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합리성과 모호함을 수용하기
어른. 사전적 의미로는 ‘다 자란 사람 또는 다 자라서 자기 일에 책임을 질 수 있는 사람’을 뜻한다. 20살을 훌쩍 지나 부모님으로부터 물리적, 경제적으로 독립해 나를 건사하며 살아가고 있는 30대이지만 자주 의문이 든다. 나 지금 어른 맞아? 혹은 내가 바라던 어른의 모습에 가까워지고 있는 걸까? 눈에 보이는 외형이나 계량화 할 수 있는 수치들을 멀찍이 두고 한 사람으로서 현재의 나는 진정한 어른이라 할 수 있는 있는가 자주 반문하게 된다.
최근 웨이브 오리지널 <사상검증구역: 더 커뮤니티>를 푹 빠져 봤다. 12명의 정치, 젠더, 계급, 개방성이 각기 다른 참가자들이 모여 벌이는 서바이벌 게임. 모든 회차를 몰입해서 봤지만 개인적으로 ‘종신리더’를 뽑는 유세-토론-선거 과정이 가장 흥미로웠다. ‘진보’로 대표되는 백곰과 ‘보수’ 진영인 슈퍼맨의 한 치 양보 없는 토론을 보면서 평소 나의 성향과 다른 주장일지라도 탄탄한 논리에 설득되었으며 무엇보다 토론 테이블 위에서 극단의 이념을 놓고 대립하지만 직업적 특성 때문인지 두 참가자의 대화의 방식이 일치한다는 점, 그러기에 커뮤니티 안에서 공동의 목표를 향해 연합하는 과정이 가능하다는 것이 멋져 보였다.
이후 나온 선거 결과는 이 프로그램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다층적으로 보여주었다. 투표 결과가 한쪽으로 치우친 양상은 ‘생존’이라는 본능 앞에서 한 사람의 정체성을 이루는 성향, 사상이 얼마나 무력했는지를, 보이는 것과 생각하는 것이 항상 일치하지는 않는다는 것, 환경이 인간에게 미치는 지대한 영향에 대해 생각해보게 한다. 어릴 때의 나였다면 손바닥 뒤집듯 바뀌는 모순과 거짓으로 점철된 인간 군상들을 보며 냉소와 회의의 시선으로 바라보았겠지만 서바이벌을 지켜보는 동안의 나는 이 프로그램이 담고자 했던 메시지의 진정성을 느꼈다.
사상가는 세계의 본질을 논리를 통해 인식하고 표현하려 하지. 사상가는 인간의 이성과 그 이성의 도구인 논리가 불완전한 도구라는 것을 알고 있다네. 마치 지혜로운 예술가가 자기의 붓이나 조각칼로 천사나 성인의 빛나는 본질을 결코 완벽하게 표현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듯이 말일세.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상가든 예술가든 모두 나름의 방식대로 그런 시도를 하지. 양쪽 다 달리 어떻게 할 수가 없는 것일세. 왜냐하면 인간은 자연의 선물로 받은 자신의 재능을 실현하려고 애씀으로써 인간이 할 수 있는 최고의 것을, 유일하게 의미 있는 것을 행하는 셈이지. 그래서 전에 자네한테 틈만 나면 말하지 않았던가. 사상가나 금욕주의자를 모방하려고 애쓰지 말고, 본연의 자아를 되찾고 자아를 실현하도록 애쓰라고 말일세.
그런데 자아실현이란 대체 뭘 말하는가?
그것은 철학적인 개념이지. 달리 표현할 길이 없네. 우리처럼 아리스토텔레스나 토마스 아퀴나스를 배운 사람들한테는 모든 개념들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개념은 <완벽한 존재>라는 것일세. 완벽한 존재는 곧 신이지. 그 밖의 존재하는 모든 사물은 미완의 것이고, 부분적이고, 변화하고, 여러 가지가 섞여 있고, 가능성으로 이루어져 있다네. 그렇지만 신은 여러 가지가 섞여 있는 게 아니라 단일한 존재이고, 가능성이 아니라 순전한 현실성 그 자체지. 하지만 우리 인간은 사라질 존재이고, 변화하는 존재이고, 가능성의 존재지. 우리 인간에게는 완전함도 완벽한 존재도 있을 수 없어. 그렇지만 잠재적인 것이 실현되고 가능성이 현실성으로 바뀔 때 우리 인간은 참된 존재에 참여하게 된다네. 완전한 것, 신적인 것에 한 단계 더 가까워지는 셈이지. 그것이 곧 자아실현이라 할 수 있겠지. 자네는 이 과정을 스스로의 경험으로 터득해야 하네.
-p.427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헤르만 헤세
우리는 나이가 들수록 인간의 복잡성과 변덕, 부조리를 더 강하게 의식하게 된다. 이것은 중년이나 노년의 작가들이 더 진중한 주제로 생각을 돌려야 마땅함에도 가상 인물의 사소한 관심사에 몰두하는 유일한 변명이 되곤 한다. ‘인류에 대한 올바른 연구는 인간을 연구하는 것’이 맞다면 현실의 불합리하고 모호한 인물보다는 일관되고 견고하며 의미가 있는 가공인물에 전념하는 것이 더 현명하기 때문이다. (생략) 우리는 나이를 먹을수록 자신이 신이 아니라는 걸 점점 더 의식하기 마련이니 작가가 경험으로 체득한 것 이상은 쓰지 않으려 한다고 해도 놀랄 일은 아니다.
-p.211 <케이크와 맥주>, 서머싯 몸
수 백 년의 시간을 거쳐 오늘날까지 읽히고 있는 고전과 현시대를 살아가는 인물들이 모여 작은 사회의 축소판을 그려놓은 예능 프로그램은 내게 동일한 울림을 주었다. 인간은 결코 완전하거나 완벽할 수 없는 미완의 존재라는 것. 지난 과거를 돌이켜 보면 나 또한 한 명의 인간으로서 불합리하고 일관되지 않은 선택들을 했던 순간들이 분명히 존재했고 그로 인해 자책했던 시간들이 있었으며 반대로 인간이라는 존재의 속성을 인정하지 못해 타인에게 엄격한 잣대를 내세우며 이해할 수 없다 빈번하게 판명했다. 나 자신과 타인을 이해하고자 괴로웠던 시간들은 어쩌면 이 정합성을 간과했기에 생긴 과오였다.
내가 깨어 있다고 일컫는 사람이란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자기 자신을, 즉 자신의 가장 내면적이고 비합리적인 열정이나 충동 혹은 약점까지도 인식하고 처리할 줄 아는 그런 사람이지.
-p.73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헤르만 헤세
책 속 문장으로 헤르만 헤세는 자아실현을 통해 본질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우리가 어떤 시선으로 ‘나’를 바라봐야 하는지 끊임없이 현현한다. 자신의 복잡성, 비논리적, 부조리를 인지함과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다움을 도야할 것. 진정한 어른이 된다는 건, 이 문장을 머리뿐만 아니라 마음으로 온전히 받아들이게 될 때 완성에 가까워지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