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ar my thoreau

통찰, 그게 쉽나요

by 고시하

자극이란 어떠한 작용을 주어 감각이나 마음에 반응이 일어나는 것이죠. 자극은 모두 눈과 귀, 코, 혀, 몸이라는 우리의 오감을 통해 받아들여집니다.

시인 구상은 '누구라도 앉는 자리가 꽃자리'라고 말합니다.

나를 꽃피우려 하는데 왜 우리는 아직도 머뭇거리고 있을까요. 그것은 관념적인 상태에 머물기 때문입니다. 정의하고 정의할 때 꽃은 핍니다. 깊은 관조가 있어야 합니다. 느리게 때로는 격렬하게 굽이치는 삶에서 역설적인 구조를 심각하게 사색하고 고뇌해야 합니다.


지식은 지혜를 앞지르지 못합니다. 지혜의 본질인 질문은 비교할 수 없는 인간 고유의 감성으로 나다움의 능력을 나타내야 합니다. 삶으로 질문해야 합니다. 기존의 답이 아닌 변화된 답이나 질문을 할 수 있는 것은 지혜의 통찰뿐입니다.


빛의 속도는 항상 초속 30만 km입니다. 물리학자들의 공유지식이죠. 그러나 중요한 것은 초속 30만 km가 아닙니다. 경이로운 부분은 ‘항상’이라는 사실입니다. 다만, 두 가지 조건이 필요한데 진공과 중력입니다. 통찰에도 조건이 있습니다. 사유와 산책입니다. 진공과 중력에 견줄 수 있는 능력입니다.




인간의 앎에는 진실과 거짓이 뒤섞여 있습니다. 완전한 앎은 불가능하고, 완전한 거짓은 뿌리내리기 어렵기에 일리一理가 진실을 가리는 일이 많고, 또 일리에 갇혀 진실을 보지 못하는 일도 많습니다. 상식처럼 이해되고 있지만, 한 번만 더 생각해 보면 참이 아닌 것도 많습니다. 그래서 통찰에는 맑고 고요한 깊이가 필요한 이유입니다.


‘시간의 문 앞에서’란 글에서 권재술은 “세상 모든 것의 경계는 멀리서 보면 분명하지만 가까이에서 보면 모호해진다. 우리는 사물을 구별한다. 생물과 무생물, 동물과 식물, 짐승과 물고기, 나무와 풀, 나와 너, 물질과 정신, 선과 악, 천당과 지옥, 행복과 불행, 진보와 보수 등. 하지만 이런 구분은 절대적인 게 아니며, 모든 경계는 모호해진다. 모호하다는 것은 세상만사와 세상 만물이 서로 독립적이지 않고 서로 연관이 되어 있고,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이름을 붙이는 일은 구분하는 것이고, 구분한다는 것은 경계를 만든다는 것이다. 이름과 마찬가지로 경계도 자연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만든 것이다. 경계는 실체가 아니라 관념이다. 사물을 제대로 보지 못하기 때문에 붙여진 관념이다. 모든 갈등은 이 경계를 사이에 두고 일어난다. 너와 나의 갈등, 나라와 나라의 갈등, 진보와 보수의 갈등, 모두 경계에서 일어난다. 이 허구인 경계를 없애면 갈등도 없어지지 않을까?” 왜곡은 사람들이 정의한 기준에 있습니다.


내가 가진 왜곡은 없을까요? 나름 살아오면서 정의하고 이름 붙인 것을 잘 살펴보면 셋이나 넷쯤은 가지고 있을 뜻 싶습니다.

하지만 아들의 이름들과 아내의 애칭은, 시 한 편을 쓴 거지 정의하려고 지은 것은 아닙니다. 시인답게 아름답게 살아달라는 말입니다. 통찰은 시가 될 수 있어야 합니다.




행복에 대한 앎도 예외가 아닙니다.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자기만족이며, 이기적인 것이라는 오해가 있습니다. 물론 일리가 있죠. 사람은 행복을 추구하다 보면 자칫 이기적이기 쉬운 게 사실이며, 자기만의 행복에 갇히기 쉬운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자기 사랑’과 ‘이기주의’를 혼동해서는 안 됩니다. 자기를 사랑하고 행복한 삶을 추구하는 것은 이기주의와는 다르기 때문입니다.


쇼펜하우어는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에서 자신을 위하는 것과 타인을 위한다는 관계에 대해 “이상하게도 자기 자신을 위해 사색하고 탐구한 것만이 훗날 타인의 이익이 되는 것이며, 처음부터 타인을 위해서라고 정해진 것은 타인의 이익이 되지 않는다.” 고 말합니다. 쇼펜하우어의 말에 딱 맞는 사람이 있습니다. 미국의 철학자, 시인이며, 수필가인 데이비드 헨리 소로우David Henry Thoreau는 생태주의자의 효시입니다.

모든 삶을 다 정리하고 그는 월든의 숲으로 들어갑니다. 2년이 넘는 시간 동안 혼자 살고 혼자 삶을 영위하면서 자신을 위해 사색하고 탐구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이를 정리하고 기록한 책이 ‘월든’입니다. 소로우는 지극히 개인적인 삶을 살았지만, 그의 삶은 결코 개인적인 삶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시대를 뛰어넘는 소통의 삶이 되었고, 훗날 그의 사상은 우리나라의 법정 스님과 러시아의 대문호 레프 톨스토이, 인도의 국부 마하트마 간디, 미국의 마틴 루터 킹 목사, 남아공의 넬슨 만델라 대통령을 비롯한 많은 이들에게 영향을 주었습니다.


배움도 그렇습니다. 옛사람들의 배움은 철저하게 자기 자신을 위해 학문을 했습니다. 학문의 제일 목적이 자기 수양에 있었습니다. 그들이 남긴 학문은 수백, 수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 위대한 고전으로, 인류의 고귀한 유산으로 유익을 주고 있습니다. 반면에 요즘 사람들은 사람에게 이기기 위해, 인정받기 위해 공부합니다. 그러다 보니 학문이 얕아, 남에게 줄 것이 없는 공부가 되어 버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