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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람지 Dec 03. 2017

마추픽추에서는 삶을 찬미하자

저는 살아있기 때문에 이 모든 아름다움을 보고 있습니다. 마추픽추에서.

 쿠스코 근교 투어를 갔다온 저녁. 서둘러 샤워를 하고, 다음 날 입을 옷을 그대로 입은 채로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챙겨 갈 배낭을 미리 싸고, 침대 바로 가까이 트래킹화까지 세팅한 채로.


 몇 시간 잠을 자지 못했다. 마추픽추로 가기 위해 나를 아구아스깔리엔떼스 역까지 픽업해 줄 투어 차량이 새벽 네 시쯤 호스텔 앞에 도착하기 때문에. 자는 둥, 마는 둥, 새벽에 일어나 차가운 공기에 몸을 부르르 떨며 하얀색 밴에 몸을 실었다. 이미 몇 명의 관광객들을 싣고 있던 밴은 이곳저곳을 돌며 손님을 더 태운 후 한참을 새벽을 달린다. 덜컹덜컹 움직이는 차 안에서 잠이나 잘 수 있을까, 걱정했던 것은 기우였다. 누적된 여행 피로 덕에 나는 정신없이 잠에 빠졌다. 


 눈을 뜨니 오얀따이땀보 역. 마추픽추로 향하는 관광객들을 상대로 따뜻한 차, 샌드위치, 우비 등을 파는 상인들이 새벽을 맞는다. 이제 기차를 타면 되는 걸까? 인파에 몸을 맡기고 혼자서 주춤주춤 기차 플랫폼을 향해 초조하게 걸어갔다. 

눈이 시리도록 새파란 몸체의 페루 레일 기차, 그리고 단정한 차림의 승무원들을 보니 마음이 들뜬다. 내 자리를 찾아 앉는다.

상당히 고급스럽고 따뜻한 내부. 세계 각국의 사람들이 들뜬 표정으로 아침 기차에 오른다.

승무원들은 승객들 모두에게 간단한 과자와 함께 따뜻한 커피나 티를 제공한다. 

마추픽추로 향하는 길이 이렇게나 멀 줄이야. 밴을 타고 역까지 오는 데만 두 시간이 걸렸는데, 기차는 또 다른 두 시간을 달린다.

마침내 도착한 아구아스 깔리엔떼스. 마추픽추로 가기 위한 마지막 관문인 셈이다. 나도 다른 많은 관광객들처럼 아구아스깔리엔떼스에서 하룻밤을 자고 마추픽추를 보러 가고 싶었는데, 일정을 짜는 데에 한발 늦는 바람에 적당한 시간대의 기차표를 사는 데 실패해서 그렇게 되지 않았다.

마추픽추까지 가려면 여기서 또 전용 셔틀버스를 타야 한다. 길게 늘어선 줄이 보인다.

왼쪽은 마추픽추 입장권, 오른쪽은 왕복 버스 티켓이다. 

쿠스코에서 모든 교통편(픽업 밴, 왕복 기차표, 왕복 버스 티켓)과 입장권을 여행사에서 구매했기 때문에, 가이드가 일괄적으로 일행들에게 티켓을 나눠 준다.

굉장히 길게 늘어선 길 덕분에, 그리고 스페인어를 잘 못 한다는 공통점 덕분에, 함께 줄을 서던 내 또래의 미국인 여자아이들과 가벼운 수다를 떨었다. 미국에서 온 교환학생 두 명, 그리고 이미 대학을 졸업하고 초등학교 교사로 일하며 방학을 맞아 여행을 온 두 명. 혼자서 남미 대륙을 돌고 있다는 나를 대단하다며 엄지를 척 올린다. 

버스를 타고 또 다시 산의 깊은 품으로 들어간다.

마추픽추가 이렇게 산 속에 숨겨진 곳이었을 줄은 몰랐다. 

우르르르.

잔뜩 들뜬 관광객의 인파에 휩쓸려 드디어 마추픽추에 입성한다.

새벽 네 시 반쯤 숙소를 나왔는데, 마추픽추는 11시가 되어서야 입장할 수 있었다. 

참으로 만나기 힘든, 그리고 참으로 깊은 곳에 꼭꼭 잘 숨어도 있는 너, 마추픽추.

대체 얼마나 근사한 곳이길래 이렇게 닿기 힘든 곳인 거니. 

궁금증을 도저히 참을 수 없다며, 저 모퉁이를 도는 순간......

아!

하고 탄성을 저절로 지르게 되는 마추픽추의 전경이 눈 앞에 드러난다.

<꽃보다 청춘> 페루 편에서 유희열 일행은 짙은 안개 때문에 한참을 기다린 후에야 만날 수 있었던 이 마추픽추의 모습이, 다행히 이 날은 날씨가 좋아 바로 깨끗하고 선명한 모습으로 나를 맞이한다.

