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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람지 Jun 19. 2018

부에노스아이레스에 가기 전
이 영화를 보았더라면

왕가위의 <해피투게더>,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대한 완벽한 찬가

*영화 <해피투게더>(왕가위 감독, 장국영/양조위 주연)의 자세한 줄거리가 포함돼있습니다. 


부에노스 아이레스.

 내가 2년 전 남미로 여행을 떠날 때, 떠나는 D-day를 세면서 나를 가장 많이 설레게 하고, 또 가장 큰 환상을 품게 했던 도시였다.

 

 여행을 준비하던 당시의 나는 내가 갈 남미 9개국 각각을 다룬 영화를 최소 한 편씩 관람하고 있었다. 부에노스아이레스를 다룬 영화는 뭐가 있을까? 아는 게 별로 없어서 제목에 '부에노스아이레스'가 들어가는 영화부터 검색했다. 그렇게 해서 보게 된 영화가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사랑에 빠질 확률>과 <부에노스아이레스 탱고 카페>였다. 아, 유명한 탱고 음악이 나온다 해서 미국 영화지만 <여인의 향기>까지도 봤던 것 같다. 솔직히 말하자면, 두 영화 모두 부에노스아이레스란 어떤 도시냐를 향한 내 물음에 답을 주진 못했다.


 '역시 백문이 불여일견인 건가? 그래, 영화 말고 직접 내가 가서 보고 느끼자.' 하고, 그렇게 속 시원한 영화 감상은 하지 못한 채 나는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닿았다. 

 

 부에노스아이레스는 역시 나의 상상대로 아름답고 관능적인 곳이었고, 거기에 속수무책으로 압도된 촌스런 한국 소녀였던 나는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의 7일을 때때로 기가 죽기도 하고 때때로 멍하니 황홀경에 빠져 있다가 왔다. (잘 쓴 여행기는 아니지만, 내가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무엇을 봤고 뭘 했는지는 아래의 매거진에서 확인할 수 있다.)

https://brunch.co.kr/magazine/sudamerica72


 그 아름다움과 화려함에도 불구하고,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내가 느낀 또 하나의 중요한 감정은 '쓸쓸함'이었다. 외로움. 내가 이방인이라는 느낌. 아니, 여기에 있는 모두가 이 도시의 이방인이라는 느낌. 섹시한 탱고와 웅장한 자태를 뽐내는 건물 말고도 이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쓸쓸함을 완벽하게 묘사할 수 있는 영화는 아마도 없을 것만 같았다. 


 그러다가 이제서야, 며칠 전에서야 <해피 투게더>를 봤다.

아, 내가 왜 이걸 이제 봤을까. 왓챠 앱에서 내게 "더 이상 미루지 말고 보셔야 할 영화"라고 추천할 때 진작 볼걸, 왜 괜히 미뤘을까? 영화 속에 내가 가고 싶어했던 탱고바 Bar Sur가 나온다는 사실을 뻔히 알고서도 왜 보지 않았을까?


왜 이렇게 후회하냐고?

왜냐하면, <해피 투게더>의 인물들의 부에노스아이레스는, 내가 느낀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평행우주 같았거든. 영화 속 보영과 요휘처럼, 때로는 아슬아슬하게 빗겨나며 서로 닿을 수 없는 평행선을 달리다가도 때로는 접점을 만나며.


 요휘(양조위)가 도어맨으로 일하며 매일 밤 지친 얼굴로 중국인 단체 관광객을 호객하던 탱고바 바르 수르(Bar Sur). 이 바가 있는 곳이 바로 내가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의 일주일 간 묵었던 산텔모(San Telmo)였다. 

 나도 꼭 이 곳에서 탱고 쇼를 보리라, 하고 다짐하며 라바예 거리로 표를 사러 갔건만, 표가 없다고 했다. '표가 없다'니, 그게 무슨 뜻일까. 스페인어가 유창하지 못해서 탱고쇼는 열리지만 표가 다 팔려서 없다는 건지, 아니면 내가 여행하는 동안에는 탱고쇼를 전혀 하지 않는다는 뜻인지 그 정확한 의미는 여전히 모른다. 


