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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람지 May 11. 2018

금메달의 현장:
리우올림픽 여자양궁 관람기

어쩌면 인생 한번뿐인 경험. 과녁에 꽂히는 황금빛 화살을 목격하다 

 이번 글을 시작하려면 일단 자랑부터 해야 될 것 같다.

 "나 리우올림픽 여자 양궁 단체전 봤다! 금메달 따는 거 봤다! 우리나라 선수들이랑 사진도 찍었다!!!"

라고. 

 그 부러운 이야기를 지금 시작하려고 한다. 

리우올림픽 티켓.

 애초에 여행을 계획할 때, 리우올림픽을 염두에 두고 일정을 짠 것은 절대 아니었다. 단지 2016년 6월 1일에 멕시코에서 여행을 시작하여 8월 중순쯤에 브라질을 마지막으로 돌아오자고 생각한 건 순전히 동선 때문이었다. 그런데 딱 8월에 리우에서 올림픽이 열린다니! 그 소식을 들었을 때까지도 그냥 "혹시 올림픽을 볼 수 있을지도 몰라" 하는 막연한 기대만 했을 뿐이었다. 


 브라질에 도착한 순간까지도 나는 올림픽 티켓을 결제하지 않은 상태였다. 한정된 예산과, 무엇보다도 신용카드 분실 때문에 올림픽 경기를 보러 갈까 말까 고민을 했는데, 우리 언니가 이렇게 말했다. 

 "내가 결제해줄 테니까 꼭 보고 오렴! 외국에 가서 올림픽을 관람하는 기회가 살면서 몇 번이나 오겠어."

 그렇게 언니의 너그러운 이해 덕에, 언니 카드로 여자 양궁 단체전 관람권을 지르고 말았다.


 굳이 여자 양궁 경기를 고른 이유를,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설명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여자 양궁은 대한민국이 8회의 올림픽 내내, 즉 32년 내내 단 한 번도 금메달을 놓친 적이 없는 종목이었으니까. 단 하나의 경기만 봐야 한다면, 기분 좋게 우리나라가 올림픽을 따는 감격스러운 현장을 목격하고 싶었고 의심의 여지 없이 금메달을 딸 거라고 자신할 수 있는 종목이 바로 양궁이었다. 

 집 근처 General Osorio 역의 모습. 올림픽을 맞아서 무빙워크 옆의 바닥을 마치 수영장 경기 레인처럼 꾸며놓았다. 완전 마음에 드는 아이디어. 실제로 무빙워크 대신 이 수영장 바닥을 걸으며 마치 진짜로 수영을 하듯 팔을 허우적거리면서 즐거워하는 외국인 관광객들도 많이 보였다.  

 양궁 경기장은 Sambodromo. 이름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본래는 리우 카니발이 열릴 때 삼바 댄서들이 행진하는 삼바 공연장이다. 공연장에서 가장 가까운 지하철역인 Praca Once에 내리니, 길을 잃으면 어쩌나 걱정할 것 하나도 없이 곳곳에 경기장을 알려주는 표지판과 자원봉사자, 경찰들이 촘촘한 간격으로 길을 안내한다.


 현장에서 티켓을 구매할 수 있는 부스도 있다. 나는 미리 티켓을 출력해 왔으므로 패스. 

 세계 각국의 깃발들을 보니 마음이 두근거린다. 내가 진짜로 올림픽이 열리는 도시에 있다는 게 실감이 난다. 

입장을 기다리는 사람들. 생각보다는 줄이 길어서 놀랐다.
경기장에 들어가기 전에 가방 검사와 몸 수색부터 해야 한다.

Rio 2016!

이번 리우 올림픽은 그 어떤 때보다도 폰트 디자인을 잘 했다는 생각이 든다. 전 세계인이 '브라질' 하면 떠올릴 법한 삼바의 리듬이나, 아마존 삼림 등 원시적인 리드미컬함을 잘 담아낸 듯하다. 

 양궁 경기장의 파노라마샷. 본래 삼바축제 퍼레이드 장소로 쓰이는 만큼 경기장이 정말 길다. 지정된 좌석이 있는 게 아니라 섹션별로 티켓 값이 나뉘는데, 다행히 양궁 경기 티켓 가격은 크게 비싸지 않아서 선수들을 가까이서 볼 수 있는 좋은 자리에 앉았다.

 녹색이 가득한 리우 2016 올림픽 경기장. 선수들이 대기하는 웨이팅라인과 활을 쏘는 슈팅 라인이 자리와 매우 가깝다.

 경기가 시작되기 전, 기다리는 관중들을 위해 삼바 댄서들이 나와 춤을 춘다. 어쩌면 엉덩이가 저렇게 현란하게 움직일까? 전광판을 통해서 관객들에게 간단한 삼바 스텝을 알려주기도 한다. 나도 열심히 따라했다. 

