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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연 May 03. 2023

미요코 이토: 고통을 안고 살아내는 일

@Matthew Marks, Feb 24 ~ April 15, 2023

예술에 대해 ‘말’하고 ‘쓰는’ 일은 늘 그렇듯 실패다. 언어화할 수 없기에 음악으로 무용으로 시각예술로 표현한 그 무엇을 어떻게 언어화할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머리털부터 발톱까지 온몸을 맴돌다 떠나지 못한 예술은 고통이다. 그래서 그 고통을 떨쳐내려 ‘말’을 뱉어내는 나는 어리석다.


미요코 이토 (1918~1983)의 회화 때문이다. 몸에서 떠나지 못한 이토의 작품을 떠안은 채 푸념을 늘어놓는다. 세상을 떠난 지 30년이 지나서야(죽은 후에야) 뉴욕의 메가 갤러리에서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이해관계로 다시 살아서 만나게 된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여러 기사들에서는 당신의 작업에 대한 연구자료나 책이 너무도 없어 미스터리 한 회화라고 말하고 있다고.. 하지만 그건 일본계 미국인 여성 작가로 당신이 살아온 시대와 삶을 제대로 마주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나는 말한다.


Heart of Hearts, Basking, 1973 Photo: ©Estate of Miyoko Ito, Courtesy Matthew Marks Gallery


여기저기 흩어져 사실 확인이 어려운 미요코 이토의 연대기를 이어 붙여 추측해 보면, 70년대에 그려진 회화들은(아마도 이토의 대표작으로 불리게 될 것으로 여기지는) 이토가 유방암으로 양쪽 유방 절제술을 받고 처음으로 온전히 작업에만 몰두했던 시기에 제작된 것이다. (엄마와 아내로서의 역할 그리고 생계를 위한 밥벌이에서 물러날 수 있었던 시기였다.) 이토의 회화에서 이제껏 다른 페인팅에서는 볼 수 없었던 촉각(tactle)적 고통을 느끼는 이유는 캔버스의 네 옆면에 일정한 간격으로 박히다 만 못들이 평면에 그려진 고요한 화면과 기이한 조응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어떤 비평가는 캔버스의 틀에 완전히 박혀있지 않은 못에 대해 작업을 더 진행할지 말지를 결정하지 못한 상태처럼 비쳐 저 작품의 완성과 미완성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고 했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못 들은 처음에 캔버스를 스트레칭하기 위해 쓰인 과정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겠지만, 결과적으로 그 못 들은 이토의 결정에 의해 작품 자체로 남겨진(존재하는) 것이다. 나는 이제껏 페인터들의 작업에서 캔버스에 그렇게 많은 ‘못’이 튀어나온 상태로 ‘옆면’에 박혀 있는 것을 본 적이 없다. 보통은 캔버스 옆면이 아닌 보이지 않는 면(벽에 걸리게 되는 뒷면)에 캔버스 천을 스테이플로 고정한다. 더군다나 옆면에 그렇게 많은 못을 박는다면 나무 프레임이 갈라질 것이고, 이후에 액자를 입히기도 힘들 것이다. 이토의 모든 작업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확신할 수 없지만 매튜 막스 갤러리에 결린 70년대 이전의 작업에서는 못들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어디에서도 이토의 작업에 박힌 못에 대해 제대로 언급한 글을 현시점에서 찾을 수 없다.


이토의 화면은 과거 여성 예술가들의 글이나 회화, 설치작업 등을 연상케 하는 자신만의 공간(방이나 창문, 집안의 가구 등과 같은)과 몸이 추상의 형태로 너울댄다. 그리고 찢긴 상처가 있다. 캔버스에 박힌 못으로 피부의 거죽을 그으면 같은 상처이지 않을까 싶어 쓰리고 아프다. 오랜 시간을 두고 그린 그림이라는 것을 표면의 질감과 색감을 통해 알 수 있다. 캔버스의 네 옆면에 튀어나온 못 들은 회화와 조각의 경계를 흩트린 채 촉각적 감각을 극대화시킨다. 못을 박는 행위와 화면 위의 희미한 풍경의 층위가 쌓이고 쌓여 고통과 어떤 그리움 너머의 아름다움이 비친다. 숨과 마음을 고르며 자연과 우주에 보내는 시 같다.


Untitled 1970 Photo: ©Estate of Miyoko Ito, Courtesy Matthew Marks Gallery


질병과 고통, 나이 듦, 돌봄, 죽음 등에 관련된 책들을 찾아 읽기 시작한 것은 칠 년 전부터다. 사랑했던 사람이 나이가 들어가며 죽어가는 과정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도 의사가 진단한 질병의 의혹으로 조직검사를 받고, 매년 몸을 스캔당하며 미국의 의료 시스템에 늘 무력감을 느낀 채 살아간다. 질병과 고통에 대해 말하는 일은 또 다른 고통을 수반하기에 늘 다른 이들이 적은 글로 나를 이해하려 애쓴다. 그중, 아서 프랭크가 쓴  <아픈 몸을 살다>에서 옮긴이의 말이 이토의 작업과 맞닿아 있어 옮겨 적어본다.


아픈 사람은 절벽 위에서 정말로 많은 것을 선명하게 본다. 고통 사이로 아름답고 경이로운 것을 본다.


Installation View Photo: ©Courtesy Matthew Marks Gallery


이미 세상에 없는 예술가의 작업을 이해하는데 그가 살아온 삶의 발자취(연대기)와 시대를 살펴보는 일은 어두운 밤하늘의 별을 보며 방향을 더듬거리는 것과 비슷하다. 미야코 이토의 연대기는 사실 확인이 필요한 부분이 많지만 과거의 전시 기록들과 인터뷰 자료를 토대로 주관적인 해석을 해보려 한다.


