엎드려지고 자빠져도 이지러지지 않으니 용기를 잃지 않아야 함
마음이 한동안 소란스러웠다. 집을 알아보며 예상치 못한 문제에 직면했다. 경제적 상황도 아닌 법이라는 벽에 부딪히니 더 막막했다. 진행하던 일을 접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정신이 하얘졌다. 지금 내 앞에 마주한 문제는 나의 의지로 해결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자 들떠 있던 마음은 순식간에 환멸감으로 바뀌었고 사기를 잃었다. 그리고 며칠 이 문제를 떠올릴 때면 눈물이 터졌다. 감정의 근원을 알 수 없어 답답했고 이런 나 자신이 싫어 또 울었다. 그렇게 하루, 이틀이 지나 혼란스러운 감정이 잦아들자 알게 되었다. 내가 마주한 건 단순히 '집 문제'가 아니라 지나 온 시간을 부정당한 듯한 좌절감과 앞으로도 불확실 속에 불안정하게 존재하고 있을 것 같은 나였다.
지난 주말 감정의 동요가 휩쓸고 간 자리에 생각이 정리되지 않은 채 모임에 나갔다. 집 이야기를 하는 친구들 틈에서 침묵을 지켰으나 마음은 심란했고, 친구의 좋은 일을 기쁘게 축하해 줄 수도 없었다. 독서모임에서는 근황 이야기를 하다 보니 내가 처한 상황을 이야기하게 됐고 그날의 대화는 나의 신세한탄이 주가 되어 모임의 정체성과 맞지 않게 흘러갔다. 집에 돌아와 나는 왜 다 드러내는 사람일까, 왜 어른스럽게 상황과 감정을 배제하지 못해 부정적 감정을 전이시키는지, 왜 좋은 의도로 하는 친구의 말이 불편하게 느껴졌는지 자책하며 마음이 편치 않았다.
'조언하지 않는다, 위로하지 않는다'라는 부칙은 사람들이 힘든 처지를 말할 때 위로받고 싶어서라기보다는 그냥 말이하고 싶어서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속에 있는 걸 꺼내 놓고 싶은 마음. 어떤 분이 너무 분통 터지는 일을 겪었는데 누구한테 하소연하기엔 창피해서 일기라도 쓰고 싶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일기도 어젠가는 누군가 읽어주겠지 상정하는 마음이 있더라고 하더군요. 그렇겠다 싶었습니다. 토로하는 사람의 목적은 말 그대로 '토로'에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걸 몰랐을 땐 적절한 조언을 해줘야 된다는 강박도 있었고, 내 조언이 무시되면 상처도 받고 그랬던 것 같습니다. 이제 그냥 조용히 듣는 것에 좀 편해졌습니다.
<나의 해방일지> 대본집 - 박혜영 작가 인터뷰 중
사두고 한켠에 넣어 둔 드라마 대본집에 있는 작가님의 인터뷰를 읽다 알게 되었다. 나는 그냥 누군가에게, 어딘가에 토로하고 싶었다. 사람은 누구나 저마다의 고민을 안고 살아가고 지금 나의 이 문제는 당사자인 나도, 이야기를 들어주는 당신도 해결할 수 없다는 걸 안다. 그러니 어떤 위로나 조언도 바라지 않는다. 다만 내가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들에게 이런 불완전한 나라도 거대한 벽 앞에서 함께 있어 줄 수 있는지 묻는 심경과 같았다.
<나의 해방일지>의 미정은 죽지 않고 살기 위해 구씨를 향해 '나를 추앙해'라고 말한다. 한 번도 가득 채워진 적 없는 자신을 가득 채워달라고. 미정은 알고 있었다. 한 사람이 누군가를 사랑하기 위해선 스스로 채워지는 것이 먼저임을. 자신을 사랑하기 위해 그녀는 그를 기꺼이 '좋기만 한 사람'으로 사랑하기로 한다. 나를 막고 있는 현실에 며칠을 주저앉았다. 허나 이 벽은 뚫고 갈 수도, 넘어갈 수도 없다. 그렇게 방황의 시간 끝무렵 스스로에게 되물었다. '자, 그럼 이제 어디로 갈래?' 느리지만 옳다고 믿는 방향으로 우직하게 가는 건 또 내 특기니까 이제 그만 자리에서 일어나 툭툭 털기로 한다. 나는 죽지 않고 살기 위해 '기준'을 다시 세우고 다른 길을 향해 가기로 한다. 이번에 가본 길의 끝은 막다른 벽이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로 했다. 그러니 목적지를 재설정하고 다른 방향으로 시선을 돌린다. 현재 내가 있는 위치에서 할 수 있는 것을 하면서 미정의 말처럼 사는 동안은 단정하게. 그게 이번 여정을 통해 내가 내린 결론이고 앞으로를 살아갈 태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