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이라는 자양분
어릴 적부터 나는 혼자 놀기를 좋아하는 아이였다. 낯을 가리는 내성적인 성향인 탓도 있지만 조금 더 명확히 말하자면 같이 놀이를 할 친구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던 것 같다. 두 살 터울의 남동생이 있지만 함께 뛰어놀던 기억도 없고 엄마에게 “나는 어릴 때 어떤 아이였어?”라고 물으면 ‘혼자 조용히 사부작사부작 놀던 아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자라는 동안 주변 어른들이 나를 두고 많이 했던 표현은 ‘야무지다, 씩씩하다, 손댈 게 없다’ 같은 말들이었다.
20대 초반 명상을 통한 심리치료 활동을 통해 나의 트라우마를 마주했다. 눈을 감고 바라본 나의 내면에는 어두운 곳에서 홀로 울고 있는 어린아이의 모습이었다. 그때 처음으로 알았다. ‘아, 내 마음 깊숙한 곳에 고독함이 있구나. 그동안 참 외로웠겠다. 혼자가 편하다고 느끼는 건 어쩌면 상처받고 싶지 않은 마음에서 비롯된 게 아니었을까.’
작년 말 일을 그만두고 몸이 좋지 않았다. 특정한 증상이 발현된다기보다 몸에 기운이 완전히 소진된 느낌이었다. 자주 불안하고 무력해지고 나에 대한 자책을 많이 했다. 동시에 다른 사람들에게 자주 날이 섰고 그들의 말을 곡해했다. 마음을 돌봐주신다는 말에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찾아간 한의원 선생님께서는 늘 긴장상태를 유지하고 있음을 근본 원인으로 진단하셨다. 눈앞에 펼쳐져 있는 상황들을 자주 ‘위험’으로 해석하다 보니 몸이 상시 위축되고 경직되어 있다고. 하지만 긴장은 스스로 안전하지 않다고 느끼는 자신을 지키는 보호막 역할을 한다고 하셨다.
어느 날 치료를 받던 중 “어릴 때 부모님께 어리광 부린 적이 있나요?”라고 물으셨다. 나는 “아니요. 딱히 별로 그럴 일이 없었던 것 같아요.”라고 대답했는데 집으로 돌아오는 길 ‘어린아이가 정말 어리광 부릴 일이 없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부모님은 어릴 적부터 나의 의사결정을 지지하고 존중해 주시는 분들이었다. 부모로서 자식이 잘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 대한 걱정은 있지만 나에 대한 불안감은 없으셨던 것 같다. ‘어떻게든 제 몫을 잘 해나 갈 것이다.’라는 믿음을 갖고 계셨다. 덕분에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그분들에게 가끔은 철 없이 어리광을 부리거나 내가 무너졌을 때 정서적으로 기댈 수 있다는 믿음을 갖지 못했다. K-장녀의 숙명을 받아들이고 여러 선택지들 앞에서 언제나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 하기 이전에 온전히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몫의 책임인지를 따져 물어야 했다.
마음속 혼돈의 소용돌이가 일 때마다 피하지 않고 그 한가운데에서 내가 맞이한 상황들을 직시했다. 요동치는 감정의 시작점을 알아내기 위해 일기를 쓰며 나에게 자주 질문을 던졌다. ‘네가 충분히 감당할 수 있겠어?, 너를 불안하게 하는 게 뭐니?’ 파고들면 파고들수록 피하고 싶은, 인정하고 싶지 않은 가면이 벗겨진 나를 마주하는 이 괴로운 과정 또한 성실하게 임했다. 진짜 나의 모습을 알아야만 나를 이해하고 지킬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한 번, 두 번, 선택의 순간들이 쌓여 지금의 순간이 오기까지 그 시간들은 결국 나에 대한 믿음을 쌓는 수행의 길이었던 것 같다.
앞으로도 살아가는 동안 내 안 깊숙이 자리 잡은 ‘고독함’이라는 반갑지 않은 존재는 불쑥, 예측하지 못하는 형태로 나를 약하게 만들 것이다. 그러나 매번 철저하게 외롭고 고독한 시간을 통해 깨지고 나면 나의 단단해진 뿌리가 좀 더 큰 화분으로 옮겨 심어지고 이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다른 사람들의 뿌리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니 새로운 화분으로 옮겨 심어 가는 과정을 부디 처연함이 아닌 덤덤하게 나를 끌어안는 애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길 가다듬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