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를 보고 열을 안다

모든 것과 미소 지을 수 있을까?

by 고시하

T. S. 엘리엇 Thomas Stearns Eliot은 미국계 영국 시인으로

“생계 속에서 잃어버린 인생은 어디 갔으며,

정보 속에서 잃어버린 지혜는 어디 있으며,

지혜 속에서 잃어버린 통찰 insight은 어디로 갔을까?”라고 깊이 없는 삶이 사라짐에 안타까워했습니다.

엘리엇뿐 만 일가요? 초지능화되어가는 현실을 보면서 미소 지을 수 있는 통찰은 어디서 찾아야 할까요?


걷는다는 것은 끊임없이 골똘히 생각하며 비판적인 안목을 기르는 사유의 긴장을 추구하는 걷기가 있고, 자연의 아름다움과 풍요로움 속에 사유의 이완을 추구하는 걷기가 있습니다. 전자가 일에 속한 것이라면 후자는 개념만을 지니고 걷는 것입니다. 뚜렷한 목적지를 정하지 않고, 절대로 빨리 걷지 않고, 걷기 속에서 자유롭고 창조적으로 사유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소로우가 우리에게 보여준 그저 걷는 것, 온몸으로 집중하는 걷기를 통해 눈부신 잠재력인 통찰적 창조를 최대한 끌어내는 것입니다.




창조성을 발휘하는 건 인간 특유의 신비한 능력입니다. 인류는 혁신적 사고와 문제 해결 능력에 힘입어 존재적 위협을 견뎌내고 번성했습니다. 그렇다고 창조성이 인류 생존에 꼭 필요한 거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창조성을 드러내지 않는 다른 종이 인류보다 더 오래 번창한 경우도 많기 때문이죠.

그럼 인간의 창조성이 발달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미국 드렉셀대 과학자들은 보통 ‘깨달음의 순간 aha moments’에 비유하는 창조적 통찰은 뇌 보상 체계의 폭발적 활성화를 유도한다고 합니다.

즉, 창조적 통찰이란 뇌신경 회로의 보상을 경험한 사람이 다른 걸 제쳐놓고 더 창조적 행위에 매달린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기본적 즐거움이 창조성에서 나타난다는 사실입니다.

존 코우니오스 교수는 “새로운 구상과 통찰의 발생이 뇌의 보상 체계와 연결되어, 창조성이 널리 확산되고 과학·예술이 발달하는 이유다”라고 말합니다.




“공자가 어느 날 자공子貢을 불러 묻기를 “너와 안회顔回 둘 가운데 누가 낫다고 생각하느냐?”라고 물었다. 당시 공자의 제자만도 3천 명이나 되었고, 후세에 이름을 남긴 제자도 일흔두 명이나 되지만, 재주로는 자공이 첫 손에 꼽힐 정도였다. 자공은 ‘제가 어찌 감히 안회를 넘을 수 있겠습니까? 안회는 하나를 듣고도 열을 알지만 저는 하나를 들으면 겨우 둘 정도만 알 수 있을 뿐입니다.’라고 하자, 공자는 자공의 대답에 흡족해하면서 ‘그렇다. 나와 너는 그만 못하다’는 말에서 유래됐습니다.

자공도 윗사람의 성격과 심리, 상황과 주변 정세, 국가 간의 역학관계를 꿰뚫는 지식과 정보를 지닌 사람이었습니다. 공자가 그토록 아꼈던 안회가 32세에 요절했을 때 ‘아, 하늘이 나를 망치는구나!’며 탄식했다고 합니다.

사람의 성격과 심리상황과 나라 간의 정세와 역학관계를 안다는 것은 지식인의 자질을 갖춘 자공이고, 하나를 듣고 열을 안다는 지극한 통찰자는 안회며, 자신을 알고, 남을 가름할 수 있는 행복자는 삼 천 명의 제자를 거느린 공자일 겁니다. 안회와 같은 사람을 책을 통해 가끔 만나곤 합니다. 그 사람들은 다섯 사람이상의 인생을 나누어 살고 있는 듯 보입니다. 셰익스피어가 쓴 글은 십여 명의 제자와 함께 집필했다는 후대의 소문처럼 말입니다. 차라리 자공이기만 해도 좋겠다는 생각이 스칩니다. 스스로가 애잔해집니다.


통찰의 종류와 방법은 다양합니다. 세상은 지식의 범람에 쓰라려하며, 통찰을 목메게 하는 삶을 살게 합니다. 그렇지만 통찰의 속살을 드려다 보면 우리에게도 창조적인 통찰은 찾아옵니다.

통찰력이라고 하면 심오함부터 생각납니다. ‘사물을 꿰뚫는 힘’이라고 사전적 정의를 내리고 있으니 그럴 만도 하죠. 하지만 통찰력은 현실을 제대로 볼 줄 아는 데서부터 비롯됩니다. 시간과 공간, 빛과 어둠, 채움과 비움, 니즈와 원츠라는 사람이 세워 둔 개념을 뚫고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