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배희 May 15. 2022

왜 이렇게 아린 거야

                                                         

  모처럼 휴일에 하릴없이 커피에 기대어 날씨에 투덜대고 있는 중이다. 무심코 밖을 보니 햇빛이 수일 전 것이 아니다. 화창하다 못해 따가움이 봄은 봄이라고 확연히 알려 주고 있는 듯하다.


 며칠 전에는 4월이건만 설경을 TV에서 보았는데 어제는 너무 더운 탓인지 팔에 옷을 걸친 이들을 거리에서 수시로 볼 수 있었다. 그것을 바라보고 있자니 순간 문득 무언가에게 속은 듯한 기분이 든 것 또한 어쩌지 못했다. 아무리 그렇다고는 해도 이제 겨우 3월이 막 끝났을 뿐인데. 아니, 4월이 맞나? 하고. 그러자니 벌써 남은 봄이 부담스러워진다.


 사계절 중에 봄은 정말 싫다. 무언가 뒤숭숭한 것이 자리를 잡고 진득하니 앉아 있질 못하게 한다. 왠지 기름이라도 넘칠 것만큼 가득 넣어야 될 것 같다. 그런 생각으로 철철 대듯 주유를 하고 나니 그대로 그냥 집으로 돌아오기가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이대로 어딘가 가야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마음에 귀로를 망설이고 있으려니 정말 어디든 가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늘 가던 길이 아니라 다른 길을 돌아 집으로 그만 와 버리고 말았다. 이러지 저러지 못하는 것도, 그러다 내 뜻과는 아주 다르게 휘 헤매다만 돌아와야 하는 것도, 이게 다 봄 때문이다. 


 '쨍' 하기만 한 지금 바깥 날씨보다는 요란을 떨던 때 잃은 눈이 차라리 마음에 드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나른한 봄볕이 나를 싱숭생숭하게 하는 것이 어지러워서다. 그러니 혹 정서장애는 아닌가 생각해 볼 일이다.


  화끈거리는 유혹과 세상을 탈피라도 하는 듯 만물이 새롭게 조성되어 가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그것도 쓰라리다. 남쪽에서는 벚꽃이 만발하여 환장하리만치 장관을 이루고 있다는 전갈이다. 이제 곧 이곳도 그와 다르지 않을 텐데 그것을 또 어떻게 견딜 것인가. 내 눈에 다가올 몽환적이며 후끈후끈하고 나른한 들뜸 상태가 어느새 지겨워지고 있다.


 벌써 군데군데 피어난 아파트 단지 내 봄꽃들을 보고 있노라면 미리 정신이 없어진다. 이제 이런저런 꽃의 축제들이 꽃만큼 만발할 텐데 사람들의 호들갑이 만개한 꽃과 더불어 나를 혼란시킬 것이 분명하다. 


 얼마 전에는 추위가 채 가시기도 전인데 아스팔트를 들썩이며 죽을힘을 다해 올라오고 있는 푸른 싹을 보았다. 뭐 그렇게 살만한 곳이라고 작디작은 어린것이 머리를 들이대고 저리 나오려고 하는지. 새끼손가락만 한 것이 나도 못 드는 저 험한 콘크리트를 뚫고서 다른 세상을 보기 위해 기를 쓰고 있었다.


 그런 것이 눈에 띄어 보고 있으려면 마음이 아련해진다. 그 모습이 경이롭다고 찬사를 보내는 이도 있지만 그보다는 안쓰러움에 못 견뎌 콘크리트를 부수고라도 후련히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오히려 간절하다.


  아주 오래전 관악산 줄기를 끼고 있는 산자락에서 살았었다. 내 집을 벗어나 100여 m만 가도 울창한 숲이 있고 멍석처럼 넓디넓은 바위와 가재도 볼 수 있는 계곡물도 흐르던 곳이다. 어린 우리 아이들과 나에게는 무릉도원 같은 곳이었다. 아이들은 말할 것도 없이 혼자서 때때로 오르기를 좋아했다. 그러다 산 중턱쯤 가면 당시만 해도 어김없이 허름한 상인들이 자리를 잡고 등산객들에게 놀이판을 제공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사철 내내 계곡과 숲은 봄과 여름은 물론이고 얼면 얼어있는 대로 빈 가지가 말라 있을 때는 말라있는 대로 그들에게 자리를 주었다. 그때마다 그곳을 찾는 사람들의 모양들도 조금씩 달랐다. 산을 오를 때마다 그것을 관찰하는 재미도 나로서는 꽤 괜찮았던가 보다.


 그런데 유독 봄날에 오르는 사람들을 보면 봄기운에 어쩌지 못하고 한없이 취해 건들대는 것이 분명했다. 그 모습이 얼마나 흉하던지. 그러면서도 힐끔힐끔 오랫동안 훔쳐보았던 이유는 무엇인지 모르겠다.


 관악산 곁에 살며 내가 견디기 힘들었던 때도 봄이다. 뒷 베란다 쪽에 나있는 창을 열면 사시사철 창문 크기로 아름다운 풍경화가 걸리는데 정확한 구도의 봄 그림은 나를 자지러지게 한다. 진달래와 철쭉은 모르는 사이 짙어가고 있는 연두색과 더불어 하루가 다르게 온 산과 천지에 불을 붙여 놓는다. 언뜻 그 불이 내게로 옮겨 붙을 것이 두려워 창문을 닫고는 했는데 그러고 나면 어느새 나는 산에 오르고 있었다.


 이 봄에 생각을 해 본다. 그때로부터 수십 년이 지난 오늘의 봄이 내게 이렇듯이 그 봄에 어쩌지 못하고 취해 건들대던 그들도 지금 내 마음처럼 그랬을 것이라고. 그러고 보니 그들과 나는 크게 다르지 않은 상춘객이다. 어찌 보면 봄을 즐기는 모습은 그들이나 나나 다르지 않다. 흉하면 흉한 대로 봄을 탐하면 탐하는 대로 같은 모습일 것이다. 


 ‘날씨가 너무 좋아요’라는 수필집을 보면 젊어서 꿈꾸었던 여든 살의 자살도 여든 살의 봄이 오면 그는 죽지 못할 것 같다는 이야기를 한다. 그뿐 아니라 누군가는 임종 중에, 날씨가 너무 좋으니 창문을 좀 닫아 달라 했다고 한다. 작가는 이 말을 창창한 창밖 풍경을 두고 떠나기가 아마 아까워서였을 것이라고 이해하고 있다.


 그런데 정말 왜 이렇게 날씨는 좋은 건지. 어쨌거나 아린 봄이다.      


작가의 이전글 너를 보내야 하다니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