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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람지 Sep 16. 2017

숨이 차다, 숨이 벅차다.
페루 와라즈 트래킹

고산병 때문에 숨이 막히는 설산에서 인생을 예찬하다


리마를 떠나 와라즈로 향한다.

와라즈는 69호수 트래킹으로 유명한 곳이라서, 나도 오로지 69호수 트래킹만을 위해 와라즈를 찾았다.

와라즈로 가는 길, 크루즈 델 수르 버스에서 내다 본 바깥 풍경. 

페루는 여전히 나에게 어쩐지 조금 휑한 나라로 기억될 것 같다.


 와라즈에서 내가 묵은 숙소는 Ebony Hotel. 

평소처럼 도미토리 호스텔에 묵을 수도 있었지만, 왠지 트래킹처럼 힘든 액티비티를 해야 하는 여행지에서는 혼자서 객실을 쓰고 싶었다.

 에보니 호텔은 소박한 호텔이지만, 그래도 저렴한 가격에 혼자서 깨끗하고 푹신한 침대와 따뜻한 물이 잘 나오는 화장실을 이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에보니 호텔에 짐만 풀고서 바로 밖으로 나갔다. 바로 내일 새벽에 할 69호수 트래킹을 예약하기 위해서 아킬포 호스텔로 갔다. 아킬포 호스텔에 대한 정보는 이미 한국인들 사이에서 너무 유명하므로 생략.

아킬포 삼형제 중 한 명인 사람이 나를 맞이했다. 69호수에 가고 싶다고 말했더니. 아주 심각하게 말한다.

 "거기에 갈 자신이 있는 거 맞아? 말해 봐. 너 와라즈에 언제 도착했어?"

 "음... 두어 시간 전?"

 "그럼 안 돼. 절대 안 돼. 가지마. 69호수 트래킹하다가 죽은 사람도 있어. 네가 여기 와서 하룻밤이라도 자면서 고산지대에 적응했다면 모를까, 바로 몇 시간 후 새벽에 떠나는 트래킹을 보낼 순 없어."

 내가 그럼 어쩌면 좋겠냐고 묻자, 아저씨는 다른 트래킹 코스를 추천했다.

 "여기가 69호수보다 훨씬 예뻐. 69호수가 더 유명하다 뿐이지. 물론 여기는 69호수보다 훨씬 가파르고 올라가는 길이 험하지만, 그래도 69호수보다는 트래킹 시간이 짧아."



 결국 아킬포 브라더의 일리 있는 설득에 나는 그 투어를 예약했다. Laguna Paron이라는 이름의 석회호수를 둘러싼 산 트래킹 코스. Paramount valley라는 이름으도로 잘 알려져 있다. 그 아킬포 브라더가 내게 그 산의 모습을 따서 영화사 파라마운트의 로고를 만든 거라며 강력 추천했기 때문.

 아킬포 브라더가 내게 내민 한국어로 된 트래킹 준비물 목록은 보기만 해도 약간 겁이 났다. 고산병에도 대비해야 하고, 체력 고갈에도 대비해야 하고, 기온 변화에도 신경써야 하고, 등산 장비도 잘 갖춰야 하고......

 다시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약국에서 고산병 약(소로치)을 샀다. 와라즈 시내에는 약국이 아주 많으므로 고산병 약은 쉽게 구할 수 있다.

남미에 오기 전부터 벼르고 있던, 남미의 대표 음식, 세비체. 

드디어 페루 와라즈의 식당 El Rinconcito Minero에서 처음으로 시켰다. 메뉴에는 여러 종류의 세비체가 있었는데, 나는 여러 종류의 해산물을 같이 맛보고 싶어 Mixed로 주문했다. 정체모를 생선과 오징어와 새우가 함께 들어 있는. 시원한 망고주스도 함께.

맛은 딱 기대했던 그대로다. 새콤하고 청량한 맛의 회무침. 지금 다시 봐도 또 먹고 싶다. 


새벽 네 시에서 다섯 시 사이. 비몽사몽한 정신에 트래킹할 준비를 하고 호텔 로비에서 픽업 차량을 기다렸다.

픽업 차량에 여기저기서 트래킹할 손님들을 태우고 산으로 출발. 산악 등반 전문 가이드가 따로 있을 줄 알았는데, 아킬포 삼형제 중 한 명이 가이드 역할도 한다.

도중에는 시장에 들러서 시장에서 파는 음식들로 아침식사를 해결하게 해 준다. 나는 일단 따뜻한 퀴노아 차를 마시면서 보는데, 한 가게에서 매우 단순하고 소박한 샌드위치를 파는 걸 봤다. 빵은 겨우 모닝빵만한 크기에 속재료는 아보카도/치즈/계란 중에서 택하는 와라즈 시장 스타일 샌드위치. 어쩐지 구미가 당겨서 하나 달라고 했다.