 오늘 나의 패션은 점점 더 길이가 길어지고 숱이 많아지면서 감당 못하게 된 머리칼을 질끈 묶어 더더욱 원시적으로 변하고 있는 머리스타일 + 전날 산 리우올림픽 공식 기념품인 노란색 민소매 티셔츠. 와서 생각해보니 한국팀을 응원할 수 있을 만한 패션을 입었으면 좋았겠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개최국을 상징하는 옷을 꼭 사고 싶었다.

 

 혼자 경기를 보러 가면 아무래도 좀 외로울 것 같길래, 일부러 한국인들이 많이 보이는 곳으로 가서 자리를 잡았다. 딱 우리 가족처럼 딸만 둘인 교민 가족들이 보이길래 다가가서 "옆에 앉아도 돼요?" 하고 물었다. 나처럼 올림픽을 보기 위해 브라질까지 온 사람도 있고, 브라질에 살고 있는 교민들도 많은 듯했다. 워낙 효자종목인만큼 한국인들은 열띤 응원을 했다. 

 멕시코를 응원하는 관중들.

 경기는 준준결승-준결승-결승을 연이어 했다. 멕시코는 준준결승에서 탈락했지만, 그 사실이 이 열정적인 국민들의 사기를 꺾지는 못하는지, 멕시코 관중들은 끝까지 경기를 지켜보며 '아무나 이기는 팀(?)'을 열심히 응원했다. 

 멕시코 대 대만의 경기. '대만'이라는 명칭을 올림픽에서 사용할 수가 없어 'Chinese Taipei'로 표기한다는 사실도 이날 처음 알게 됐다. 결과는 대만의 승.  

 나를 찍고 있는 카메라멘 아저씨. 저 카메라 렌즈에 비치는 모습이 그대로 곧바로 경기장 전광판에 나타나게 된다. 그런 아저씨를 찍고 있는 나. 

 드디어 한국 선수가 나올 차례다. 장혜진, 기보배, 그리고 최미선 선수. 그리고 상대는 일본이다.


 경기는 역시 한일전이지. 사실 평소에 별다른 반일 감정이 없다가도 경기장에서 일장기를 펄럭이며 큰 목소리로 일본어로 뭐라뭐라 응원을 하는 일본인 관중들을 보자 괜히 심기가 거슬리는 특이한 경험(?)을 했다.


 결과는 당연히 한국의 승리였다.

 사실 그 동안 어렸을 때부터 쭉 올림픽 양궁 경기 생중계를 TV로 보면서, 나는 활시위를 당길 때의 팽팽한 긴장감 때문에 온몸을 달달 떨면서 입을 틀어막고 봤었다. 혹시나 잘못 날아가서 낮은 점수에 꽂히지 않을까, 우리나라 선수가 실수했는데 상대 선수의 화살이 10점을 내는 건 아닐까 해서. 그리고 저걸 실제로 현장에서 보면 얼마나 더 떨릴까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막상 생중계로 관람한 느낌은 정반대였다. TV로 볼 때와는 긴장감이 전혀 없었다. TV로 볼 때는 몰랐는데, 직접 내 두 눈으로 선수들의 표정과 몸짓, 활을 쏠 때의 자세를 보니까 다른 나라의 선수들과는 확연히 다른 한국 선수들만의 여유가 돋보였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나만의 느낌일 수도 있지만 오히려 다른 선수들의 활 쏘는 자세가 불안해 보였고, 반면 한국 선수들의 폼은 훨씬 안정감이 있어서 "아, 이 경기는 우리가 이기지 않을 수 없겠구나." 하는 여유만만함으로 관전을 할 수 있었다. 

 이어서 대만(Chinese Taipei)이 준결승에 진출한다.


 안타깝게도 사진을 찍지 못했지만, 대만과 한국의 준결승 경기에서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명장면이 나온다. 

 양궁 경기에서는 각 팀이 총 6발을 쏘는 것이 한 세트인데, 한국선수 3발-대만선수 3발-한국선수 3발-대만선수 3발의 순서로 쏘게 되었다. 그런데 첫 3발에서 세 선수가 모두 10점을 명중시키는 것이 아닌가. 관중석은 완전 신이 났고 장내 아나운서도 "트리플 텐!"을 목청껏 외쳤다. 그리고 다시 돌아온 한국 팀 순서에서 한국 선수들은 또 다시 세 선수 모두 10점을 명중시켰다. 한 세트의 6발 모두 10점을 명중한 것이다. 관중석은 완전히 난리가 났다. "퍼펙트 텐!" 장내 아나운서는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삼바 음악이 울려퍼지고, "꺄아아악!" 세 여자 선수들의 멋짐에 단단히 취한 나도 비명을 질렀다.  


 한국 팀의 압도적인 실력에, 경기를 관람하러 온 각국의 관중들은 점점 한국 응원단에 합세하기 시작했다. 

 드디어 결승전. 결승전은 러시아와 치르게 됐다.

