민들은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주장하며 마스크도 착용하지 않고 거리두기에는 무척 둔감했으며 오로지 사재기할 때에만 무섭게 예민했다. 이런 선진국들의 행태는 우리나라의 기자들에게 흥미로운 기삿거리가 될 수밖에 없었다. 누가 봐도 그들에 비해 우리나라 정부와 국민은 잘 대응하고 있으니 이 대조되는 모양새를 대서특필했는데, 이때도 어김없이 ‘민낯’이 여기저기 등장했다. ‘선진국의 민낯-이제 누가 선진국일까’, ‘팍스 코로나, 미국식 자유주의의 민낯’, ‘코로나 19로 드러난 미국의 민낯 두 가지’, ‘코로나 19 사태로 드러난 미국과 유럽의 민낯’, ‘코로나로 드러난 전 세계 민낯’ 등 여기서도 ‘코로나’만큼 ‘민낯’이 사용된 것을 보면, 이제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요즘 글 좀 쓰는 사람(기자든, 일반 에세이스트든)이라면 독자에게 가장 먹힐만한 키워드로 선택하는 단어가 ‘민낯’이라는 것을. <부부의 세계>나 코로나처럼 ‘민낯’이라는 단어도 우리나라에서는 대유행이라는 것을.

(좌) 거의 두 달 전 확진자가 전 세계적으로 확대되던 시기 (우) 결국 팬더믹을 선언할 수 밖에 없었다. 어서 빨리 이 사태가 회복되길.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민낯’이란 ‘화장을 하지 않은 얼굴’을 뜻한다. 인위적인 손길이 닿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상태라고나 할까. 한 존재가 갖고 태어난 태초의 모습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그런데 많은 남성들은 여성이 이런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나타나면 수군수군거린다. 심지어 비아냥대는 이도 있다. 어떤 화학 물품의 꾸밈없이 그 사람의 가장 진실된 모습이자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상태인데도 불구하고, 여성의 ‘민낯’을 꺼리는 분위기 또한 일종의 불편한 문화가 되어 버렸다. 당장 인터넷만 검색해 봐도 ‘민낯’을 희화화하는 게시글이 차고 넘친다. 화장품 광고는 제품을 쓰지 않으면 아름다워질 수 없다고 은연중에 우리를 세뇌한다. 이렇게 사회적으로 화장을 안 한 여성의 얼굴을 조롱하거나 어색하게 여기게 만드는 문화 때문에 ‘민낯’이 긍정적인 의미보다 부정적인 의미로 더 많이 쓰이는 것은 아닐까 싶다.

잠 자기 전 바비 인형 민낯 굴욕, 화장 지우니 “이게 누구야?” => 이게 관련 기사 제목이다. 무슨 바비 인형에게까지 '민낯' 굴욕이니? '민낯'이 왜 굴욕인거야, 도대체?


애석한 일이다. 그렇기에 우리의 ‘민낯’은 외모라는 사전적 의미를 넘어서, 여러 부정적인 사회적 맥락으로까지 확장되어 사용되고 있다. <부부의 세계>는 겉으로 하하호호하는 부부의 모습 뒤에는 서로 의심하고 배신하면서도 사랑하는 모습이 감춰져 있다고 말한다. 그게 부부의 민낯이란다. 뭐, 그런 부부도 있을 수 있겠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부부도 당연히 존재하지 않을까. 사랑이 우정으로 승화되어 오랜 친구처럼 서로를 의지하는 노부부들 또한 엄연히 우리의 곁에서 살아간다. 부부의 ‘민낯’이 사랑과 우정으로 적나라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또한 코로나 펜더믹에 대처하는 선진국 국민들의 행동은 입방아에 오를 만하다. 그것을 옹호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그들의 무개념적인 행동을 결국 ‘민낯’이라는 단어로 평가함에 따라 역사적으로 쌓여있던 ‘민낯’의 부정적 함의는 다시 한번 강화될 수밖에 없다. 반대로 이러한 시국에서도 서로를 격려하고 질서 있게 움직이며 상대방을 배려하는 시민들의 모습은 왜 ‘민낯’이라고 평가하지 않는 것인가. 공공의 행복 지수를 높일 수 있는 선량한 행동들도 응당 우리가 원래부터 갖고 있던 적나라한 ‘민낯’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가? 


그러므로 다시 질문을 던져본다. 우리의 ‘민낯’은 정녕 아름다울 수 없는 걸까? ‘민낯’이라는 단어를 한쪽으로만 치우치게 하여 태초부터 갖고 있었던 우리의 본질을 잃어버리게 만들려는 누군가의 음모는 아닐까? 멀쩡한 ‘민낯’에 인위적인 것을 자꾸 첨가해서 자신의 주인이 내가 아닌 다른 무언가가 되게 하려는 비밀 결사의 치밀한 음모가 깔려 있는 것은 아닐까? ‘민낯’의 세계가 어디까지 적나라하게 바닥을 쳐야 사람들은 만족할까? 모를 일이다. 그럼 마지막 질문. 우리, ‘민낯’을 긍정할 수는 없는 걸까? 정말로 긍정적인 상황에는 쓸 수 없는 거야? 정말로?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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