뒷모습은, 등은 참 쓸쓸하다. 어쩌면 쓸쓸한 것은 등을 보인 쪽이 아니라 등을 본 쪽일 터인데 현관을 나서기 위해 등을 보인 사람을 배웅할 때면 그 마음은 더 하다. 그럴 때는 괜히 나서는 사람을 불러 세워 먼지라고 터는 것처럼 등을 한 번 가볍게 쓸어내리고 보내야 한다.
애벌레처럼 구부린 채 이른 잠에 빠진 가족을 볼 때도 그런 마음이 든다. 한낮의 고단을 등으로 보는 듯해 한순간 시리다.
등은 꽤 많은 이야기를 한다. 가끔 좋은 시간을 보내고 누군가와 헤어져야 할 경우 이쪽은 미리 아쉬워 한참을 뒷걸음 질을 하는데 상대는 그냥 휘익 제 갈 길을 가고 마는, 혹은 잘 가라는 인사가 무섭게 쌩하니 돌아서 가는 그들과 헤어져 올 때 그들이 잘못한 것도 없건만 괜히 야속하다.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앞서 걷으시던 말년의 우리 아버지. 보고만 있어도 그냥 기분이 좋았다, 참으로 든든한 것이 범이 온다 한들 겁날 것 같지 않았다. 그뿐이던가. 넓고 듬직한 누군가의 등에 업혀 본 기억이 있다면 안심을 주는 그 등이 얼마나 따듯하고 평화로운 것인가를 알 터이다. ‘등에 업혀 숨을 거둔’ 모든 이들은 그래서 아마 평화로운 임종이었음을 믿는다.
언젠가 대만 영화에서 꼭 사람의 뒤만 찍는 사내아이를 만난 적이 있다. 어른들은 아이에게 묻는다. ‘왜 너는 얼굴은 찍지 않고 뒤통수랑 등밖에 나오지 않는 뒤만 찍느냐’고. 꼬마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경쾌히 말한다. 사람들이 자기 뒷모습을 볼 수 없어서 보여 주기 위해서라고. 철학자 같은 말이다.
뒷모습은 너무 노골적이라 보고 싶지도 보이고 싶지 않은 부분일지 모른다. 등을 보인 뒷모습에는 상처와 아픔도 있다. 보낸다는 의미보다는 배반의 의미가 커서 상처를 얻은 쪽에선 내치고 버림을 받았다고 할 수 있는 것이 등이다.
그러나 뜻대로 아닌 사는 동안 둘 중 하나를 치르고 살아야 할 경우가 있으니 인생이 겪어야 할 고독한 운명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가끔 등은 어떤 모습으로 올지 몰라 그것이 주는 비열함이 두렵다. 예감조차 할 수 없을뿐더러 어두운 비밀을 가지고 있어 음흉하기도 한 까닭이다.
'뒷모습'을 주제로 한 사진집을 본 적이 있다. 음기에 서린 요염한 여자의 등에서 별 말이 없는 내 등이 아쉽기도 했지만 맨바닥에 엎드려 몸을 맡긴 사제의 뒷모습을 보고 있으면 경이로워 눈물이 날 것 같은 등도 있었다. 두 팔을 반듯하게 벌린 채 다리를 곧게 뻗은 것이 더 이상 인간으로서 낮출 수 없는 자세이기도 하다.
이슬람의 라마단 의식을 치르려면 등을 둥글게 굽혀서 머리를 바닥에 조아려야 하는데 순종적으로 치르고 있는 그들의 경건함을 보면 우직하기까지 하다. 무지몽매한 듯 둥글게 구부린 등은 순하고 착하지만, 인간의 보잘것없는 왜소함에 빠져들게 한다. 욕심과 분노를 순식간에 버리게 하는 등이다.
두 손을 모두고 108배에 몰입하는 불자의 뒷보습 역시 숭고함에서 비할 데가 없다. 이처럼 모든 종교 앞에 등을 보인 신자의 뒷모습은 한없이 초라하고 가엾다. 거룩하다.
무엇보다 이형기의 ‘낙화’를 보면 가야 할 때를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아름답다고 했다. 그러나 연륜이 더할수록 가야 할 때를 알고 간다는 것은 가히 득도의 경지라는 것을 모르는바 아니다. 크고 작은 욕망이 가야 할 때를 놓치게 하지만 놓아 버리지도 못하게 하여 뒷모습을 추하게 한다는 것도 알아서다.
가야 할 때를 아는 것도 마음처럼 되는 일은 아니다. 그보다 더 힘든 것은 마음처럼 되지 않는 어쩌지 못하는 ‘마음’이다. 그러니 세상살이가 헛헛한 것이라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비록 그렇다고는 해도 뜻대로 할 수 있는 하나를 준다면 최종 마치는 마지막 순간은 사랑하는 사람의 따뜻한 등에서라면 좋겠다.
아울러 사는 동안 등을 돌려 누군가에게 아픔을 주는 고약한 일만은 내게 제발 없기를 바란다.
지금, 내 뒷모습이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