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한데, 나 그런 사람 아니야.

by 현지




[언니, 잘 지내시죠?]


뜬금없는 인물의 평범한 메시지. 정이었다. 정은 내 어린 날 사회생활의 악랄한 쓴맛을 보게 해 준 첫 회사의 첫 후임이었다. 가, 족같고 작은 디자인 사무실이었는데 퇴사 이후로 그곳과 관련된 이들과 그 어떤 연락도 하지 않았다.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겁이 많아서 차단까진 못했는데 디자인을 완전히 접은 후 완벽하게 손절했다. 여느 첫 회사가 대부분 그러하듯 퇴사한 뒤 아, 이런 곳은 이력서도 넣어선 안 되겠군, 하는 안목과 노하우만 성장했다.


[응응~ 잘 지내고 있지. 너도?]


'How are you?', 'Fine thank you and you?'를 이렇게 써먹는다. 민망하리만큼 형식적인 답에도 정은 기다렸다는 듯 타자를 친다. 그때까지만 해도 별생각 없이 옛날의 정을 기억해 내려 애썼다. 나는 한번 연이 멀어진 이들은 두 번 다시 돌아보지 않으므로 그녀 역시 이름과 얼굴 빼고는 흐릿해진지 오래였다. 미안한만큼 재빠르게 그녀를 떠올렸다. 나와는 달리 귀여운 볼살에 동그랗던 얼굴, 웃을 때면 길고 순하게 휘어지던 눈, 정겨운 큰어머니를 떠올리게 하는 인자한 입매, 조금 느리고 어눌했지만 언제나 본인의 목표치에 다다르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던 아이. 지각 한 번 하지 않고 편도 1시간 30분 거리를 늘 같은 텐션으로 출퇴근하던, 함께였을 때엔 답답한 적도 있었지만 다시금 떠올리니 참 배울 게 많던 사람.


[저는 다시 공부하면서 교육 쪽으로 틀었어요. 언니 이제 디자인 안 하시는거죠..?]


그래, 정은 노력파였다. 그것도 엄청난. 그 회사는 야근이 없는 날(손에 꼽는다.)은 눈치를 봐가며 퇴근 아닌 퇴근을 해 집에서도 자료 조사와 아이디어 스케치를 해야만 했다. 무서운 업무 강도와 장기적 프로젝트들의 연속이었다. 애석하게도 내가 입사하고 6개월 만에 사수가 퇴사했고, 나와 내 월급은 명백한 신입사원인데 소규모라는 이유만으로 나더러 최고참 역할을 떠넘긴 엄청난 곳이었다. 덕분에 살인적인 스케줄의 3년을 지내고, 송년회에서 빨간 뚜껑 참이슬 한 병에 일부러 만취한 척 이사님께 야자타임을 선언한 후 응어리를 실컷 쏟아내고 나서야 벗어날 수 있었다.


그래도 내 26살은 열정 빼면 시체! 아프니까 청춘!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 와 같이 말도 안 되는 말을 외치던 시절이었다. 정은 내가 야매 선임이 되고 한 달 뒤 입사해 함께 그래픽 디자이너로써의 첫걸음을 걸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우리는 몇 년 뒤 끝내주는 디자이너가 돼서 각자 회사도 차리고, 이쪽 세계의 TOP급 연봉을 챙기는 찬란한 커리어우먼이 될 줄 알았다. TOP급 연봉은 무슨, 여전히 생명수로는 T.O.P 커피가 짱이다.


자기 일에 최선을 다 하는 교과서 같은 아이. 신입다운 열정과 탱글탱글한 아이디어로 놀라움을 준 아이. 가끔 선임이라는 이유로 되지도 않게 심통 부려도 군소리 한 번 않고 '언니가 더 힘드실 텐데요.' 하며 사람 좋게 웃던 아이였다.



