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ni story series
연기는 복합적인 감정을 다룬다. 유순한 삶을 살아온 나로서는 가령 분노와 슬픔, 그리움과 멀어짐을 동시에 표현하는 작업이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연기 수업을 받을 때면 연애 경험이 많은 친구들이 이러한 감정을 잘 다루고는 했다. 고등학생인 우리에게 선생님은 늘 이렇게 말씀하셨다.
"경험을 많이 쌓아라."
나를 미흡하게 여기는 마음은 그 말을 늘 좇았다. 선생님의 의도는 감정의 폭을 넓히기 위해 너희가 지금 할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인 연애(그것도 가벼운 연애)를 힘껏 하라는 말씀이었지만, 나는 알면서도 경험이라는 단어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그렇게 나는 경험 쌓기에 도를 트게 되었다. 지금보다 더 어린 날에 이룬 경험은 새로운 경험을 불러왔고, 다양한 분야에서 관심사를 모을 수 있었다. 다만 나의 경험 쌓기는 배스킨라빈스의 맛보기 스푼과 같아서 다양한 맛을 먹어보느라 최애 아이스크림을 고르지 못한 상태랄까. 나는 아직 이것도 저것도 맛보고 싶은데 벌써 하나의 맛을 고르라니. 고민하던 시기에 뉴욕에서 반평생을 살다 온 삼촌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우리 집안에 그런 삼촌이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삼촌은 나의 이야기를 쭉 들어보고선 뉴욕을 추천했다. 나를 질리게 하지 않을 도시, 좋은 경험이 될 도시. 나는 큰 고민 없이 홀로 뉴욕으로 떠났다.
복합적인 감정을 자아내는 것이 늘 부족하던 나에게 휘몰아치는 감정의 증폭을 가져다준 도시, 뉴욕.
나는 이곳에서 다양한 형태로 자주 무너졌다. 한국에서는 감기도 잘 걸리지 않는데 자주 아팠고, 살면서 가장 크게 다쳤고, 누군가 내게 하는 말을 이해하지 못했고, 거처를 구하지 못해 끙끙댔고, 지독하게 외로웠다. 나는 그럴 때마다 억지로라도 툭툭 털고 일어나야만 했다. 뉴욕을 오겠다는 나의 선택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기 싫었고, 내가 나를 지켜내지 않으면 아무도 지켜줄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 어느 때보다 강인해졌다. mindset. 사고방식을 바꾸자 마음속 여유가 조금씩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다양한 일이 찾아왔다. 친구를 사귀고, 나를 돕는 이들을 만나고, 탐험 속에서 취향을 발견했다. 어느 순간 도시가 주는 에너지를 온전히 내 것으로 받아낼 수 있게 되었다. 이 애달픈 적응기는 마치 뮤지컬 지킬 앤 하이드의 The Confrontation 넘버처럼 두 인격체가 선과 악을 넘나드는 모습과 비슷했다. 내가 가엽다가도 자랑스러웠다.
그렇게 이 도시에게 애증이 들었다. 수많은 감각을 일깨워준 순간, 자극과 영감이 되어 준 순간, 처음이라 더 강렬하게 남은 순간을 기록하기로 다짐했다. 단어로 엮은 짧은 이야기 속에 응축된 희로애락을 맛보길 바라며, 당신의 도전과 경험을 응원하며.
-JFK공항 입국심사대 앞에 걸린 포스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