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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연 Nov 20. 2021

제니퍼 패커: 너의 스튜디오

작가 스튜디오를 다녀온 후, 복잡한 마음에 나의 '말'에 대한 검열을 시작한다.

 

내가 뱉은 말이 작가에게 필요한 말이었는지, 필요한 말이었다고 해도 지.금. 필요한 말이었는지, 나는 작가의 말을 정확히 이해했는지, 우리의 대화가 오해 없이 흘러갔는지.. 너와 내가 작가와 큐레이터라는 입장이 아닌 예술을 만들어가는 동등한 객체로 대화가 흘러갔는지..


결국은, 작가에게 '글'(이멜)을 쓴다. 네가 표현하고픈 주제에 대해, 스튜디오에서 미처 말하지 못한 것에 대해, 우리의 대화가 재생 반복되어 메아리처럼 들려오는 것에 대해.. 천천히 적어 내려간다.


현재의 나를 뒤흔드는 작업이 아닐지라도, 앞으로 해나갈 작업을 볼 수 있는 눈을 갖길 늘 바래왔다. 시간이 쌓여 축적되어온 프레임이나 신념 등은 스튜디오를 방문할 때만은 모두 던져두고 오로지 작업과 작가만 보기 위해 애쓴다. 하지만, 스튜디오를 방문하는 횟수가 늘어날수록 나는, '말'하는 것이 어려워 듣기만 하고 있다. 창작물에 대해 '말'을 한다는 게 가능한 일일까. 글을 쓰는 일은? 단정 짓는 글이 아닌 열리고 확장되어 작가와 작품에 대해 생각하게 만드는 글을 쓸 수 있을까. 미술어법에 맞추어 쓰는 형식적 보도자료나 도록에 쓰이는 아카데믹한 글이 아니라.. 

 

Installation View @Whitney Museum 


제니퍼 패커(Jennifer Packer, 1984)의 첫 미술관 개인전이 위트니에서 열리고 있다. 재스퍼 존스의 회고전과 함께. 


전시 제목인 "The Eye Is Not Satisfied With Seeing"은 전도서의 한 구절이다. 번역을 하면, "눈은 보는 것에 만족하지 않는다"쯤 되겠다. 채워지지 않는 인간의 지식, 앎에 대한 갈망으로도 의역할 수 있을 텐데, 섬세한 관찰을 가지고 재현의 한계를 끊임없이 연구하는 패커에게 이 제목은 참으로 그답다.


패커의 작업을 깊이깊이 빨아들이고 있는 젊은 예술가들의 뒷 머리를 보며, 그의 작업과 무척이나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끌림과 슬픔이 있지.. 그의 드로잉과 페인팅에는...

발길을 오래 붙잡아 놓는 페인터다. 

그리고 화면보다 실제 작업이 말도 안 되게 훨씬 더 좋은 작가다. 모니터 화면과 도록으로는 그의 작업을 담을 수 없다. 


시대를 앞서간 대가들의 작업들을 흠모하고 연구하며 자신의 정체성과 인간에 대한 깊은 고민을 회화로 표현하기 위해 보이지 않는 투쟁을 해왔다는 것을 안다. 


이번 개인전에서 대표작으로 선보이는 작품, <Blessed Are Those Who Mourn (Breonna! Breonna!)>(2020)은 스트레치도 하지 않은 채 월텍스트 옆에 걸어두었다. 304 x 426 cm가 되는 대형 캔버스 위에는 사실적 묘사와 추상적 표현이, 인물과 인물을 둘러싼 주변 환경과의 상호작용이, 주제 색상을 잡고 빠지고 잡히길 반복하는 운율 등이 패커의 회화적 언어로서 드러나 있다. 


작업의 제목에서 알 수 있듯, <Blessed Are Those Who Mourn (Breonna! Breonna!)>는 2020년 3월 13일 미국 켄터키주 루이빌 경찰이 발포한 총격에 사망한 26살의 흑인 의료 종사자, 브레오나 테일러(Breonna Taylor) 사건을 배경으로 그려졌다. 테일러가 총격당한 집 사진을 미디어로 접한 패커는 테일러의 삶이 드러나는, 그리고 삶의 피난처가 되어야 할 집안의 여러 사물들에서 무언의 연결감을 느낀다. 

 

애시드 옐로 톤으로 가득 찬 화면에서, 정작 브레오나 테일러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대신 그녀의 침실에 걸려 있었던 격언이 적힌 포스터나 배트맨 만화의 페이지, 팬(fan), 다리미, 부엌의 나무 캐비닛, 체스판 등이 화면 속 공간에 정교하게 또는 추상적으로, 촉각적이고도 청각적인 감각으로 그려졌다. 워시드(washed)된 빈 공간에서는 총성 소리가 들려오고, 그 옆의 사라질듯한 계단 위에는 푸른 하늘에 새가 날아가는 장면이 꿈처럼 그려져 있다. 소파에 농구 바지를 입고 누워있는 인물에서는 지로뎃(Girodet)의 신고전주의 회화인 <The Sleep of Endymion>을 떠올리게 하기도 하고, 자크 루이 다비드(Jacques-Louis David)의 <The Death of Marat>의 고전 작품이 동시에 다가와 미묘하고 복잡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Say Her Name>(2017), Photo: Matt Grubb; courtesy the artist, Sikkema Jenkins & Co, New York


패커가 정물화로 그리는 대상인 꽃 역시 왠지 모를 슬픔으로 다가온다. 아마도 그건 그가 그리는 부케가 대부분 장례식 꽃다발이기 때문인 것도 있겠다. 작가들에게 스튜디오는 자신의 세계를 마주하는 공간이자 무한한 에너지를 얻고 방출하는 곳일 텐데, 패커에게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슬픔을 헤쳐 나갈 수 있는" 행위와도 같다. 누군가의 죽음과 상실감, 부재 등을 추모하는 행위. 그리고 '나'를 찾아가는 행위. 


<Say Her Name>(2017) 또한 교통 위반으로 체포된 후 경찰에 구금된 젊은 시민 운동가, 샌드라 블랜드(Sandra Bland)의 죽음을 추모하는 작업이다. 블랜드의 죽음은 흑인 여성을 향한 경찰의 폭력을 알리는데 관심을 불러일으킨 사건이었다. 


재니퍼 패커의 회화는 머리가 아닌 감정으로 훅 다가온다. 그리고 그 감정은 슬픔이다. 슬픔으로 매캐해진 가슴을 쓸어 넘긴다. 그리고 생각한다. 내가 왜 슬픔을 느끼는가. 알지도 못하는 이 인물과 정물에 대해서.. 


누군가는 패커의 작업이 내용적으로 형식적으로 구성적으로 계산된 회화라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감정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은 예술이 행하는 가장 빛나는 일이 아닌가. 계산되어 만들어진 회화가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동요시킬 수 있을까. 


https://www.youtube.com/watch?v=DvNsqtsKTQ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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