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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특정다수의 결혼식

제 1장. 여자

by 파고


제 1장. 여자


“어떠세요?”

멍한 표정으로 무슨 뜻인지 생각해 본다. 뭐가..요?

“제가 보기엔 이 디자인으로 확정이네요. 신부님 어깨선 보세요, 너무 예쁘죠?

이 드레스는 지금 대기까지 있다니까요. 자, 커튼 열립니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차르륵, 소리와 함께 또 한 번의 쇼가 시작된다.


이번에도 막혔던 벽, 아니 커튼이 열리는 순간 아차, 속은 기분이 든다. 벽인 척 내 시야를 가리고 있던 한 장의 천, 확고한 공간인 척 꾸며대며 순진한, 아니 우둔한 나를 현혹한 것이다. 나는 그걸 곧이곧대로 믿고 그 뒤에서 훌렁훌렁 옷도 벗어 보이고 혼자인 양 거울 앞에서 슬쩍 웃어도 보았다. 조금 전에도, 또 그전에도 속아놓고 눈앞이 가려지기만 하면 뭔가에 홀린 듯 또 똑같은 짓을 반복하니 정말 기가 찰 노릇이다.


커튼이 열리자 그 천 뒤에 없는 척 숨어있던 얼굴들이 나타난다. 왠지 수치스럽고 민망하여 얼굴이 붉게 타오른다. 그러자, 다들 좋아라한다. 나 빼고 이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이, 다 같은 편이 되어 즐거워한다.

그래, 누구라도 즐거우면 됐지.

“신랑님, 너무 예쁘죠?” 신랑님이라 불린 얼굴이 이 여의치 않은 상황에 집중하려고 부단히도 애를 쓰는 게 눈에 보인다.

그래, 나도 나지만, 너도 참 쉽지 않겠다.


제일 기가 막히는 건, 눈물까지 글썽이는 저기 저분, 저분이 우리 엄마라는 사실이다.

우리 엄마로 말할 것 같으면, 흔한 표현을 빌려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다 겪은 여자다. 결혼식 같은 건 해 본 적도 없었던, 그러니 응당 웨딩드레스 같은 건 꿈도 꾸지 못했던 여자.

자꾸 여자라고 불러주는 이유는, 그렇게 불러라도 드려야 할 것 같아서다. 여자의 인생, 그런 게 실제로 있다면, 줄줄이 떠오르는 이미지들 가운데 우리 엄마에게 있거나, 있었거나, 해봤거나, 어울리거나 하는 것은 딱히 없다. 아니, 솔직히 말해 전혀 없다. 나는 지금까지 엄마와 살면서 그런 점에 대해 불만을 느끼거나 이상하게 여긴 적은 없었다. 내가 커서 엄마를 닮으면 어떨까, 조금 우울해졌던 적은 사실 몇 번, 사춘기 시절에 있었던 것 같지만, 자신 있게 말하건대 나는 우리 엄마가 여자가 아닌 것 같아서, 아니 여자로 보이지 않아서 문제라고 생각하거나 굳이 그걸 언급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난 엄마도 그런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저분은 지금 왜 저기 서서 눈물까지 글썽이는 걸까. 딸이 너무 예뻐서? 그럴 리가. 자식 다 키운 자신이 대견해서? 그쪽도 아니고. 아니면 본인은 이런 옷을 못 입어봐서? 단연코, 그런 거로 울 사람이 아니다. 나는 알 수 있다. 엄마는 지금 정말 순수하게 아름다움에 감동한 것이다. 내가 아니라, 이 옷의 아름다움에. 남의 집 결혼식에 갈때마다 저 멀리 보였던 그냥 허옇고 큰 덩어리, 눈부시게 아름다워서가 아니라 조명 때문에 실제로 눈이 부셔 제대로 쳐다볼 수도 없었던 그런 것 말고, 이렇게 바로 눈앞에서 맨살이 드러나 보이는, 아주 귀한 듯 몸 전체를 휘감은 부서질 듯 연약하고 섬세한 아름다움을 난생처음 본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내가 아니라… 1절만 하자. 그래 뭐, 사실 나도 마찬가지다. 태어난 지 삼십 오 년 만에 처음으로 이런 옷을 몸에 걸치니 내 몸이 귀해지고, 세상을 바라보는 내 눈도 귀해지고, 그런 귀한 내가 속한 이 세상도 꽤나 괜찮게 느껴진다.


