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실 책상 앞에 앉았다.
컴퓨터를 켜고 음악을 틀었다.
일을 막 시작했는데 눈을 떠 보니 깜빡 졸았다.
고개를 한 바퀴 돌렸다.
뿌드득.
뼈가 맞춰지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피곤했었나 보다.
다시 정신을 차려서 모니터에 집중했다.
눈을 떠 보니 또 깜빡 졸았다.
안 졸았다고 변명하고 싶지만 시곗바늘이 증명해 주고 있었다.
벌써 한 시간이 지났다고.
하지만 한 시간 졸았다고 말하지 않는다.
깜빡 졸았다고 할 뿐이다.
깜빡은 얼마만큼의 시간일까?
10초일까 1분일까 10분일까 한 시간일까?
그 누구도 깜빡이 정확히 얼마의 시간인지는 알려주지 않는다.
눈 한 번 감았다가 뜨는 시간을 깜빡이라고 한다면 그 시간이 0.1초쯤 된다고 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누군가에게는 눈 한 번 감았다가 뜨는 시간이 6개월이 걸릴 수도 있고 1년이 걸릴 수도 있다.
제발 눈 한번 떠 보라고 사정하는 사람들의 깜빡은 그렇게나 길다.
오래전에 방영되었던 드라마를 케이블TV에서 다시 보여주고 있었다.
등장인물의 차림새가 촌스러운데 왠지 정겹게 보였다.
예전에는 저런 게 유행이었다.
저 때는 저랬지 하면서 드라마를 보는데 그때의 내 모습이 선명하게 비쳤다.
나도 그렇게 하고 다녔다.
카페에서 만나자는 말을 쓰기 전이었다.
커피숍에서 만나자고 했다.
에스프레소나 아메리카노를 주문하기 전이었다.
밀크커피나 레귤러커피 혹은 블랙커피를 주문했다.
저게 언제 적 드라마냐고 하면서 햇수를 헤아려 보니 벌써 25년 전의 드라마였다.
그때는 나도 20대의 한창나이였다.
인생의 고민이 많았던 청춘의 때였다.
그때 어디에서 누굴 만났으며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생생하게 기억이 났다.
먼 옛날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엊그제의 이야기 같았다.
당장에라도 달려가서 그때의 나와 손을 맞잡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눈 깜빡할 사이에 나는 지금 여기에 와 있다.
사진첩을 뒤적이다 아버지 어머니의 사진을 보았다.
아버지가 하늘나라에 가신 지는 벌써 30년이 지났다.
30년의 시간이 지났으면 기억이 흐릿할 만도 한데 아버지의 얼굴이 낯설지 않다.
최근까지도 봤었던 얼굴 같다.
데칼코마니처럼 어디에서 많이 본 얼굴이다.
어디에서 봤을까?
어디였더라?
기억을 되돌리려고 거울을 봤다.
아! 거기에 아버지의 얼굴이 있었다.
눈 한번 깜빡할 시간이었는데 사진 속의 아버지가 거울 속에 들어가 계셨다.
가수 김진호씨가 부른 <가족사진>이라는 노래를 들었다.
김영흠이 그 노래를 부르는 것도 유튜브에서 보았다.
눈 한 번 깜빡였을 뿐인데 아버지는 가셨고 아버지의 실루엣만 남았다.
나에게.
물기 어린 눈으로 멍하니 앉아 있는 나를 아들이 물끄러미 쳐다봤다.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이었다.
어디에서 봤더라?
기억이 났다.
오래전 거울 속에서 봤던 그 얼굴이다.
내가 아들 나이였을 때.
힘든 일을 만나면 예전에 힘들었던 때를 생각한다.
그때는 그 현실에서 빠져나올 수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눈 한 번 깜빡였을 뿐인데 공간이동 하듯이 그 지옥에서 벗어나 지금 여기에 있다.
그때의 눈으로 본다면 지금 내가 있는 이곳은 천국이다.
지금 이곳이 지옥 같을 때가 있다.
그때는 눈 한번 찔끔 감아 본다.
눈 한 번 깜빡이면 공간이동 하듯이 천국으로 가게 될 것이라는 기대를 한다.
랭보의 시집처럼 지긋지긋한 이곳에서의 시간은 <지옥에서의 한철> 일뿐이라고.
오백 년 도읍지도 눈 한 번 깜빡할 시간에 폐허가 되었다.
천년왕국도 눈 한 번 깜빡할 시간에 사라져 버렸다.
자랑할 것도 없고 주눅 들 것도 없다.
눈 한 번 깜빡할 시간이면 다 지나간다.
슬픔도 기쁨도.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이 지나간다.
그러니 지나가는 것에 연연하지 말자.
지금 내가 여기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만족하고 감사하며 살자.
그거면 충분하다.
김진호 <가족사진>
https://youtu.be/cS-IiArGmcU
김영흠 <가족사진>
https://tv.kakao.com/v/4052385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