그토록 염원했던, 그토록 궁금했던 곳이 내 눈 앞에 있다. 그리고 내 두 발로 딛고 있다.

우리가 여행사에 낸 금액에는 마추픽추 가이드 비용까지 포함이 돼 있었는데, 이 시끌시끌하고 장난스러운 미국인 여인네 덕분에(?) 가이드를 그만 놓치고 말았다. 유쾌한 이 친구들은 "우리는 우리 방식대로 구경하자!" 하며 깨방정을 떨어댔다. 

I see skies of blue(파란 하늘이 보여요)

And clouds of white(구름은 하얗고요)

The bright blessed day(화창하고 맑은 날이네요)

The dark sacred night(밤은 어둡고 신성하지요)

And I think to myself(그러면 나는 생각해요)

What a wonderful world(얼마나 아름다운 세상인지...)

마추픽추에는 유적 전체를 따라 흐르는 수로가 있다.

지금도 물이 졸졸졸 흐르고 있다.

잉카인들이 살던 먼 옛날부터, 그리고 깊은 산 속의 폐허가 되어 아무도 찾지 않았던 시절을 지나, 전 세계에서 가장 사랑받는 관광지가 된 지금까지 물은 흐른다. 

그 꾸준함을 떠올리니 왠지 가슴이 찡하면서 기특했다. 

가이드의 설명에 의하면 돌을 쌓아놓은 형태를 보면 이 곳에 누가 살았는지 유추할 수 있다고 했다. 이 사진처럼 자잘한 돌이 그다지 정교하지는 않은 상태로 쌓아져 있는 건물들은 평민이, 중간 크기의 돌이 비교적 정돈된 모습으로 쌓아진 건물들은 그 위의 계급이, 그리고 아주 커다랗고 매끈하게 잘린 돌들이 매우 정교하게 쌓아올려진 건물들은 지배층이 이용하는 건물이었다고 한다. 

마추픽추에도 원래는 전부 지붕이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흔적조차 없지만.

지붕이 있던 자리는 전부 하늘로 뻥 뚫려서 마치 하늘을 담는 우물처럼 보인다. 

신이 난 미국 친구들. 

내 사랑 라마와 함께. 

잉카인이 뚫어놓은 창문을, 라마 하나 나 하나씩 차지하고서.

아찔한 경사의 계단을 따라 잉카의 태양이 내리꽃힌다.

같이 다니는 두 미국인 친구들은 신이 나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한다.

자기 오빠가 여자친구한테 프로포즈를 한 곳이 바로 이 곳, 마추픽추라는 이야기.

그러다가 나에게 점프샷을 찍어달라 부탁을 하는데, 실컷 찍고 나서 관리인이 "여기서 점프하면 안 돼!"하고 경고를 주니까 어설픈 스페인어 발음으로 "미안합니다"를 해맑게 외친다. 못 말리지만 미워할 수 없는 귀요미들.

이게 바로 그 유명한 잉카의 해시계. 저 뾰족 솟은 돌이 시간을 알려주는 역할을 한다. 

옷과 가방까지 예쁘게 맞춰 입고 온 두 단짝 친구들. 보통 흔히 만나는 서양 사람들은 나보다 체구가 큰데, 이 두 친구들은 키가 아주 아담해서 마치 두 명의 팅커벨을 하루 종일 달고 다니는 기분이었다. 

검푸른 와이나픽추의 빛깔은 참 근사하다. 

엄청난 규모의 마추픽추는, 그 안에서 움직이면서 사방을 둘러볼 때마다 새로운 광경이 펼쳐진다. 조금 걷다가 뒤를 돌아보고, 또 조금 걷다가 뒤를 돌아보면 또 전혀 다른 느낌이 드는 변화무쌍한 공간이다. 

안녕.

이 곳이 정말로 잉카인들이 거주하고 있었을 때의 모습은 어땠을까.

누군가는 여기서 별을 관측하고, 누군가는 행정을 맡아보고, 누군가는 제사를 지내고, 또 누군가는 농사를 짓고, 라마를 기르고, 아이를 낳고, 가정을 꾸렸겠지. 

마추픽추에는 세상에서 제일 운 좋은 라마들이 산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살면서 더도 덜도 말고 딱 한 번만 와 보길 원하는 곳에서, 하루 종일을, 아니 평생을 살 수 있는 라마기 때문이다.

이 곳에 담겨 있는 기나긴 세월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실컷 햇볕을 쬐고, 풀을 뜯고, 제 새끼를 돌본다.

마추픽추의 라마와 내 라마(이름은 다비드)의 역사적인 투샷.