 매일 아침, 쥐 죽은 듯 조용한 산텔모의 골목을 거닐다가 당연히 아침이니만큼 쥐 죽은 듯 텅 빈 바르 수르 앞을 지날 때마다 아쉬운 군침을 삼켰어야 했다. 

 

왼쪽은 내가 카페 토르토니에서 본 탱고, 오른쪽은 영화 속 Bar Sur의 탱고.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나는 탱고 쇼를 두 번이나 봤다.  

  거지 배낭여행자 주제에 꽤 거금을 들인 탓에, 두 번 다 앞자리에서 관람을 했고, 그 덕분에 댄서들의 붉게 충혈된 눈자위까지도 볼 수 있었다.

 이들은 낮에는 무엇을 할까? 매일 밤 똑같은 춤을 춘다는 것에 지겨워하고 있을까? 한낮에는 어느 땀내나는 연습실에서 열심히 탱고 연습을 하고 있을까? 아니면 낮잠을 잘까?


 <해피투게더>의 공간적 배경은 뭐니뭐니해도 이 작고 구질구질한 요휘의 방이다. 

 혼자서만 살아도 답답하고 부족할 이 공간에 보영이라는 짐짝이 찾아와 침대를 차지하고 어리광을 부린다.

 나도 그랬다. 나도 보영과 같았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내가 묵은 곳은 여행자들을 위한 게스트하우스도, 호텔도, 기꺼이 자신의 집을 내어주는 카우치서핑 호스트의 집도 아니었다. 나는 생면부지의 외간남자 후안의 코딱지만한 단칸방에서 일주일을 보냈다. (자세한 사정은 여행기 매거진에 적었으므로 생략한다. 오해의 소지가 다분히 있는 문장이지만, 후안과는 '아무 일' 없었다.)


 처음 후안의 공간을 보고 깜짝 놀랐던 기억이 난다. "아니, 이렇게 열악한 공간에 내가 폐를 끼쳐도 될까.." 

 요즘 한국의 청춘들이 사는 작은 원룸도 열악하다, 살 곳이 못 된다며 문제가 많은데 이 곳은 더해보였다. 화장실도, 취사 시설도 딸려있지 않은, 정말 달랑 '방'이었다. 그 안에 놓인 책상 하나, 여러 얇은 담요를 겹겹이 겹친 싱글침대 하나, 그리고 옷장 하나. 화장실과 부엌은 나머지 세입자들과 공용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홍콩에서 건너온 영화 속 요휘, 그리고 콜롬비아에서 건너온 내 친구 후안. 두 사람 모두 늦은 밤까지 바에서 일한다.

 후안의 직업은 바 웨이터. 밤마다 일을 나갔다. 그리고 싱글대디. 주말에야 귀여운 어린 딸을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후안의 나이는 고작 서른 살. 아직 푸르디 푸른 청춘. 이 공간은 콜롬비아에서 건너와 웨이터라는, 특출난 재주 없이도 될 수 있지만 그로서는 아마 힘들게 잡은 이 일을 하고 있는 고달픈 후안의 삶의 유일한 안식처일 테지.  그리고 그 건물에는 옆 칸에도, 옆옆 칸에도, 전부 후안과 같은 새파랗게 젊은 청춘들이 각자의 방에 몸을 누이고 있었다. 


 이 단칸방 아파트에 비하면, 한국의 고달픈 청춘들이 몸을 눕히는 대학가의 원룸들은 좋은 편이라고 해야 할까? 적어도 자기만의 화장실과 부엌이 있으니 저들에 비하면 등 따시고 배 부른 거라고 해야 할까? 

 누군가 그렇게 묻는다면 나는 회의적이다. 작은 방 안에 사람이 혼자 있어도 죽지는 않을 만큼의 최소한의 시설이 갖춰져 있어서, 우리는 더 그 좁은 방에 외롭게 갇히는 것 같다. 적어도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청춘들은 부엌에서 부대껴 요리를 하면서 사람 냄새를 맡고 서로의 안부를 물을 수 있잖아. 혼자라는 느낌은 느끼지 않아도 되잖아.

