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학년 개미반 박현지입니다. 제 꿈은... 화가입니다."
그림을 업으로 삼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꿈의 시작은 초등학교 1학년 때 처음으로 장래희망을 발표하던 시간부터였다. 한 반에 45명, 그중 10명이 과학자, 10명이 선생님, 10명이 경찰, 10명이 화가, 나머지 5명은 엄마나 아빠를 쓰던 시절이었다. 물론 초등학교 6년 동안 장래희망 칸은 10번도 넘게 바뀌었다. 그때만큼 순수하게 나에게 집중할 수 있던 때는 없었다.
디자이너, 신발디자이너, 패션디자이너, 미술 선생님, 영화감독, 일러스트레이터 등 문화 예술에 관련된 직업들이 나열되던 시간 속에 안타깝게도 의사나 변호사는 단 한 칸도 차지하지 못했다. 엄마 미안.
그러다 머리가 좀 커지고 인풋도 풍부해지며 다양한 경쟁 속에서 스스로를 조금 더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눈이 생기자 꿈이라기보단 말 그대로 직업의 명칭을 더 멋들어지게 썼다.
영화 미술 감독, 남성복 디자이너, 광고 디자이너. 여전히 치과의사나 판사도 없다. 아빠 미안.
지금 생각해 보면 장래희망 칸에 ‘엄마’, ‘아빠’라고 썼던 아이들이야말로 정말 행복한 꿈을 꾼 게 아니었나 싶다. 말 그대로 '꿈' 아닌가. 평소 그 친구들의 부모님이 얼마나 좋은 분들이셨으면, 얼마나 집이 사랑으로 가득했으면 꿈이 그토록 순수할 수 있었을까.
나도 처음엔 나름 순수한 꿈을 썼다. 아마 ‘그림 그리는 사람’이라고 썼던 것 같다. 화가라 쓰기에는 뭔가 빵모자 쓰고 거리에서 보헤미안 스타일의 판초를 걸친 모습으로 연필을 휘갈기는 수염 북슬한 모습이 떠올랐는데 그게 썩 내 취향은 아니었고, 8살의 나는 수염도 없었다. 그래도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고, 그냥 그리고 싶은 대로 그리고, 어떠한 틀도 없이 좋아하는 것들로 일상을 가득 채우는 것이 꿈이었고, 나에게 있어 그 꿈은 말 그대로 ‘그림 그리는 사람’이었다.
선생님은 귀엽다는 듯 사람 좋게 웃으시며 말씀하셨다.
"현지야, 그림 그리는 사람은 화가라고 한단다. 다시 써서 줄래?"
풀이 죽었다.
흑연의 작은 흔적조차 남기고 싶지 않아 졌다. 지우개를 책상에 먼저 문질러 이미 묻은 때마저 벗겨낸 뒤 한 글자씩 지워나갔다. 어쩌면 내가 화가라는 직업을 모르는 것처럼 밝혀진 민망함이나 억울함보다도, 내가 하고자 하는 일과 꾸고자 하는 꿈의 전반적인 것들을, 그러니까 내 머리와 마음속에 품은 이 엄청나게 풍성한 설렘을 단 두 글자로 정의 내리려 하는 선생님이 조금 미웠던 것 같다.
그 뒤로는 어쩐지 여러 이유로 화가라는 직업은 나에게서 멀어졌다. 모든 게 거짓이었다. 작고 어린 자존심 때문이었는지 그 선생님의 말대로 따르고 싶지 않았던 건지. 그림을 그리고 싶은 와중에 엄마 구두가 예뻐 보이면 신발 디자이너가 꿈이 되었고, 그림 그리던 와중에 언니가 튼 영화가 재미있으면 영화감독이 꿈이 되곤 했다.
그래서 어린 날의 내 모든 장래희망은 거짓이었다.
20대 내내 디자인을 그렇게 열심히 하면서도, 누가 ‘직업이 뭐예요?’라던가 ‘어떤 일 하세요?’라 물으면 언제나 명확한 단어로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냥 작은 디자인회사 다녀요.’ 혹은 ‘그냥 패키지 같은 거 기획하고 만들고 그래요.’라던가. 화실을 운영하면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림을 그리고 가르쳐요. 가끔 외부 강의도 나가고요. 경기 좋으면 장사꾼인데 안 좋으면 한량이에요.
‘직업‘이라고 하면 여전히 뭔가 거창해야 할 것 같고, 대단해야 할 것 같고, 누가 들어도 우와 소리가 나야 할 것 같고. 그게 아니라면 그래도 뭔가 안정적인 여유로움이 풍겨야 할 것 같고. 경제력과 직결된 전문성을 내세워야 할 것 같아서. 그래서 사람끼리의 소소한 대화 속에서는 웬만하면 명확한 단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그 정도 단어로는 내가 품고 있는 일과 꿈과 그것들에 대한 애증을 다 담을 수 없을뿐더러, 그렇게 정의 내려진 무게감을 느끼고 싶지 않다.
그림을 그린다는 건 캔버스에 물감을 치덕치덕 바르는 그림일 수도, 종이에 슥슥 그리는 드로잉이 될 수도 있다. 하물며 해변가 모래사장에 투박하게 그려본 불가사리도 그림이라면 그림이다. 요즘은 아이패드로도 열심히 수작업 느낌을 내고자 연구하고 있다. 그림을 가르치는 것 또한 마찬가지다. 화실에 오시는 성인 수강생분들을 가르치는 게 정규 커리큘럼의 기본이지만, 가끔 아이들이 찾아오면 뽀로로도 예쁘게 그려준다. 시간 안에 작품을 완성해야 하는 원데이클래스는 또 나름 위트 있게 해 나간다. 시니어 분들을 교육하는 자리에선 또 다르다. 어떤 도구와 재료인지, 누구와 함께 하며 어떤 환경인지에 따라 전혀 다른 작품이 나오고, 전혀 다른 마음가짐으로 임한다. 이 벅참을 어찌 자영업이라는 무미건조한 단어 안에 가둘 수 있을까.
그림을 그리고 가르쳐요.
어떤 그림이요?
아이들 가르치세요?
어디서요?
작업실이 있으세요?
전시도 하세요?
물론 뒤이어 따르는 스무고개로 인해 기어코 아~ 화실 운영하시는 작가님이시구나.로 결정되는 일이 허다하지만.
어떻게든 명확한 단어를 피했던 건 결국 내 꿈에 대한 작은 존중이었다. 타인이 만든 틀 안에 수만 가지 감정의 색을 구겨 넣고 싶지 않았던 8살의 고집이 여전히 살아 숨 쉬는 것이다. 이제는 안다. 내 꿈은 고정된 명사가 아닌, 누군가의 일상에 색을 입히고 내 안의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꺼내어 놓는 동사의 삶이라는 걸.
다시 1학년 개미반으로 돌아간다면, 선생님이 다시 써오라던 장래희망 칸에 나는 아무런 글자도 적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당당하게 그 빈칸을 알록달록 예쁜 색들로 가득 채울 것이다. 명확한 이름이라는 감옥에 갇히지 않은 채, 그저 그리고 가르치고 쓰고 배우는 이 분주하고 소란스러운 삶 자체가 나의 일이자 꿈이기 때문이다.
세상이 정해준 이름표는 여전히 내 몸에 맞지 않는 옷처럼 어색하지만, 이제는 그 모호함이 나를 자유롭게 한다.
나는 그저 오늘도
어떤 단어로도 다 설명할 수 없는
그림을 그리고 가르치며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