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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연 Apr 26. 2023

과정 00

멀고도 가까운 - 04252023

전시 준비 과정에서 새어 나오는 생각을 기록하고자 한다. 과거의 내가 부끄러울지라도 그 시절의 나와, 완전치 못한 예술을 잊지 않기 위해서.


≪멀고도 가까운≫ 프로젝트는 꽤 오랜 전부터 머릿속에 담아두다 가끔씩 꺼내 이렇게 저렇게 상상해보곤 했던 기획이다. 이제 막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화려하게 비상하는 작가들과, 점점 바래진 빛을 끌어안고 생업과 예술 사이에서 작업을 이끄는 작가들, 아이들을 다 키우고 나서야 자신의 작업으로 다시 돌아와 시작하는 작가들, 동반자의 성공/실패 후에야 자신의 붓을 잡을 수 있었던 작가들, 모든 게 감사하다고 거듭 말하는 작가들까지 그들과의 대화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아니, 해야만 했던 기획이었다. 사실 이 기획은 날 위한 기획이기도 하다.


전시 초대 글은 2022년 3월에 쓰였다. 밖에 나가는 일이 두려웠던, 동양인 혐오 범죄가 극심하던 날이 지속되었던 시기였다. (현재(2023년 4월) 작가들에게 발송된 초대 글은 디테일한 내용이 여러 번 수정되었다. 아랫글은 2022년 3월에 쓰인 글임을 밝힌다.)



≪멀고도 가까운≫*전의 작가로 정중히 초대합니다.


이 기획은 미국으로 이주해 예술가들의 작업실을 오가는 기획자로, 동양인으로, 그리고 이성애자이자 장애가 없는 여성으로 타지에서 살아가며 소외되거나 타자화되기도 했던 직간접적 경험에서 새어 나온 여러 고민과 의문에서 시작됐습니다.


미술계에서 여성 예술가에 대한 연구와 전시는 1970년대 이후로 활발히 이루어져 왔습니다. 하지만 미국의 대형 갤러리들에서 소개하는 작가의 80%는 여전히 백인 남성이며, 주요 미술관에서 진행하는 작품수집은 고작 11%만이 여성 작가입니다.** 2020년 미니애폴리스 경찰의 과잉진압으로 살해된 조지 플로이드 (George Floyd) 사건으로 다시 거세게 일어난 Black Lives Matter  운동의 물결은 흑인 작가들의 작업을 여러 곳에서 볼 수 있는 촉매제가 되었습니다. 반면, 아시아 여성 작가들의 작업은 어디서 볼 수 있을까요? 찾아볼 수 있는 내용은 아시아 여성 작가에 대한 기사가 아닌 폭력을 당하거나 살해되어 더 이상 볼 수 없는 아시아 여성의 이름뿐입니다. 장기화되었던 코로나로 동양인 혐오 범죄가 증가하면서 아시아 남성보다도 아시아 여성이, 그리고 아시아 여성 노인이 폭력의 한가운데 무방비하게 놓여 있지만, 뉴욕 경찰은 폭력의 현장을 아시안 혐오 범죄로 공포하지 않습니다. 타임스퀘어 선로에 밀쳐져 사망하게 된 미쉘 고(Michelle Go)도, 자신의 집을 향하다 그의 뒤를 쫓던 아싸마드 내시(Assamad Nash)의 칼에 찔려 숨진 크리스티나 유나 이(Christina Yuna Lee)가 그렇습니다. NBC 뉴스에서는 아시아인에 대한 혐오 범죄가 작년과 비교해 361%가 증가했다고 보도합니다. 이 수치는 보고되지 않은 아시안 혐오 범죄를 고려했을 때, 무척이나 참담한 숫자입니다. 동양 여성의 목소리는 희미하고 희미해진 채 사라져 버리고 맙니다. 단지, 노란 피부가 붉게 변하는 모습만이 미디어로 찍혀 이곳저곳을 돌아다닐 뿐이죠. 미국으로 이주해 살아가는 동양인 여성은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고스트인 걸까요.


“그 어떤 것도 자아와 역사의 교차점보다 더 흥미롭거나 더 가슴 아프거나 더 포착하기 어려운 것은 없다”라고 미술사학자인 린다 노클린(Linda Nochlin)이 언술 했듯, 미국으로 이주한 후에야 중심에서 볼 수 없는 것들을 자각할 수 있었습니다. 노란 피부에 검은 머리를 가진, 그리고 영어가 어눌한 아시안이자 여성은 마이너라는 프레임이 겹겹이 씌워진다는 것을요.