 좁은 부엌에 사람이 미어터지니 식기와 개수대는 늘 더럽다. 내 껀 니 꺼, 네 껀 내 꺼라는 식으로 식기가 뒤섞인다. 옆방 사람이 내가 고약하게도 싫어하는 음식을 해먹는 꼴도 봐야 한다. "중국 음식은 꼭 그따위로 만들어야 한다니?" 옆방 아주머니의 귀 찢어지는 시비도 거칠게 받아치면서. 

 다들 잠든 야심한 밤, 후안네 공동 부엌을 몰래 서성였던 기억이 난다. 호기심에 열어 본 찬장에는 정말 놀라울 정도로 번듯한 식재료가 없었다. 싸구려 시리얼과 계란 몇 개가 다였던 것 같다. 냉장고 위에는 이상한 표가 그려진 종이가 붙여져 있었다. '당번표'였다. 세입자들끼리 바닥 청소는 월요일엔 누구, 화요일엔 누구, 설거지는 수요일엔 누구, 목요일엔 누구... 하고 순서를 번갈아가며 부엌을 관리하는 모양이었다.

 부디 이 청춘들에게 더 나은 미래가 있길 바랐다.  


 배고파 죽겠다며 어리광을 부리는 보영(장국영). 그리고 '아픈 사람에게 요리를 해달라니 제정신이냐'며 화를 내는 요휘(양조위). 그래도 요휘는 덜덜 떨리는 몸을 담요로 감싸고 나가서 후라이팬에 계란을 달달 볶는다. 결국엔 해줄 거면서. 제 몸이 아파 쓰러질지언정 보영을 위해선 해줄 거면서. 아마 보영도 그런 줄 알고 애교를 떨었겠지.

 손을 다친 보영에게 밥을 떠먹이는 요휘의 눈빛은 무심한듯 따뜻하다.

 누군가를 위해 요리를 해준다는 것은 특별한 일이다.

 사랑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철없는 어린애같은 보영. 경마장에서 달리는 말들을 보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저런 경마장이 있나?' 궁금증이 들어 검색해보니 팔레르모에 경마장이 있단다. 그걸 미리 알았더라면, 이 영화를 먼저 보았더라면, 나도 한 번쯤 가볼 걸 그랬어. 나는 신나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보영의 모습이었을까, 아니면 경마에는 무심하게 앉아 그런 보영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요휘였을까?


왕가위 감독도 이걸 의도했는지, 아니면 나만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이 장면을 보면서 그 유명한 탱고곡 <Por Una Cabeza>가 떠올랐다. 영화 <여인의 향기>에서 알 파치노가 탱고를 췄던 바로 그 곡이다. 말 경주에 인생과 사랑을 빗댄 노래인데, Por Una Cabeza는 직역하면 '(말) 대가리 하나로'라는 뜻이다. 내용인즉슨, 결혼을 위해 돈이 필요한 한 남자가 가진 모든 돈을 경마에 걸었다. 하지만 자신이 배팅한 말이 대가리 하나 차이로 1등을 놓치고 만다. 그래서 다시는 경마를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지만, 노래의 마지막에는 다시 한번 준마가 나타난다면 어쩔 수 없이 또 경마를 하게 될 것이라고 노래한다.


간발의 차이로 준마가 결승점에 늦게 도착하며

이렇게 말하고 돌아서는 듯하네요:

형제여! 잊지 말아요. 알다시피 게임을 해서는 안 돼.


간발의 차이로, 딱 하루 미소지으며 사랑을 맹세하고

내 모든 사랑을 화롯불에 불태우는 거짓말쟁이


더 이상 경주는 없어요. 승부는 끝났어요.

접전의 결과는 다시는 보지 않을 거예요.

그러나 어떤 준마가 일요일에 나타나면

내 모든 걸 걸겠어요. 어쩌겠어요...

                                                                         -<Por Una Cabeza>



좁고 초라한 방, 그리고 둘만 남은 허름한 부엌에서 탱고를 추는 보영과 요휘.