 다른 두 선수들은 올림픽 첫 출전이지만 아마 기보배 선수는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적이 있는 선수이기 때문에, 양궁에 관심이 많은 관중들 몇몇은 그녀의 활약을 기대하는 듯했다. 내 주위의 외국인 관중들이 "이즈 쉬 키보배?" "오우... 키보배..." 하고 대화를 나누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결과는 한국 팀의 승리!
신이 난다 신이 나


 메달 시상식에 앞서서 또다시 흥겨운 삼바가 연주된다. 댄서들이 현란한 발재간을 보이면서 행진한다. 삼바라는 문화적 자산을 갖고 있어서 브라질은 얼마나 운이 좋은지. 문화가 풍부할수록 올림픽처럼 온 세계가 모이는 자리에서 자부심을 갖고 내세울 수 있는 아이덴티티가 많겠구나, 싶었다. 

 시상대 가장 높은 곳에 올라서 금메달을 목에 걸고 환하게 웃는 선수들을 보니까 기분이 너무 좋다. 

애국가도 목청껏 따라불렀다. 

너무나도 환하게 웃는 우리나라 선수들.

언니들이 좋으면 나도 좋아요!

 TV에서나 보던 빅토리 세레머니를 눈 앞에서 보고 있다니. 나도 믿기지가 않아 내내 싱글벙글했다. 

 이대로 그만 들어가나 싶었는데, 선수들이 기자들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낯익은 한국 방송사의 로고가 보인다. 아하, TV에서 보던 경기 직후 선수 인터뷰를 이런 식으로 하는 거였구나. 

 그런데 오늘 함께 경기를 관전한 모든 한국인 관중들이 모두 내 쪽으로 모이기 시작한다. 왜지? 왜 모이는 거지? 싶었는데, 다들 하나둘씩 핸드폰의 카메라를 켜고 펜스 앞으로 바짝 몸을 기울인다. 바로, 우리 선수들과 사진을 찍기 위해서란다. 그렇다면 나도 꼭 찍어야지! 나도 질세라 펜스 쪽으로 다가갔다.

 인터뷰가 마무리되기 무섭게 한국인 관중들이 외친다. 

 "장혜진 선수! 최미선 선수! 기보배 선수! 같이 사진 좀 찍어주세요!"

 "경기 보려고 한국에서부터 브라질까지 날아왔어요!"

 각자 꼭 사진을 찍어야 하는 이유를 열심히 어필하기 시작한다. 그러자 다른 한 켠에서는 어떤 교민이 이런 귀여운 볼멘소리를 한다. 

 "아니 그럼 나는? 이 경기 보려고 브라질에서 태어났다고 외쳐야 하나?"

 우리의 간절한 외침을 들은 선수들이 가까이 다가왔다. 꺅! 속으로 비명이 터진다. 이 사진 속 이마의 주인공은 바로 장혜진 선수다. 내 바로 앞에 선 한 관객과 사진을 찍고 있길래 쿵쾅거리는 심장을 간신히 부여잡고 내 핸드폰을 내밀었다.

 "저도요! 저도 같이 사진 찍어 주세요."

 그리고 장혜진 선수와 눈이 마주친 순간, 정말로 심장이 멎는 듯했다. 

 그리고, 그리고...

 짠! 이런 역사적인 투샷이 탄생했다.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와의 셀카라니. 나 오늘 정말 계 탔다고, 멀리까지 여행을 온 보람이 있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단 한 장의 사진. 아무래도 나중에 내 아이에게도 두고두고 보여주면서 자랑을 할 것 같다. 

 세상에. 장혜진 선수 한 명과 사진을 찍은 것으로도 족하다고 생각하려 했는데, 뒤이어 양궁 세계랭킹 1위에 빛나는(2016 올림픽 당시에 1위였는데,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다.) 최미선 선수가 관중석 가까이 와 주었다. 또 이 기회를 놓치기 싫어서 열심히 앞으로 달려갔고, 최미선 선수는 친히 금메달까지 들어 보여주었다. 근데 우리나라 선수들 왜 이렇게 다 예쁜 거지?

 뒤에서 부러운 듯 쳐다보는 빨간 티셔츠 청년이 시선을 강탈한다. 


 물론 기보배 선수도 인터뷰를 마치고 가까이 와 주었고, 관중들과 사진을 찍어 주었다. 기보배 선수와도 셀카 찍기에 성공해서 트리플 금메달 셀카를 남기리라, 하고 생각하고 또 기보배 선수 쪽으로 열심히 달려가는데, 안타깝게도 간발의 차이로 기보배 선수를 놓치고 말았다. 


  나도 경기장을 나와서, 오늘 오후 내내 내 옆에 앉아 계셨던 한국인 가족분들의 아버지꼐 사진을 부탁드렸다. 

 그 어느 올림픽보다도 내게 짜릿한 기억으로 남을, 나의 첫 올림픽 Rio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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