코로나가 시작되던 2020년 초에는 한국에 들어가 할머니, 엄마와 처음으로 삼대가 함께하는 시간을 보냈습니다. 지금까지 열정을 갖고 해 왔던 일에서 멀어져, 기획자의 역할에 대해 생각하는 긴 겨울의 계절을 지나며, 엄마나 할머니에게 고민을 직접 묻고 답을 얻은 것은 아닙니다. 다만, 세대가 다른 두 여성이 각자의 시간 속에서 매일매일을 성실히 보내고, 서로를 아끼고, 지금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일들을 지혜롭게 해 나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작은 용기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생각했습니다. 여러 세대의 여성 작가들이 한자리에 모여 자신의 경험과 정체성을 공유하는 과정을 전시에 담고 싶다고요. 전시가 일회성으로 휘발되어 버리는 허무함을 토로하곤 했던 작가들의 목소리에 대한 회답이기도 했습니다. 예술이 갖는 선한 힘을 믿습니다. 그렇기에 예술을 매개체로 공론화의 장이 만들어지고, 희미해진 소수자들의 목소리가 함께일 때, 그 목소리는 더 단단해질 수 있으며 소외된 다양한 주체들이 수면 위로 드러나 미술사를, 그리고 동시대를 바라보는 다양한 관점이 생겨날 수 있다고요. 아시안 여성 작가들의 세대 간 대화와 과정이 전시로 선보일 예정이기에 지금 당장 전시될 작업은 고려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세대를 나누는 기준과 세대 간의 대화와 과정이 어떻게 전시의 형식으로 선보이게 될지에 대한 ≪멀고도 가까운≫ 전의 규칙과 실행 단계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세대에 대한 정의는 생물학적 기준이 나닌 사회학적 개념으로 나눕니다. 사회학적 개념의 세대란 사회적 제도를 통해 거대 사건을 경험하고 그것을 반추하고 변주하는 가운데 만들어진 ‘기억의 공동체’로서의 세대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생물학적 나이로 세대를 구분 짓는 게 아닌, 이민 온 연도를 기준으로 세대를 나눠 진행합니다. 1970~80년대 이민 온 작가들과, 1990~2000년대 중반, 2010년 이후로 나눠 세대별 일대일의 짝이 지어집니다.


2.      참여하는 아시안 여성 작가들은 사회적, 문화적, 성적 평등을 지향합니다. 이를 위해 작가들은 비명시적, 은유적, 시각언어와 여성적 상상력으로 억압돼 온 것, 비가시적인 것, 부재한 것을 소환합니다. 나아가 신분, 인종, 성별, 장애 등 차별유형들의 교차 성에 주목하고 양성평등과 젠더 중립을 추구합니다.


3.      세대 간 1:1로 짝지어진 작가들은 6개월간 일주일에 한 번 만남의 과정을 갖습니다. 직접 얼굴을 마주하고 만날 수도 있고, 줌이나 전화, 문자도 괜찮습니다.


4.      일주일에 한 번 갖는 만남의 내용은 지정된 웹사이트에 작가들이 직접 업데이트를 합니다. 이는 전시의 과정을 기록하기 위함이며, 이 기록은 전시에 쓰일 예정입니다. 업데이트되는 내용은 만남의 내용을 요약한 글이 될 수도 있으며, 편지, 시, 영상, 사진 등 어떠한 형식으로도 좋습니다.


5.      전시는 일주일에 한 쌍씩, 네 쌍의 전시가 4주에 걸쳐 진행됩니다. 전시될 작업은 과정의 기록물뿐만 아니라 대화의 내용에서 나오게 될 유의미한 담론이 소주제가 되어 작업과 함께 선보이게 됩니다. 전시될 작업은 기획자와 함께 논의 하에 정해집니다.


6.      ≪멀고도 가까운≫ 전에 참여하는 8명의 작가들에게는 W.A.G.E (Working Artists and the Greater Economy)에서 권장하는 아티스트 지급 기준을 적용해 작가당 $250의 아티스트 비용을 지불할 예정입니다.


 본 전시의 운영과 관련해 좋은 아이디어가 있으신 분은 언제든 의견 들려주시기 바랍니다. ≪멀고도 가까운≫전의 규칙과 실행 과정에 대한 동의를 전제로 6개월간의 여정에 함께 동행해 주실 작가분은 00월 00일까지 메일로 회신해 주시기 바랍니다. 세대 간의 대화와 과정이 전시로 풀어질 이번 전시에서 여러분의 유의미한 담론을 기다릴게요!





*전시 제목인, ≪멀고도 가까운≫은 페미니즘과 환경, 정치, 예술에 관해 아름다운 글로 늘 영감의 원천이 되어준 작가, 레베카 솔닛의 책 제목을 빌려왔음을 밝힙니다.

**Julia Halperin & Charlotte Burns, “Museum Claim They’re Paying More Attention to Female Artists. That’s an Illusion.” Artnet News, September 19,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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