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배희 Aug 30. 2022

외설과 예술

      

 오래전에 작은 아이 등교를 위해 운전을 하고 있는데 익숙한 음률이 흘렀다. 약간 경사진 곳에서 신호 대기 중이었다. 페달을 놓아 버릴 것처럼 발에 힘이 빠지면서 가슴이 먹먹했다. 그러더니 울컥하고 눈물이 나는 것이 아닌가. 손등으로 닦아야 할 정도로.


 아이가 눈치챌까 염려하며 곧 다시 페달을 밟았다. 마지막에 울렸던 바이올린 선율이 나를 그렇게 만들었다. ‘브루클린으로 가는 마지막 비상구’. 지금도, 늘, 들을 때마다 주변에 그렇게 머물고 있을 음률이다.


 대부분 영화음악은 영화를 먼저 보고 빠지는 편이다. 그런데 간혹 음악이 먼저인 경우가 있다. ‘브루클린으로 가는 마지막 비상구’가 그렇다. 슬픈 듯 잔잔하게 흐르는 ‘A love idea’ 멜로디에 젖어 단골 비디오 대여점 사장님 수고로 어렵게 구해 본 영화이다. 내용과 영상, 모두 상영이 쉽지 않았던 영화이기도 하다.


 영화를 만났을 당시 아이들이 어려서이기도 했지만, 여건이 맞지 않아 영화광인 나로서는 비디오 대여점이 유일한 영화 감상 기회의 전부였다. 또한 그런 시절이었다.


 오다가다 들리던 비디오 대여점 사장님은 혹시 취향에 맞는 영화라도 들어오면 일부러 지나는 나를 불러 추천까지 해주기도 했다. 어느 날 흐르는 아침 방송 음악에 홀려 어렵겠지만 알아봐 줄 수 없겠느냐 한 것도 그래서이었다.


 지금은 음악이든 영화든 마음만 먹으면 아쉽지 않게 찾아 듣고, 볼 수 있는 감상이 풍족한 시대이지만 1990년 전후에는 그리 마땅치가 않았다. 간혹 마음에 드는 음악을 저장해 곁에 두고 오래 듣다 보면 테이프 음이 늘어지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A Love Idea’는 귀하게 아주 어쩌다 들을 수 있었다. 그것도 음악방송에서 운이 좋아야 들을 수 있는 곡이었다.


 영화는 노조 파업이 한창인 50년대 뉴욕의 브루클린이 배경이다, 뉴욕이라는 거대도시와 빈민촌 브루클린이 대비되어 상황을 알기 전까지 브루클린이라는 단어는 발음에서부터 우습지만 나에게 다소 문학적이었다. 여전히 우습지만 지금도 다소 그렇기는 마찬가지다.


 파업을 주도하는 부두 노동조합장. 아내와 아이까지 있지만 자신이 호모라는 사실을 깨닫고 방황하는 남자다. 거리에서 한국전 참전 병사들을 유혹하며 살고 있는 트랄랄라, 그런 그녀를 남몰래 연모하고 있던 소년의 이야기가 가슴 아프게 나열된다.


 영화가 상영불가였던 것은 이러한 내용 때문이었다. 매춘과 동성애라는 외설적 이미지가 우리 사회에서는 절대적으로 수용하기 어려웠을 때이다. 지금도 사회적 논쟁에서 크게 벗어날 수는 없지만 예전보다는 덜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막다른 골목에서 마지막 비상구를 찾듯 어둡고 침침하게 살아가는 그들의 ‘마지막 출구’ 같은 이야기이다.


 이제 와 세세하게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감상하는 동안 외설이 주는 혐오감을 전혀 느낄 수 없었던 것은 왜인지 모르겠다. 다만 안쓰럽고 모두가 가여워 뭉클함이 오히려 더 컸다. 빈민의 직업군이 현장 노동자나 여자로서 손쉬운 매춘밖에 없을 때이니 마약과 힘겨운 배경은 보는 내내 쓸쓸할 수밖에 없었다.


 몸에 붙는 바지에 여자 속옷을 걸친 동성애자, 예쁜 외모와는 달리 욕지거리를 입에 달고 다니는 여자, 강도 행위를 일삼는 불량배들, 미혼모, 오토바이를 사서 자기의 사랑을 입증하려는 순진한 꼬마, 전장으로 달려가야 하는 한 무리의 군인들...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 군상들의 면면이다.


 마약과 폭력과 술과 성이 난무하는 곳. 문 닫은 가게들, 가동을 멈춘 공장들, 더러운 지하 술집들을 안고 있는 어둠침침하고 음산한 브루클린의 분위기는 지옥과 같다. 그러고 보니 언뜻언뜻 보이는 따뜻함도 있었다.


 너무 슬퍼 눈물이 날 것 같은 음률에 젖다 보면 가끔 마지막 장면이 함께 떠오른다. 어쩌면 그동안 내가 본 영화 중에서 가장 끔찍하면서 슬픈 장면일지도 모르겠다. 상상을 넘은 불량배들의 폭력에 망가지면서 트랄랄라는 회상한다. 잠깐 함께 있었던  참전 군인의 진실에 그녀는원하는 바가 아니어서 투덜 됐지만 사랑이었을지도 모른다고 짐작한다.


 그런 그녀 곁에서 울고 있는 소년. 소년을 달래는 더 가엾은 그녀. 이 장면을 보면서 외설보다는 물리적 폭력이 상영불가의 논쟁이 된 것은 아닐까 나름 추측해 본다.


 사족이기는 하나 국내 상영에 제목 해석으로 분분했다고 한다. 하지만 ‘브루클린으로 가는 마지막 비상구’ 만큼 적절한 제목은 없을 듯하다. 하기는 '비상구'면 어떻고'탈출구'면 어떠한가. 그들이 그곳을 빠져나갈 수만 있다면 출구가 아닌 또다른 입구라고 한들 무슨 상관이겠는가.


 ‘차털리 부인의 사랑’을 쓴 D.H 로렌스는 외설(포르노)과 예술의 차이를 명쾌하게 규정했다. 감상 후에 자신이 역겨우면 외설(포르노)이고 감동이면 예술이라고 한 그것이다. 이보다 확실한 정의가 또 있을까. 감상이 주관적이라고는 하지만, 하여 나로서는 ‘차털리 부인의 사랑’도 ‘브루클린으로 가는 마지막 비상구’도 외설에서는 배제되어야만 할 것같다.

작가의 이전글 다시 쓰는 사랑학 개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