질병

고통

일본계 미국인 2세

이방인(alien) - 아웃사이더 중의 아웃사이더 (an outsider among outsideres)

일본의 전통회화/대학생활에서의 수채화

시카고 이미지스트(Chicago Imagists)로 걸러진 초현실주의


위의 단어들은 내가 이토의 작업을 이해하는 가지들이다. 그의 일대기를 쫓아 시대적이고 개인적인 사건들을 곱씹어 보면,


다섯 살이 되던 1923년 9월. 캘리포니아에서 요코하마로 이주하자마자 겪게 된 관동 대지진과 오 년간의 일본 생활(미술과 서예 수업 등 일본 전통 교육을 받았다)은 그녀의 인생에 트라우마와 신경 쇠약을 안겨줌과 동시에 일본의 문화와 예술을 접하는 시간이었다—"Everything was terribly traumatic... I was very, very ill, extremely ill, to the point that I couldn't walk any more.... It was both very painful and enjoyable. Those five years are the roots of what I am right now. (모든 것이 끔찍하게 충격적이었어요... 저는 더 이상 걸을 수 없을 정도로 무척이나 아팠어요... 일본에서의 시간은 매우 고통스러웠지만 또한 즐거웠어요. 그 5년의 시간이 지금 저의 뿌리가 되었습니다.)"


1928년 이토가 10살이 되던 해, 어머니와 여동생 이토는 아버지가 있는 캘리포니아로 돌아와 정착하게 된다. 영어를 익히기 위해 모국어인 일본어를 잃어야 했으며 인종차별을 겪는다—"I really did not digest English until I was fourteen. In order to do that I had to suppress Japanese altogether; I just simply stopped speaking Japanese. So out went the language part of my direction and I became a visual person... You cannot help but be race conscious when you're segregated (저는 열네 살 때까지 영어를 하지 못했어요. 일본어를 억눌러야 했고 그냥 일본어로 말하는 일을 멈춰야 했어요. 그렇기 때문에 저는 언어적인 영역을 벗어나 시각적인 사람이 되었어요... 인종차별을 경험하게 되면 인종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게 되죠)"


캘리포니아 샌 브루노의 경마장이던 Tanforan Assembly Center, 마구간을 개조한 곳에서수감자들이 단체로 머물렀다. ©NYT


1938년 UC 버클리 미술과에 입학할 당시 학교는 수채화 지향적인 분위기였고, 이토는 수채화에 심취하게 된다. 졸업을 한 달 남겨둔  1942년, 이토는 대학에서 만난 헤리 이치야수(Harry Ichiyasu)와 서둘러 결혼을 한다. 이는 2차 세계대전 진주만 공격으로 미국 정부가 일본계 미국인을 강제 수용소에 감금하게 되면서 이치야수와 헤어지지 않기 위한 방편이었다. Tanforan 수용소에서 생활하는 동안 이토는 예술가이자 버클리 교수인 치우라 오바타(Chiura Obata)가 만든 미술학교에서 일본 예술가들과 교류를 했으며 수감자들에게 가르치는 일을 했다. 이토는 이듬해에 스미스 컬리지(Smith College) 대학원 입학 허가를 받아 수용소를 떠날 수 있게 돼지만, 남편은 유타 수용소로 보내져 1945년까지 수감된다. 나는 그들이 언제 끝날지 모르는 전쟁 속에서 어떤 시간을 보냈는지 감히 상상할 수 없다.


일본계 미국인 조각가 이사무 노구치(Isamu Noguchi) 자서전 속 문장을 인용하자면, "“I was not just American but Nisei. A Japanese-American.(나는 그냥 미국인이 아닌 니세이(2세대) 일본계 미국인이었습니다.)”


Act One in the Desert 1977 Photo: ©Estate of Miyoko Ito, Courtesy Matthew Marks Gallery


1944년 시카고로 거처를 옮겨 45년이 되는 해에 남편과 재회를 하고 남은 생을 이곳에서 보내게 된다. 그는 두 아이를 키우며 “sunrise to sunset, (해가 뜨고 질 때까지)” 일주일 내내 일했으며, 유방암으로 유방 절제술을 견뎌내야 했다. 이후 정신적인 고통이 수반되기도 했다.— “I knew since I was five years old that I would have a nervous breakdown... I kept on postponing. I did have periods of very difficult times, but finally I did relax and have a nervous breakdown to my heart’s content … I had total control of myself, and I knew what was happening.(저는 제가 신경쇠약에 걸릴 것이라는 것을 다섯 살 때 이미 알고 있었어요... 저는 계속 미뤄왔죠. 매우 힘든 시기를 겪었지만 마침내 긴장을 풀고 마음껏 정신을 놓을 수 있었어요. 저는 제 자신을 완전히 통제할 수 있었고,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고 있었어요.)"


몇 안 되는 크리틱들의 글(모두 남성 크리틱이었다)과 인터뷰, 그가 살았던 시대적 배경을 쫓아 찾아보는 것 만으로 그의 삶을 이해할 수는 없다. 다만 그가 미국 시민이었지만 일본계 미국인 2세로 살아가야 했던 시대상이 현재와도 그리 멀지 않게 느껴졌고, 녹록지 않았던 여성으로서의 삶 또한 지금과 많은 괴리감이 느껴지지 않았을 뿐이다. 많은 예술가들이 그렇듯, 예술 외에 자신을 구원해 줄 수 있는 곳이 없을 뿐이다.


"I have no place to take myself except painting."



*이토의 인용문은 1978년 Kate Horsfield가 진행한 비디오 인터뷰에서 가져온 것이다. 인터뷰 원고는 The  Profile 4, no. 1 (January 1984)에 게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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