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상희’ 이야기, 재수하려고 했는데
2011년 수능 직전 저널테라피를 함께한 아이들 이야기 중 네번째 이야기이다. 상희를 1인칭 주인공으로 하여 저널테라피 경험을 정리했다. 상희의 동의를 받았으며 이름은 가명이다.
우울한 고3 예비 재수생 “재수하고 싶단 말이야! 재수해서 보여 주겠단 말이야. 나도 잘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그런데 왜 나를 못 믿는 거야? 왜!” 이렇게 악을 쓰며 외치고 싶었다. 저널테라피를 하지 않았다면 이 외침을 토해내지도 못하고 정말 재수를 선택했을지 모른다. 10월 모의고사를 망치고 절망감에 빠져 있었다. 뭐라도 잡지 않으면 죽을 것 같았다. 1회기 저널을 통해 나도 몰랐던 내 모습과 생각들을 정리하고 나니 산란했던 마음이 조금 정리되는 느낌이 들었다.
상희야! 너의 글을 읽고 또 읽으면서 상희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아 마음이 아팠어. 10월 모의고사를 못 보았나봐. 지금 많이 힘들고 두렵지? 그동안 뭘 해왔는지 답답하지? 그래서 다시 시작하고 싶지? 그래, 다시 시작할 수도 있지. 화끈하게 다시 시작해서 멋진 성적을 보여주고 싶을 거야. 상희야! 그런 마음으로 일단 이번 수능을 위해 최선을 다해 보는 거야. 지금부터 해도 돼. 영역별로 하나씩만(문제집이건 기출문제건) 잡고 해보렴. 그래야 상희도 마음이 편할 거야. 지금 최선을 다해야 재수를 할 수 있는 힘도 생기는 거야. 이번에 대학을 가면 더 좋은 것이고! (선생님의 1회기 피드백)
선생님의 피드백에 진짜 눈물이 날 거 같았다. 한 번도 털어놓은 적 없었던 마음을 글로 썼고, 엄마한테도 받지 못한 위로를 선생님께 받았다. 그 순간 기분이 시원하고 아직 나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확 느껴졌다. 살 것 같았다. 나를 확실하게 사로잡은 1회기였다.
참자아 찾기 2, 3회기를 통해 내가 왜 재수까지 하려고 했는지를 알 것 같았다. 2회기, 3회기 때의 시(詩)는 내가 쓴 시 같아서 반가웠다. 어찌나 내 마음과 딱 맞는지 시를 읽자마자 글이 술술 써졌다. 왜 재수밖에는 살 길이 없다고 생각했는지 알 것 같았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나는 자랑스러운 사람이고 싶었던 것이다. 그렇게 인정받고 칭찬받아야 비로소 나다운 것으로 믿고 있었다. 재수를 결심했던 것은 나 나름대로의 ‘자아 찾기’였고, 저널테라피를 통해 있는 그대로의 내가 소중함을 깨달았다. 거짓자아를 버리고 참자아를 찾아가기 시작했다. 나는 사람을 좋아하고 사람들과 더불어 행복감을 느끼는 사람이다. 소중한 사람들에게 행복을 느끼게 해주고 싶은데 그러질 못할 것 같아서 화가 나고 속상한 거였다. 나는 그 사실을 깨달아 갔다.
요즘은 그냥 모든 걸 떨치고 잠이나 푹 잤으면 좋겠다. 매일 독서실에 갔다가 집에 오면 이미 1시는 기본이고, 어쩔 땐 2시를 넘길 때도 있다. 이렇게 피곤한 날엔 가위도 눌리고 하는데 그럴 때마다 내가 왜 이러고 살아야 하는가라는 생각도 든다. 어쩔 땐 독서실에서 졸다가 눈을 뜨고나면, 아직 할 일이 산더미 같은데 자버린 나를 자책한다. 그러고서 집에 돌아가면 나 때문에 잠도 안 자고 있는 엄마도 밉다. 그 다음날 아침에 정말 일어나기 싫다. (나의 2회기 저널 중)
그동안 내가 고3이라고 엄마, 아빠, 동생에게 모든 투정과 짜증을 낸 만큼 난 열심히 해야 한다. 나를 가르쳐주신 선생님들의 기대에 만족시킬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하지만 가끔씩 나를 하늘처럼 봐주는 사람들을 모른 척하고 그냥그냥 고3 생활이 지나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런 생각을 하더라도 나에게 실망을 하고, 그들의 기대에 부흥하지 못할까봐 재수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엄마나 아빠한테 자랑스런 딸이 아닌 그저 그런 딸이 될까봐 그리고 선생님들께 그냥 공부 못하는 애로 찍혀질까봐 싫었다. (나의 3회기 저널 중)
그동안 나 자신을 학대하고 자책하던 모습에서 벗어나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이고 4회기에서는 자신을 위로하였다. 4회기에서는 2개의 저널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하셨는데 ‘내 몸과의 대화’를 선택했다.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일이지만 내 몸에게 고마움을 표현하고 싶었다. 쓰고 나서 보니 고마움보다 미안함이 커서 당황스러웠다. 아무리 내 몸이지만 학대에 가까웠다. 남은 기간 동안 최선을 다해서 불쌍한 내 몸들에게 보답해야겠다는 책임감이 생겼다.