속재료는 뭘 선택하겠냐고 묻는 상인의 말에, 세 가지 다 넣어달라고 했다. 그랬더니 샌드위치 파는 상인의 눈이 동그래진다. 다 넣어달라고요? 아마도 현지인들 중에서는 셋 다 넣어서 먹는 사람은 없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관광객 입장에서는 토핑을 아무리 추가해도 너무나 싼 가격. 그리고 맛도 훌륭했다. 한국에 돌아와서 아무리 그 맛을 재현하려고 시도해봐도 그 맛이 안 난다. 아마 원인은 담백하고 깔끔한 맛의 남미 치즈에 있지 않을까.


밴은 꼬불꼬불한 산길을 타고 한참을 올라간다. 그러고 나서야 국립공원 입구가 나온다. 

트래킹을 시작한다.


애초에 해발 4500m 정도 되는 거대한 설산의 광경은 압도적이다.

이 대자연을 극복하고 오는 것이 가능할까, 겁이 나고 경외감이 절로 든다.

일행은 거의 네덜란드나 독일, 미국에서 온 길쭉길쭉한 서양 사람들. 나하고는 체력이나 체형이나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보였던 사람들.


 그 와중에도 두 명의 반가운 한국 남자분들이 보였다. 나보다 몇 살 위의 오빠들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군대를 전역하자마자 함께 남미 여행을 온 친구 사이라고 했다. 나와는 달리 저 밑에 파타고니아까지 갔다가 오실 예정이라고 해서, 파타고니아까지는 갈 여유가 안 되는 나로선 어찌나 부럽던지. 잘 다녀오셨는지 모르겠다. 


많은 사람들은 와라즈에 오자마자 머리가 어지럽고 속이 메슥거리는 고산병 증세를 느낀다던데, 나는 와라즈에 도착한 이래로 소화불량을 제외하고는 별다른 고통을 느끼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산을 오르려 한 발짝 발걸음을 떼자마자 식칼로 목의 기도를 콱 조이는 듯한 숨막힘이 느껴졌다. 이게 고산병이구나, 싶어서 공포감이 밀려오려 했다. 

그래도 앞사람들을 따라 부지런히 발걸음을 뗐다. 다행히 1분 이내에 숨이 막히는 통증은 사라졌다.


다만, 어마어마하게 힘든 나와의 체력싸움이 시작됐을 뿐. 

빼꼼, Laguna Paron의 에메랄드빛 물이 모습을 드러낸다.


중간중간 멈춰서서 사진을 찍기도 하고, 간식을 먹기도 하면서 트래킹이 이어진다.

역시 서양 언니오빠들이 체력이 좋다. 나는 조금 더 쉬고 싶은데 몇몇 사람은 이미 동네 뒷산 오르듯 성큼성큼 앞서나간다.

근데 이게 정말, 완만한 동네 뒷산 오르는 것과 달리, 등산길이 사진에 내가 걸터앉은 커다란 바위들로만 이루어져있다. 그래서 등산이라기보다는, 그야말로 커다란 바위를 두 손 두 발로 기어서 타고넘는 일의 연속이었다.

정말 아름다운 Laguna Paron의 물빛.

트래킹하는 거의 내내 이 호수를 내려다볼 수 있다. 

너를 볼 수 없이 내 앞에 회색 바위들만 가득했다면 나는 버티지 못했을 거야.

깎아지른 듯한 험한 경사.

잠을 몇 시간 못 자고 나와서 해발 4500m에서 등산하느라 꼴이 말이 아니다.

더웠다가, 칼바람이 불었다가. 높은 산의 날씨는 변화무쌍하다. 

험하디 험한 바윗길. 

듣자하니 69호수는 고도가 더 높고 등산코스가 긴 대신, 여기 Laguna Paron보다는 훨씬 등산길이 평탄하다고.

제대로 역광이지만 차라리 그게 다행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엄청 못생겼으니까.

그야말로 기가 막힌 등산길.

어디다 발을 딛고 어느 바위를 타고 올라가야 할지 매순간 선택하느라 더 힘들었다. 

점점 손이 군데군데 바위에 긁혔다. 트래킹화를 챙겨가지 않았더라면 정말 큰일날 뻔했다. 

프로다운 등산복을 갖춰입고 온 유럽 언니오빠들도 있었는데, 나는 그냥 스키니진 차림으로 올랐다.

바윗덩어리들과의 사투 끝에 정상에 도달했다.

능숙하게 '잘' 오르지도, 빠르게 오르지도 못했지만

그래도 해냈다.

고산병 증세와 너무 힘든 코스 때문에 중도 포기를 선언하는 사람도 많다고 들었다.

하지만 도중에 포기하지 않았다. 끝까지 뽈뽈대며 잘 올라왔다. 

마라톤 대회에서 빠르게 들어온 1,2,3등에게만 메달을 주는 것이 아니라 '완주'한 사람에게도 메달을 주는 것처럼, 힘든 일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붙들었다는 건 분명 의미있는 일이다.

죽을만큼 힘들지만 이 호수의 빛깔만은 질리지가 않는다. 