탱고의 원래 기원을 생각한다면 아마 두 사람은 탱고에 가장 어울리는 사람일지 모른다.

탱고는 본래 항구도시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정착한, 가난한 이민자들이 외로움을 달래려고 남자끼리 추던 춤이었기 때문이다.


요휘에게 "자꾸 마지막 스텝을 까먹는다"고 면박을 주다가도, 결국엔 부엌에서 끈적하고 느릿한 탱고를 추다가 서로의 몸을 더듬으며 진한 키스를 나누는 두 사람. 저 순간만은 지구의 유일한 공간이 되고 두 사람만이 이 세상의 주인공이 된다. 


이어지는 장면에서, 요휘는 Bar Sur(바르 수르) 출입문에 쪼그리고 앉아 있다. 바 안에서는 탱고 댄서들이 춤을 추고 있다. 비록 그는 겉보기엔 저 가게 안의 화려하고 우아한 탱고와 어울리지 않는 사람처럼 보일지 몰라도, 비록 가난하고 눈에 보이지도 않는 하찮은 외국인 노동자일지라도, 보영과 함께 있으면 그 순간만은 "해피 투게더"인데.

 

<해피 투게더>에서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여러 가지 면모들 중에서도 쓸쓸하고 을씨년스러움이 유독 부각된다. 유래부터가 이민자들의 도시인 것과도 관련이 있고, 당연히 이 도시의 이방인인 보영과 요휘의 처지와도 관련이 있으리라. 나 역시도 이 커다란 도시에 나만 뎅그러니 놓여진 것 같은 기분이 매일같이 들었었다.


보영이 요휘를 억지로 끌고 아침 조깅을 하던 저 커다란 다리. 저 다리, 사실 나도 버스를 타고 건너본 적이 있는 것 같다. 산텔모에서 라 보까에 가기 위해 버스를 탔는데, 내려야 할 곳을 지나치는 바람에 저 커다란 대교를 한참을 달려 건너편에서 겨우 내렸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오직 무지막지하게 큰 선박과, 수백 수천 개의 컨테이너 뿐. 나를 도와줄만한 사람이 아무도 보이지 않아서 얼마나 막막했는지 몰라. 나는 그 위에서 길을 잃고, 너는 몸살을 얻었구나.


"오다 주웠다" 식의 츤데레의 정석, 요휘.

그가 다시 한번, 이번엔 다른 사람에게 요리를 해 주는 장면이 나온다. 관객으로선 자연스레 앞서 보영에게 요리를 해 줬던 장면을 떠올릴 수밖에 없는 순간이다. 

요휘는 이번에는 타이베이 출신의, 같은 식당에서 일하는 귀요미 청년 창을 위해서 만두를 해 준다. 요휘에게 보영 말고도 또 다른 신경쓰이는, 아니 최소한 이름을 알고 있는 존재가 생기는 순간.

앞서 '누군가를 위해 요리를 해준다는 뜻은, 그 사람을 사랑한다는 뜻'이라고 내가 말했던가. 요휘가 진짜로 창을 사랑해서 요리를 해줬다고 보긴 어렵겠지만 창으로 하여금 요휘가 자신에게 마음이 있다고, 최소한 싫어하진 않는다고 생각하기엔 충분한 일이었다. 


여권이 어디있냐며 요휘에게 역정을 내는 보영.


너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여권을 잃어버렸구나? 나도 그랬는데.

정확히 말하면 여권을 도둑맞은 곳은 칠레였지만, 한국 대사관에 찾아가서 새 정식 여권을 발급받은 곳이 바로 이곳 부에노스아이레스였다.

약간은 실망스럽게도, 대사관 직원은 친절하지 않았다. 여행 중 최대의 사고를 겪은 후 이 곳을 찾은 내게 '곧 우리 점심시간이니 빨리 서류를 작성해라' 하고 말했을 뿐. 몇날며칠을 마음을 졸인 끝에 찾아간 곳에서, 유일하게 이 도시에서 한국어로 누군가 대화를 할 수 있는 이 곳에서 약간이나마 위안을 얻고 싶었는데. 그 직원에게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왔다 가는 민원인에 불과했나봐. 하긴, 여권 재발급이 가장 흔하고 하찮은 대사관 방문 사유 아니겠어. 



