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특정다수의 결혼식
제 5장. 불특정다수가 되어
제 5장. 불특정다수가 되어
먼 훗날, 언젠가 내가 결혼을 바로 목전에 둔다면, 개인적으로 하고 싶은 일들이 좀 있었다. 영화 같은 데서 본 결혼 전날의 몹시 야한 파티라든가, 여자들끼리의 그렇고 그런 밀월여행이라든가, 친정엄마와의 잊지 못할 추억 여행 등등. 그간 연애도 거의 해 본 적 없겠다, 보고 주워듣고 상상할 시간과 여유는 매우 충분했으니 그만큼 하고 싶었던 일들도 수두룩하게 많았다. 가열찼다. 여기서 결혼의 본질 부분은 또 까맣게 잊어버린 채, 그 이벤트 아닌 이벤트에 붙는 부가서비스 따위에 나는 또 집착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내가 가장 크게 간과한 점이 있었다. 세상 모든 일에는 늘 여유라는 게 필요하다는 걸. 고상하게 말해서 여유라는 거고, 그냥 까놓고 말하자면 돈이다. 시간적 여유? 돈 있으면 시간은 생긴다. 정신적 여유? 돈 있으면 정신은 절로 편안해진다. 친구들이나 엄마와의 추억? 그것도 돈 있으면 참 예쁘게 잘만 만들어지더라.
한마디로 제일 중요한, 아니 딴 거 다 필요 없이 그냥 그것만 있으면 되었던 걸, 내가 또 놓쳤다는 얘기다.
명심해라. 뭐든지 하고자 한다면, 일단 돈부터 만들어 놓는 거다. 어제와 같은 오늘을 살면서 다른 내일을 기대하는 건 정신병 초기증상이라는 아인슈타인의 말처럼, 어제와 똑같은 오늘의 통장 잔고를 가지고 시간과 정신과 추억까지 아름다워질 다른 내일을 기대하는 건... 여기까지만 하도록 하자. 점점 더 우울해지니까.
그래서 나는 지금, 결혼 전날 가장 같이 있으면 안 될 사람과 단둘이 앉아 있다. 그게 누군지는 말 안 해도 알 것이다. 오늘이 지나면, 웬만하면 평생 같이 있어야 할 사람. 굳이 결혼식 전날, 다시는 오지 않을 이런 귀중한 시간에, 왜 우리는 대체 뭐가 급하다고 벌써부터 이렇게 붙어있는 것인가. 이건 정말이지, 내가 상상했던 그 무엇도 아니다. 물론 난 매우 현실적인 사람이고, 당장 내일부터 더 크게 지출될 돈과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기 위함인 걸 잘 알고 있다. 그래, 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이건 좀 아니지 않나.
복잡한 내 기분을 눈치챘는지, 예비 신랑님이 나를 보며 웃는다. 방금 입에 넣은 초콜릿 케이크 조각이 그의 앞니 한가운데에 까맣게 끼어, 그걸 보며 나도 웃는다. 그는 내가 왜 웃는지도 모르면서 두 팔로 나를 꼭 끌어안는다.
“우리 어떨까?” 내가 묻는다.
“우리는~ 아주 잘 살지. 싸우고 화해하고, 싸우고 화해하고..” 그가 대답한다.
“뭘 싸울 생각부터 하냐? 안 싸워야지.”
“어떻게 안 싸우고 살아-, 난 단 한 번도 못 봤다. 다 싸우면서 살지. 부부가 살면서 안 싸우는 것보다 중요한 게, 싸운 후에 화해를 잘하는 거야.”
뜻밖의 말에, 나는 그에게서 몸을 떼어내고는 새삼 그 눈을 한번 들여다본다.
“오~ 어른스러운데? 듬직하네, 우리 신랑.”
그렇게 말하고 나니 가슴 깊은 곳으로부터 무언가 몰랑거렸다. 얼굴도 좀 빨개진 것 같아서, 괜스레 손가락으로 그의 머리카락을 쓸며 은근슬쩍 그의 시야를 가린다.
“자기는, 나 만나기 전에 원래 결혼할 생각이 있었어?”
그의 물음에, 나는 잠깐 생각하다가 대답한다.
“어릴 때야 늘 있었지-. 그런데 서른 넘어가고, 혼자 사는 데 익숙해지니까 점점 생각도 없어지고, 솔직히 겁도 나더라고. 이것저것 재고 따져야 하는 것도 피곤하고…. 또 얼만큼의 확신이 생겨야 결혼을 할 수 있는 건지, 그것도 사실 잘 모르겠더라. 이 사람이다! 뭐 그런 촉이 오나? 그런 게 궁금하기도 했었지.”