수능을 넘어 미래의 꿈으로 수능에 대한 불안감이 커서 ‘재수’라는 문으로 살짝 도망쳐 보려 했었다. 차츰 자신감을 회복하였고 5회기 ‘수능과의 대화’에서 수능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였다. 그동안 피하고만 싶었는데 노력의 동력 역할을 하였음을 깨달았다. 이제 수능은 나를 압도하는 절대적 존재가 아니었다. 그 너머에는 나의 소중한 꿈이 있었다. 6회기에서 내가 ‘사람들에게 봉사하는 직업’을 얼마나 좋아하고 큰 기쁨을 느끼는지 알게 되었다. 내 꿈이 여행과 사람을 향해 있음을 새삼 확인하였다. 7회기에서는 10년 후 내가 성공한 모습이 진짜처럼 느껴져서 왜 공부해야하는지를 비로소 깨달았다. 분명히 내가 가진 생각인데 마치 남의 것처럼 숨어 있다가 저널 위에 나타나는 것이 신기했다. 저널이 없었다면 내 생각을 모르고 살았을 것이 아닌가? 그리고 마지막 8회기를 통해 내가 펼쳐나갈 진로를 확실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행운 아이템 상담 시간이 기다려졌다. 저넉 6시 25분부터 시작하는 상담시간은 식사시간이어서 서둘러 밥을 먹어야 했다. 후다닥 밥을 먹고 “먼저 갈께!”하고 뛰어나올 떄마다 친구들은 "야! 그거 진짜 좋아? 왤케 열심히 해?”라고 물었다. 나는 그냥 웃으면서 “짱 좋아!”하고 뛰어나왔다. 저널마다 나의 느낌이나 생각들을 쓰면서 자책이 줄어들고 희망이 생기기 시작했다. 수능까지 아직 늦지 않았다고 지금부터라도 열심히 하면 된다고 매일 다짐하게 되었다. 나자신도 믿기 어려운 변화였다. 우울감이 걷히고 맑은 하늘 같은 마음이 나를 예전의 행복한 나로 되돌려 놓았다. 정말 내가 무언가를 잘할 수 있다는 믿음이 생기고 모의고사에 대한 심란한 마음은 사라져 버렸다. 사람 마음이 이렇게 간사한 것인가? 재수에 대한 집착도 사라졌고 지금 최선을 다 하자는 마음으로 수능 때까지 열심히 공부하였다. 수능 전날에는 그동안 썼던 나의 저널을 천천히 읽으면서 다시 한번 자신감을 충전시켰다. 19살 나의 저널은 어두운 동굴에 주저앉아 있던 내게 ‘행운 아이템’이었다.
꿈은 다시 시작되고 승무원의 길을 가고자 했으나 원하던 대학에 가지 못했다. 그렇다고 재수를 선택하지 않았다. 나는 지금 지방대생이지만 꿈을 위해 다시 시작하고 있다. ‘사람’과 ‘여행’을 키워드로 하여 내가 꿈꾸는 길 위에 서있다. 그 길을 어떻게 찾아갈지는 나 스스로에 대한 믿음에 맡긴다. 지금 상황으로 미래에 펼쳐진 길이 안개 낀 듯 보이지 않을지라도 길이 없어지지 않고 존재한다는 사실을 이제는 믿는다.
덧붙이는 이야기
상희는 6명 중 유일하게 자발적으로 참여한 아이였다. 첫 모임에서 상희는 스스로 원해서 왔다며 환하게 웃었다. 저렇게 밝은 아이가 왜 왔을까? 하고 궁금했다. 우울한 아이들만 저널테라피를 한다는 뜻이 아니다. 때가 수능 직전이다 보니 절박한 아이들이 왔을 거라 생각한 거다. 그런데 1회기에서 상희는 스스로 이 프로그램을 찾아올 만큼 절박했음을 알 수 있었다. 겉으로는 밝아 보였지만 마음 속은 어둠이었다. 그런 상희가 3회기부터 상담실에 가장 먼저 왔다. 상희의 눈빛에서 이 시간을 기다렸다가 달려온 것 같은 설렘이 느껴졌다. 상희는 이 저널을 ‘행운 아이템’이라고 했다. 재수를 하겠다던 상희가 자신의 참모습을 선명하게 그려냈고 수능에 당당하게 맞설 수 있는 힘을 길렀다. 대학생이 된 상희가 그랬다. 지금도 꿈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상희는 저널과 함께 꿈에 대한 확신과 만나면서 더욱 ‘큰 사람’이 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