때때로 산텔모의 작은 방구석 안에서, 

나는 바깥 세상이 무서워서 외출 시간을 미루며 한참 밍기적거린 날이 많았다.

진작에 아침에 일어나 씻고 화장하고 옷을 입은지는 한참 됐으면서도.

길거리로 나서면 느껴질 낯선 공기, 낯선 냄새, 낯선 언어와 내게 꽂히는 호기심어린 시선이 무서워서 말이다.

바깥 세상이 무서워서 오전에 한참 밍기적거린 때도 많았다. 

보영과 요휘도 그랬을까? 그래서 징글징글한 서로를 보내지 못하고 엉겨붙었던 걸까. 

보영도 떠나고, 창도 우슈아이아로 떠난단다. 

도무지 이 곳 부에노스아이레스에는 오래 머무는 사람이 없다. 요휘도 창이 건넨 녹음기에 슬픔을 떠나보낸다.



보영이 다시 요휘에게로 돌아오지만, 요휘는 이미 이과수를 향해 떠난 후다.

요휘가 일하던 탱고바에서 무작정 요휘를 기다리다 마주한 탱고 댄서와 함께 춤을 추는 보영. 그러나 그가 머릿속으로 생각하는 것은 허름한 방구석에서 함께 꼭 부둥켜 안고 춤을 추던 요휘다.

요휘의 물건이 남겨진 그의 방에서 그의 물건을 껴안고 보영이 운다. 그러게 있을 때 좀 잘하지 그랬어.

영화의 초반부, 이과수 폭포 램프를 바라보는 요휘(왼쪽)과, 영화의 끝부분에서 폭포 램프를 바라보는 보영(오른쪽). 이과수 폭포는 두 사람의 이상향, 혹은 둘의 사랑이 결실을 맺어야 할 장소였는지 모른다.

램프 속에 그려진, 폭포를 구경하고 있는 두 사람.(왼쪽) 그 그림을 보러 요휘는 수백 번도 더 그 그림속의 두 사람이 자신과 보영이 될 날을 꿈꾸었을 것이다. 그러나 정작 그렇게 꿈꾸고 꿈꾸었던 이과수 폭포에 지금 요휘는 혼자 와 있다(오른쪽). 꼭 둘이 가기로 하던 곳이었는데. 너와 함께 가고 싶었던 곳인데. 혼자 와버렸다. 와 보니 혼자였다. 그렇게 돼버리고 말았다. 

요휘는 이과수 폭포에 닿았고, 창은 세상의 끝 우슈아이아에 닿았다. 그 등대에 창은 요휘의 슬픔이 담긴 녹음기를 두고 왔고, 우연히 대만의 랴오닝 야시장에서 밥을 먹던 요휘는 창의 사진을 보고 그곳이 창의 가족들이 하는 식당임을 알게 된다. 

"창이 그렇게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는 이유를 알았다. 그에겐 언제나 돌아갈 곳이 있었기 때문이다. 창을 만나지는 못했지만, 이제는 어디로 가야 창을 찾을 수 있을지는 안다."


내가 여행 계획을 짤 때에도, 꼭 세상의 끝인 우슈아이아에는 꼭 가보고 싶었다. 하지만 일정과 예산이 허락하질 않았지. 하지만 이 세상의 모든 멋진 곳을 한 번에 전부 방문할 수 있다면 그건 너무 시시할 것이다. 우슈아이아는 나 역시 마음이 무너졌을 때, 인생 최후의 여행지로 남겨 둬야지. 

나도 부에노스아이레스를 밤에 떠났다. 버스를 타기 위해 레띠로 터미널에 가는 그 길, 화려한 대로의 불빛과 함께 진하게 남던 아쉬움이 아직도 기억이 난다. 부에노스아이레스를 떠나서 가는 바로 다음 행선지가 이과수 폭포였다. 꼭 요휘처럼. 보영은 이과수 폭포에 뒤늦게 혼자서라도 갔을까?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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