이토록 햇살처럼 따스한 마음을 담아 엄마의 눈물에 응답한다. 조금 슬픈 생각을 해 보려 했을 뿐이었는데, 예상치 못한 눈물이 실제로 맺히는 바람에 내가 제일 놀랐다. 만약 관심 있게 나를 지켜본 사람이 이 안에 있었다면, 내 속내를 다 알아차렸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다행이라 해야 할지, 지금 여기에 그런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는 듯하다. 드레스를 입고 이 무대에 선 내가 쇼의 진짜 주인공이 아니라, 저들은 지금 각자 자신의 상황에 빠져 자신만을 생각하는 자기 쇼의 주인공들인 것이다.


대뜸 커튼을 열어젖혔던 드레스 실장이라는 사람은 누구든 제발 빨리 결정하길 바라며 입은 내가 아닌 저 신랑님의 얼굴만 쳐다보고 있다. 엄마는 이제 순수한 감동의 장을 지나 본인 인생 회고의 장으로 넘어간 듯하고, 마지막으로 신랑님, 저기 저 머리숱이 서늘하고 오늘도 셔츠의 다섯 번째 단추 아래 틈이 벌어져 두툼한 뱃살이 드러나 보이는 내 남친은 덥지도 않은데 진땀을 줄줄 흘리며 어느 것 하나 놓치지 않으려 고군분투 중이다. 살면서 지금까지 이렇게 다수의 여성들 관심이 본인에게 집중되었던 일이 또 있었을까. 드레스 샾이라는 장소에 오는 것만으로도 연상되는 온갖 이미지들에 심장이 두근거리고 여기저기 근질거려서 어젯밤 잠도 설쳤을 게 뻔하다. 저렇게 두 눈을 부릅뜨고 괜찮은 척하고 있지만,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든 신경이 이리 뛰고 저리 뛰어 지금 한마디로 제정신이 아닐 것이다. 뭐든 놓치지 않으려 최선을 다하고는 있지만, 뭘 놓치지 말아야 하는지는 모르고 그냥 최선만 다하고 있다. 그래, 나도 나지만, 너도 참 쉽지 않겠다.


오늘 이 순간은 물론 시작일뿐이다. 결혼식이라는 빅쇼의 준비 과정, 그중에서도 초반에 불과하다는 사실, 나도 잘 안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난 벌써 지쳐버렸다.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벌써 힘이 달린다. 왜 이렇게 해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무엇보다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지를 제일 모르겠다. 결혼은 일생에 한 번이다, 라고 어른들이 말하는 게 혹시 두 번 갈까 봐 단속하는 말이라고만 생각했는데, 그땐 내가 안 해봐서 몰랐던 거다. 정말 일생에 한 번만 할 수밖에 없겠다, 이렇게 시작부터 모든 게 의아하고 어색하고 불편해서 몸과 마음이 너덜너덜해지는 일은.


왜 결혼을 하기로 했는지, 그 결정이 늘 내가 입으로만 떠들던 나의, 나를 위한, 나에 의한 것인지를 고민해 볼 여유는 사실상 부족했고, 어버버 하다가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뭔가가 진행되고 있어 이젠 무를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나도 직접 해 보는 건 처음이라, 드라마나 영화에서 보면 척척 쉽게들 해내고 심지어 무척이나 행복해 보이기에 나도 뭐, 그쯤 문제없을 거라 생각했었다. 그랬다. 주변 사람들에게 알리고 그들의 흔치 않은 관심과 큰 의미 없는 축하 인사를 받는 일에만 집착하면서, 정작 내가 가장 중요한 나에게 말을 걸고 진심을 물어볼 시간은 내어주지 못했다.


만약 그랬다면, 내가 나의 진심을 깊이 들여다보고 심사숙고하여 이 결혼을 재고했다면 결과가 달라졌을까. 잘 모르겠다. 하지만 결과와 상관없이, 앞으로의 내 인생에서 어쩌면 가장 중대한 결정을 남들 뜻에 질질 끌려다니며 그냥 어쩔 수 없다고 나 스스로를 밀어붙인 게 아닌지, 그게 마음에 걸린다. 내가 나 스스로를 하찮게 여기고 존중하지 않은 것은 아닌지, 그래서 나라는 인간의 본질을, 삼십오 년간 지켜온 내 자아를 헐값에 내던져버리는 건 아닌지, 그게 마음이 쓰인다. 이렇게 정신없이 흐르듯 가버린다면, 내 인생은, 내 자아는 과연 어디로 가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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