“맞아, 그거 나도 그랬어.” 그가 또 웃는다.
“그리고 솔직히 제일 걱정됐던 건, 내가 없어질까 봐? 좀 웃기지-, 근데 사실 나 결혼 준비하는 동안 그 생각 정말 많이 했어. 결혼해서 살면서 나라는 사람 본질이 흐려지고, 또 그런 나라서 우리 결혼의 본질도 흐려지고, 뭐 그런 생각? 그래서 솔직히 이 결혼 괜히 하는 거 아닌가, 중간에 후회도 진짜 많이 했어. 이거, 끝까지 말 안 하려고 했는데, 바로 전날이라 그냥 고백하는 거야-. 이제 못 무르니까. 크크크.”
그는 입을 앙다물고 뭔가 생각하는 척을 한다.
“자기, 열 받았냐?” 내가 킥킥거리자, 그가 말한다.
“아니, 자기는 볼수록 나랑 너무 똑같아서, 살짝 걱정되네. 서로 반대여야 잘 산다는데.”
아~ 본인도 후회했다고…. 흥.
“나도 실은 말 못 했는데, 결혼 준비하면서 그런 생각 수도 없이 했었어. 결혼이 우리 인생에서 정말 중대한 사건인데, 그 중대한 사건의 본질을 잃어버리고, 그걸 잃어버린 것조차 모르고, 아니면 알면서도 그냥 억지로 견디거나, 그런 날이 오면 너무 슬프겠다, 하는 생각. 결혼도 그렇지만, 특히 나 자신에 대해서. 지금껏 나라는 인간으로 살아오면서 중요하게 여겨온 것들을 결혼으로 인해 포기해야 하는 상황이 된다면 나중에는 스스로 뭘 원하는지도 모르는 바보가 되지 않을까, 뭐 그런 걱정에 상상에…. 자기한테 말도 못 하고 혼자 끙끙거렸다니까.”
씩, 웃는 그의 얼굴을 한번 째려본다. 그래, 나보다 꼭 한술은 더 뜨겠다는 거지.
“그래서, 자기의 본질이 뭔데? 이제 결혼할 사이니까, 속 시원하게 한번 말해보시지?”
장난스럽게 툭, 던진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가 이번에는 웃지 않았다.
“글쎄…. 예전에는 그게 확실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이제는 모르겠어. 모르겠다는 게 알았다가 잊어버렸다는 말이 아니라, 그냥 내가 마음에 드는 귀퉁이 한쪽 붙들고 이게 전체라고 믿었달까? 음.. 이 얘기 처음 하는 건데, 사실 나 어릴 때부터 항상 우리 아버지를 의식하고 살았거든. 아버지랑 정반대로 사는 게, 또 남들과 다르게 사는 게 내 인생의 본질, 목표라고 생각했었어.
그런데, 결혼 준비하면서 엉뚱하게도 그런 생각이 들더라, 내가 여태 아버지가 어떤 사람인지, 남들은 어떻게 사는지 잘 알지도 못하면서 내 멋대로 해석하고 그걸 난 안 하겠다고 떠든 거야. 제대로 알려고 한 적도 없었던 것 같아. 그냥 내가 보고 싶은 대로 보고, 믿고 싶은 대로 믿고. 한마디로 뭘 피해야 할지도 모르면서 내내 그냥 피해만 다닌 거지.”
진지한 그의 얼굴을 보며, 입을 다물고 잠시 생각했다. 나는? 내가 나라고 믿는 내가, 나라는 사람 그 자체일까? 그게 정말로, 지금 내가 잃고 싶지 않은 나의 본질인 걸까.
“그런 생각 하다 보니까, 내 본질이며, 내가 나다운 거며, 그런 게 별로 확실한 것도 아니라는 걸 깨달았어. 아버지랑 다른 나만 생각했지, 사실 나다운 게 뭔지, 뭐가 있긴 한건지도 잘 모르겠더라고. 진짜 정해진 거라고는 실은 아무것도 없었던거지.
그걸 깨닫고 처음엔 되게 황당하고 허무했었는데, 뭐, 좀 더 생각해보니까 그게 또 나쁘지만은 않은 것 같더라고. 그냥 내가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고, 동시에 여럿일 수도 있고 계속 달라져도 괜찮은 거니까. 뭐 하나로 딱 정해놓고 거기에 부합하려고 용 쓰고 사는 것보다 훨씬 낫지 않나 싶어.