한 번은 자료 조사를 맡겼는데 정이 방향성을 전혀 다르게 조사한 적이 있었다. 광복절과 여름휴가까지 반납하면서까지 지속된 야근과 상사들의 쪼달림에 지쳤던 건지 순간 화를 내고 말았다. 시간은 촉박했고 조사할 시간은 충분치 않았던 터라 더욱 예민했다. 실컷 화를 낸 뒤 사회생활이 이런 거구나, 때린 손이 더 아파요, 아이고 아버지. 하며 또 한 번 해탈하려는데, 정이 먼저 다가왔다.


"저는요, 사실 언니가 제일 부러워요."

"...?"

"언니는 손도 빠르시고, 실력도 받쳐주잖아요. 저는 그게 잘 안 되는 거 알아요. 그래서 더 열심히 하려고요. 무엇보다 언니가 디자이너로써 갖고 있는 태도가 제일 부러워요. 멋있어요, 언니."


갑작스러운 칭찬에 민망해서 아 뭔 소리야, 나도 멍청이야. 화낸 거 미안해. 하고 조용히 넘겼다. 분명 정도 알고 있었다. 사회적으로 나 또한 자기와 동등한 위치라는 걸. 나도 썩 별 볼 일 없고, 밖에 나가면 한주먹거리도 안 되는 그저 작고 예민한 애라는 걸. 그럼에도 정은 그 당시 어떤 시기나 질투 하나 없이 나를 존중해주곤 했다. 서툰 자격지심에 찌든 나로선 미안하지만 그 칭찬이 썩 달갑진 않았다.






정을 만났다.

몇 년 만인지도 모를 시간이 흘렀어도 수많은 인파 속에서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여전히 사람 좋은 미소를 띠며 길게 휘어지는 눈이 반가웠다. 달라진 거라곤 약간 젖살이 빠진 듯했다. 그녀는 일말의 어색함도 느낄 새 없이 지극히 일상적인 이야기들을 늘어놓았다. 덕분에 불편할 것 같던 정과의 재회가 조금은 편안해지고 있었다. 너무 아무렇지 않게 동고동락하던 때로 돌아간 것 같았다. 순간 얘 설마 결혼하나? 싶어 한숨 섞인 축하를 준비하던 찰나였다.


"언니, 저는 언니가 너무 멋졌어요."

"또 왜 이래."

"언니 퇴사하고 나서 저 혼자 가끔 슬럼프 오거나 막막할 때 언니가 생각나더라고요. 언니 진짜 열심히 했잖아요. 그래서 지금도 디자인하고 계시면 참 좋겠다 생각했어요. “

“안 됐네, 한량으로 만나게 돼서.”

“에이, 그게 더 대단한 거죠! 엄청 용기있는거죠! 그래도 언니 화실 로고랑 인스타 같은 거 다 여전히 디자인하시잖아요. 저 가끔 언니 SNS 염탐하는 재미로 지낸다니깐요. 아, 그리고 언니는...."

"미안한데, 나 그런 사람 아니야."


정의 달콤한 칭찬을 끊은 건 미안하지만, 이제는 내가 나서야 할 차례였다. 정의 기억 속 나는 너무나도 훌륭한 사람이었다. 어쩌면 정이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하나 싶은 압박감이 느껴진 것도 사실이었다. 부담을 떨치기 위해 택한 방법은 그녀의 기억 속 나를 바꿔놓으려는 어리석은 시도였다.