호수의 빛깔을 만끽하는 중. 

한동안 내 카톡 프로필 사진이 되기도 했던 사진.

베테랑 탐험가, 혹은 '프로 여행러'의 포스를 뿜어내는 사진이지만 현실은 유럽 언니오빠들에게 한참 뒤쳐지는 루저였다.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

-고은, <그 꽃>


등반을 마치고 나서야 나도 내가 걸어온 길들을 돌아본다. 

잊지 말아야지, 이 험한 바위들이 내 손바닥을 스치는 느낌도, 자꾸만 바위틈에 빠지던 내 신발도, 자꾸만 흘러내리던 선글라스도, 이리저리 쏠리며 내 무게중심을 방해했던 백팩도.

예감이 아주 괜찮은 날씨의

하늘과 태양은 밝다 못해 아름다워

맥박은 차분해

말은 안 해도 느껴질 걸

이제의 나는 어제의 나를 바라보지 않네.


-비와이, Day day

등반을 마치고 이제 하강할 시간.

올라가는 건 죽도록 어려웠으니 이제 내려가는 건 조금 쉽지 않을까? 했는데 전혀 아니었다.

내 기억엔 하강하는 것이 더 아찔하고 진땀나는 순간이었다.

왔던 길을 그대로 다시 돌아가는 게 아니라, 산 절벽(?)을 타고 그대로 호수 가까이 가는 하강 코스였다.

올라갈 때는 틈틈이 산 사진도 찍으며 여유를 부렸지만, 하강할 때는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똑바로 걸어 내려갈 수 없을 정도로 가파른 경사라서 발을 디딜 때마다 주먹만한 돌멩이들이 아래로 떨어졌다. 게다가 주위에 손으로 붙잡을 만한 것이 아무도 없었다.


발을 헛디딘다면 그대로 뚝 떨어져서 저 아름다운 에메랄드 호수로 다이빙하게 될 것 같은 느낌이랄까.

눈 앞의 지나치게 아름다운 광경과 내가 처한 진땀나는 상황과의 묘한 조화.

물론, 그 와중에도 저 사진 속 유럽 언니오빠들은 잘만 내려간다. 급기야 겁도 많고 운동신경도 둔한 내가 제일 뒤로 뒤쳐진다. 보다못한 아킬포 브라더가 내 손을 잡고 하강을 돕는다. 매번 내가 '으앗!' '아악!' 하고 짧다란 비명을 지르니가 아킬포 브라더가 깔깔 웃는다.

"왜 웃어?"

"아니, 네가 내는 소리가 너무 웃겨서. 나는 여기 맨날 와서 아무렇지도 않은데."


여기를 맨날 오다니, 정말 대단한 페루남자. 나는 다시는 못 올 것 같아.

결국 멋진 페루의 남자, 아킬포 브라더와 사이 좋게 손을 잡고 꼴찌로 하강!

너무 못생겨서 도저히 선글라스를 벗을 수가 없어.

아름다운 호수 물빛이나 말없이 감상합시다.

그대로

풍-------------덩

빠지고 싶다.

아, 드디어 용기내서 벗었다, 선글라스.

이제 보니 생각보다 괜찮은 몰골이다. 역시 한 살이라도 어렸을 때가 귀여운 건가 보다.

무엇보다도 선글라스를 벗어야 예쁜 물빛과 하늘빛이 제대로 보이니까. 

산과 호수 모두, Adios!

산 입구에 주차한 밴 앞에서 놀고 있던 귀여운 송아지들.

길었던 트래킹을 마치고 이제 다시 와라즈 시내로 돌아간다. 

에보니 호텔 앞을 지나가는, 전통 복장을 한 아주머니.

이런 복장을 한 사람들을 리마에서는 볼 수 없었지만 와라즈에서는 실컷 볼 수 있다.

챙이 있는 모자에, 가디건을 걸치고, 밑에는 풍성하게 퍼진 치마를 입은. 

약간의 와라즈 시장구경.

희한한게 여기는 닭이 노랗다. 원래 그런 품종인 걸까? 특이하게 발까지 다 붙어있는 상태로 판다.

아마 저녁밥으로는 중국음식을 먹었던 것 같다.

페루에는 중국 식당, 엄밀히 말하면 상당히 현지화된 야매 중식을 파는 곳이 많은데, 이걸 남미에선 Chifa라고 부른다. 한국에서 먹던 맛을 기대하며 해산물 볶음밥을 주문했는데... 음. 후회가 막심했다. 오징어나 새우 같은 해산물이 들어있을 줄 알았는데 희한한 골뱅이만 가득하더라. 


마음 같아서는 에보니 호텔에서 또 혼자서 휴식을 취하고 싶었지만, 빡빡한 일정이 그런 여유를 허락하지 않는다. 

무거운 배낭을 다시 챙겨서, 밤 버스를 타러 크루즈 델 수르 터미널로 향한다.


이제, 사막을 보러 간다.

페루 이카의 와카치나 사막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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