지금 생각해 보면, 결국 다 불안해서 그랬던 것 같거든. 세상 사는 게 그렇잖아, 항상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늘 불안하잖아. 그러니까 나 자신이라도 확실하게 정해놓으려는 생각에 나는 이렇다, 내 본질은 이거다, 나만의 인생을 살겠다, 의미도 모르고 떠들었던 것 같아. 그러면서 가족들이나 다른 사람들한테도 내가 필요한 것만 취해가며 똑똑한 척 이기적으로 굴었고.
그래서, 생각이 바뀌었어. 자기랑 결혼하면 말야, 나는 말하자면 불특정다수 같은 사람이 될 거야. 세상에 엄청나게 많고 다양한, 누구인지도 모르는 사람들 전부가 된다고 생각하면, 내가 정한 조그만 틀 하나에 맞추려고 끙끙댈 필요가 없잖아. 그 틀이 어떤건지도 잘 모르면서 말야.
나 원래, 그 말이 진짜 싫었거든. 'one of them.' 이라는 말. 그 말 들으면 욕처럼 들릴 정도로, 뭔가 내가 전혀 특별할 것 없는 매우 하찮은 존재가 되는 것 같아서. 웃기지? 여러 사람 중 하나인 게 뭐가 어때서. 이 세상 모든 사람과 마찬가지로 그 속에 엇비슷하게 섞이고, 별다른 특징 없이 살고, 그냥 흐르는 대로 같이 흘러가고, 모난 데 없이 이렇게도 저렇게도 어디에도 어울리는 건데.
나 진짜, 맨날 똑똑한 척은 혼자 다 하면서 실은 제일 바보였나 봐.”
가만히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 우리는 왜, 지금까지 이토록 치열하게 우리의 자아를, 삶을, 세상을, 관계의 변화를 고민하면서도 서로에게 한 번도 이야기하지 못했을까. 어쩌면 서로를 완전히 신뢰하지 못하고, 완전히 내 편이라고 여기지 못한 채 마지막 순간까지 재고 따지고 가늠하면서 서로를 진정으로 곁에 두지 못했던 건 아닐까. 결혼식장이나 드레스 디자인보다, 청첩장이나 답례품 선정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결혼의 본질을 또다시 망각한 채, 평생을 곁에서 나란히 걸어야 할 우리가 혹시 지금 이 순간까지도 그냥 서로 마주 서 있는 건 아닐까. 그래서 언제든 뒤로 돌아설 준비를 하고, 그래서 늘 이렇게 외로운 건 아닐까.
그는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손을 뻗어 내 얼굴에 붙어있던 머리카락 한 올을 조심조심 떼어냈다. 그리고는 다시 한번 두 팔로 나를 당겨와 감싸안았다.
“그렇게 살면, 우리 진짜 잘 살 거야. 서로 나는 이렇다고 쓸데없는 고집 안 부리고, 각자 자기 생각에만 빠지지도 않고, 둘이 언제 어디에서든 자연스럽게 잘 어울리겠지. 나랑 다르다고 해서 불만을 느끼는 일도 없을 거고, 오랜 시간이 흘러도 저 사람 변했다는 생각 자체를 안 할 테니까. 그냥 서로를 옆에서 지켜봐 주고, 자신이나 다른 누구와도 비교하지 않고 그 사람 그대로를 인정해줄 수 있을 거야. 원하는 만큼 서로 닮아가기도 하면서, 이번 생에 단 하나뿐인 진짜 원팀이 되는 거지.
아! 게다가, 우리 부부 사이는 좋을 수밖에 없네. 왜냐하면, 그 불특정다수 안에는 모든 인간 유형이 다 들어있으니까, 부부 사이에 제일 중요한 화해의 달인도 분명 있을 거 아냐.”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가 않는다. 그냥 왠지 모르게 차분해지고 심장이 느리게 뛰는가 싶더니, 내 안에 꽉 들어차 있던 단단한 무언가가 몽글몽글 부드럽게 녹아내리기 시작한다. 눈에 습기도 좀 차오르는 중이라, 지금 무슨 말이라도 한다면 갈라진 목소리를 들킬 것만 같다. 고민끝에 나는, 내 눈에 맞닿은 그의 가슴팍에 말없이 두 눈을 꾹꾹 누르며 자연스럽게 그 흔적을 지워내고 말았다.
그래, 까짓거, 오늘부터 같이 있는 것도,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