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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희 Aug 27. 2023

스무 살 나의 어머니

     구순을 눈앞에 둔 친정엄마가 큰 수술을 받으셨다. 80세에 왼쪽 인공관절 수술을 받으셨는데 최근에 다시 오른쪽 무릎 관절을 교체하신 것이다. 평소 엄마는 주변에서 연세를 짐작할 수 없을 정도이고 본인도 잊고 사신다. 아직도 귀여운 여성성을 가지고 있어 고운 외모에 큰 병치레 없이 건강하신 편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예전과 다르게 우리 걱정을 사고 계신다. 수술 회복 중에 선망 증세가 잠깐 심하게 와서 자식들을 놀라게 하셨기 때문이다. 혼자 여유롭게 사시는 것에 만족하고 또한 즐기며 운동과 섭생에도 게으르지 않으셨던 분이라 당황스러움이 컸다. `


 무엇보다 자식들 도움보다 챙기는 것을 먼저 하셨고 그래서인지 매사 당당하시어 자식들이 연민을 느끼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이것이 핑계가 되어 그동안 모두 엄마한테 다소 소홀하고 무심했다는 고백이다. 어쩌면 이런 우리들 처사가 엄마를 더 강하게 만들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들쑥날쑥 못생긴 글씨체를 한 소포가 현관을 들어서는 나를 반길 때가 있다. 두둑한 내용물보다 포장지에 써진 글씨를 보는데 뭉클하다. 맞춤법이 맞지 않는 이 글씨가 아무튼 지금의 나를 키웠다고 믿고 있다.


 한참 예민한 사춘기에 부모 시선을 떠나 지방에서 서울로 진학을 했다. 서투른 글자꼴의 편지가 종종 나에게 보내지기 시작한 것은 그때부터이다. 지방에서 홀로 올라온 아이들 모두 힘들게 경험해야 하는 것이, 아이도 아니고 어른도 아닌 어중간한 심신에서 그리움과 외로움을 극복해야 하는 일이었다. 엄마가 그것을 알았던 모양이다.


 매달 보내지는 봉투에는 우체국 소액환과 함께 어김없이 꼭꼭 눌러쓴 편지가 회초리처럼 들어있었다. 여자의 몸가짐과 도리를 마치 ‘내훈’의 일부처럼 타이르듯 적어 보내셨다. 예전에 몰랐던 엄마의 알 수 없는 촉촉함도 동봉되어 어느 부분에서 나도 모르게 눈물을 떨어뜨리고는 했는데 어쩌면 엄마의 계략이지 않았을까 한다. 


 엄마는 몰락한 양반가의 정식 배움이 부족한 막내딸이었다. 곤궁했던 집안의 막내딸은 보루 같던 유교적 전통의 진보적 오라비 뜻에 따라 이웃 직업군인에게 시집을 갔다. 아니 가야 했다. 


 외할머니는 탐탁지 않은 집안에 오라비가 누이를 치운다고 며칠 동안 식음을 전폐했다 하는데 그것이 열여덟 살이었을 때였고 그리고 스무 살에 내가 태어났다. 어느 작가의 ‘스무 살 어머니’란 글이 낯설지 않았던 것은 그래서였다.


 어린 엄마는 자식을 겉으로 귀히 여기면 상스럽다고 자라옴 탓인지 엄부자모와는 달리  다정한 아버지에 비해 엄마에 대한 비슷한 기억은 별로 없다. 그렇건만 생활이 고달플 때면 언제나 엄마는 따뜻한 힘으로 나에게 존재하는 것은 또 무슨 까닭인지 모르겠다.


 안아 주거나 입을 맞추거나 응석을 받아 주는 일도 없었다. 그렇다고 해도 이론적 지식은 없었지만 나름대로 철학과 신념이 있다는 것을 알아, 자라면서 엄마에게 향한 내 감정은 존경에 가까웠을 것이라 여겨진다. 


 가끔 엄마가 다정했을 때를 기억하고 있다. 전래동화를 들려줄 때와 전래동요를 불러 줄 때다. 업힌 동생의 엉덩이를 토닥이며 부르던 '새야 새야 파랑새야‘는 엄마의 유일한 자장가였다. 어디서든지 그 노래가 들리면 녹두장군 이야기와 함께, ‘아버지 어디까지 오시나 머리 한번 긁어 볼래?’라며 등에 업힌 동생을 바라보던 모습과 어릴 적 풍경들이 연기처럼 올라온다.


 한나절 부지런히 손틀을 돌려가며 만들어 주시던 인형도 나는 잊지 못한다. 검은 실로 머리를 내리고 뽀얀 옥양목 조각에 물을 들여 치마를 입혀서 약솜을 넣어 만든 인형은 이웃집 아이의 불란서 인형보다 훨씬 더 사랑스러웠다. 


 얼마 전인가, 엄마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더니 “그걸 기억하고 있니?” 하시며 눈물을 흘리셨다. 아마 내 어린 날이 아니라 엄마의 그 시절이 그리워서가 아니었을까 생각하니 내 맘처럼 뭉클했다. 


 동생들이 하나, 둘 생길 때마다 엄마의 엄함은 기운이 덜 하면서 너그러워졌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나에게는 오랫동안 변하지 않았다. 딸보다는 며느리였고 큰딸보다는 막내딸이었으며 아들이 먼저였다. 그래서인지 맏이로서 엄마를 배려한 것과는 다르게, 엄마를 따른다거나 그다지 친구같이 살가운 딸은 되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 나도 변했고 엄마도 많이 변하셨다. 유난히 나에게 가하던 엄격함이 이미 사라져 누군가의 흉도 보고 내 편이 되어 역정도 내신다. 아버지가 가신 후 엄마에 대한 내 마음도 책임감을 넘어 애틋함으로 왔다. 어쩌면 얼마 남지 않았을 둘의 시간이 두려워서 일지도 모른다.


 가끔 내가 치른 스물두 살 때의 방황과 아픔이 엄마에게는 어떻게 왔을지, 있기는 했는지. 찬란한 시절의 화양연화가 엄마에게도 있었을지, 그렇다면 언제였을지 문득 묻고 싶을 때가 있다, 그것이 무언지도 모르고 어쩌다 세월을  보내 버리고, 지금 나처럼 까닭 없는 쓸쓸함에  혼자 울기도 했었을 텐데. 사랑을 해 본 적도 없이 결혼이란 걸 해 버린 열여덟의 엄마가 가엾어지는 이유이다. 


 이제 곧 의좋은 자매처럼 내가 일흔이 되고 엄마는 아흔이 되어 온다. 그때쯤 딸아이 바람대로 모녀 3대가 함께 할 수 있는 여행을 조심스럽게 소망해 본다. 그러니 엄마도 호호백발 할머니답게 자식 신세 마다하지 않고 엄살도 부려 보는 나약한 노인이 되셨으면 좋겠다.

 

 그렇다고 한들 엄마는 나에게 여전히 힘이 세지 않은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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