"정아, 나는, 디자인이 싫어. 아니, 경멸해. 나는 내가 했던 그 일이, 그 시간들이 정말로 너무너무너무너무 싫어. 옛날엔 나도 짬이 안 됐으니까 아등바등 기어오른 거야. 뭐라도 해야 하니까. 뭐라도 배워야 하니까. 버티면 뭐라도 나올 거 같으니까. 다른 거 뭐 할 줄 아는 것도 없고, 그냥 서류 한 장에 쓰여있는 전공이 그거였으니까. 근데 나 지금은 진짜 싫어. 포토샵이고 일러스트고 다 지워버렸어. 쥐새끼 발톱만 한 박봉 생활도 지쳐. 나 혼자 서울 와서 가족들한테 떳떳하고 싶은데 막상 그럴싸한 보람도 못 느껴. 머리 좀 차니까 간절함도 없어. 근데 왜 했냐고? 그냥 한 거야, 그냥.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살려고. 우리 고양이들 안 굶기려고. 다른 일 하고 싶어도 당장 마땅한 게 없어서. 나한테 디자인은 이제 더 이상 커리어가 아니야. 잠도 못 자면서 아이디어 짜내기? 스킬 키우려고 따로 공부? 그딴 거 없어. 그냥 오늘내일 밥벌이 수단이었다 생각해. 지금이야 좀 낫지. 이제 내 일이 아니니까. 그나마 홍보용으로 깔짝거리는 거? 야 요즘 세상이 얼마나 좋은데. 만들어진 포맷에 텍스트만 넣으면 그냥 뚝딱. 몰라? 네가 나 좋은 모습만 생각해 주는 건 고마운데 정아, 네가 띄운 비행기에 나 발도 못 디뎌. 그럴 자격 없어."



숨이 가빴다. 오장육부를 토해내듯 울분 섞인 말들만 한가득 쏟아냈다. 엄청나게 뻑뻑한 밤고구마를 물 한 모금 없이 3개쯤 연달아 먹은 듯 속이 꽉 막혔나 보다.

정이 당황을 하든, 날 멀리하든, 이기적이게도 내가 후련하면 그만이었다. 추악한 고백이지만,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타인이 만든 '멋진 나'에서 탈출한 기분이었다. 나 그렇게 꾸역꾸역 버텼다고, 지금도 크게 달라진 건 없는 것 같아 쪽팔리다고. 고구마가 얹힌 것 마냥. 그래서 나는 매일이 힘들었는데 지금도 힘들어 죽겠으니 제발 사이다 한 모금만 달라고 누구에게든 떠들고 싶었나 보다.




"언니... 저도요. 저도 그래요. “


정은 짧은 대답과 함께 슬며시 입꼬리를 올렸다. 정은 날 애써 일으켜 세우려 하지 않았다. 힘도 안 나는데 힘내라며 부담 주지도 않았다. 내 투정에 화를 내지도, 쓸데없이 감성적이지도 않았다. 롤러코스터를 타던 내 속도 정의 덤덤함을 못 이기고 촥 가라앉았다.


"미안. 오랜만에 만났는데."

"이래서 언니가 멋진가 봐요. 언니는 항상 자기 자신한테 솔직하니까.“

"아니, 난 그냥 감정 기복이... 요새 분노 게이지가 막..."

"화 잘 내는 것도 멋진 거예요."


아무래도 정의 기억 속 나를 '안 멋진 사람'으로 바꾸기는 어려울 것 같다.


칭찬 받아먹기에 서툰 편은 아닌데 유독 정의 칭찬은 과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칭찬에 걸맞은 사람이 되라는 법은 처음부터 없었다. 그녀 또한 그럴 의도로 내뱉은 칭찬이 아니었을 테니. 결국 '고마워.' 한 마디를 마지막으로 당 떨어진다며 에그타르트 하나를 더 사 왔다. 회사 다닐 때 너 이거 좋아했었잖아. 기억나. 에그타르트. 슬쩍 밀어주니 사람 좋게 휘어지는 눈. 여전히 사랑스럽다.

20대의 싱그러움보다는 30대의 노르스름 익어버린 빛깔이 조금은 더 마음에 들었다.

다만 우리는 그저 이 어설프고 아슬아슬한 청춘 속에서 함께 견뎌냈고, 함께 서있을 뿐이다.


때로는 꽃밭에서,

그리고 때로는 빗 속에서.








매거진의 이전글이름 없는 꿈의 달콤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