분명 아까 입장하면서 봤던 같은 풍경인 것 같은데, 이렇게 살짝만 위치가 바뀐 곳에서 되돌아보면 또 다른 느낌의 마추픽추다.

그래서 다시 한 번, 아니 수백 번도 더 카메라를 들 수밖에 없다. 그리고 똑같은 위치에서라도 자꾸만 셔터를 누를 수밖에 없다. 얼마든지 보아도 감회가 새로운 곳이라서. 

셀카 한 번, 풍경 한 번.

그렇게 한참을 사진을 찍는다. 

정오가 넘어가면서 한결 마추픽추는 평화로워졌다.

새벽에 입장하던 관광객들의 들뜬 마음이, 어서 구경해야겠다는 욕심이 잦아들고

다들 마추픽추의 오랜 세월을 견뎌낸 고고함에 천천히 동화되는 시간이라서 그런 걸까. 

내 표정도 훨씬 더 편안해보인다. 

여행 45일차. 

수고했어, 오늘도. 오늘 모험도 성공적이었어. 

있잖아, 내가

지금, 여기

...왔어! 내가 마추픽추에 와 있다고!

이렇게, 또 다시, 문득 고개를 돌려 바라보면 또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는 마추픽추의 전경. 

너무나 아름답다. 

카메라를 들고 다가가는 내게, 라마는 제대로 얼굴을 들이대 준다.

오후의 한때. 라마와 라마의 새끼는 풀밭에 스핑크스 자세로 엎드려 해바라기를 한다.

그 옆에 한 꼬마가 자연스레 철푸덕 앉는다.

아름다운 마추픽추의 오후다.

어쩐지 자꾸만 보고 싶어지는 평화로운 사진. 

어린 소녀는 라마 엄마를 어루만지고, 라마 엄마는 소녀의 손길을 피하지 않는다. 라마 새끼는 엄마의 젖을 찾는다.

코믹한 표정으로 나와 사진을 찍게 된 가엾은 라마. 

이 지역의 산들은 모두 이렇게 경사가 심하고 초목의 색깔이 짙게 검푸르다. 

마추픽추 안에는 Inca Bridge라는 곳이 있다. 말 그대로 잉카 사람들이 건넜던 작은 다리인데, 안전 문제 탓인지 실제로 건너볼 수는 없고, 그 앞 까지는 가 볼 수가 있다. 잉카 브릿지를 가려면 잉카 브릿지 입구에서 본인의 이름과 입장 시간, 퇴장 시간을 기록해야 한다. 

잉카 브릿지를 가는 길, 북적북적한 유적을 살짝 벗어나서 마추픽추를 품은 이 산들의 다른 면들을 구경할 수 있다. 아마 오랜 세월 인간의 문명은 사라지고 나타나며 변화를 거듭하는 동안, 거의 변치 않았을 자연의 모습을 보니까 기분이 묘했다. 

잉카 브릿지를 보러 가는 길. 평범해 보이는 흙길이지만 아마 잉카 사람들이 다져놓고 밟은 길일 것이다. 이 좁은 길 바로 아래는 가파른 낭떠러지에 가깝다. 

멀리 사람 사는 마을도 보인다. 


잉카 브릿지의 모습. 왜 관광객이 지나갈 수 없는지 알 것 같다. 돌로 만든 좁디 좁은 길에 나무로 된 작은 다리만  턱 얹어져 있다. 아마 매일 돌계단을 타고 다니는 잉카인들에겐 일상적이고 안전한 길이었을지도 모르겠지만.

잉카 브릿지 구경을 마치고 다시 유적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벌써 오후가 되고, 마추픽추는 한적해졌다. 

라마는 한가하게 풀 위에 걸터앉고, 이미 구경은 다 마쳤지만 한 번 방문하면 다시는 찾아오기 힘든 이 곳을 떠나기 아쉬워하는 관광객들도 각자의 명당에 자리를 잡고 앉아 신선놀음을 한다. 

아까는 가 보지 못했던 쪽에도 한 번 가 보고. 

발 밑에서 졸졸 상쾌한 소리를 내면서 흐르는 수로도 다시 한 번 찍어보고. 

마추픽추를 떠나기가 너무 아쉬워서, 이렇게 앉거나 드러누워서 버티는 사람들이 많아진다.

나도 내가 앉아 쉴 자리를 탐색한다. 

여기가 좋을 것 같아

라마 인형과 함께 풀밭에 털썩 앉았다.

남미에 오기 직전에 산 연한 청바지는 나와 험한 여정을 함께 하며 온갖 물이 들었다. 흙탕물은 기본이고, 클렌징오일이 엎질러지면서 그 클렌징 오일이 바지와 닿는 모든 주변의 염료들을 흡수했다. 


이어폰을 꺼내서 귀에 꽂았다. 여기서는 어떤 노래를 들어야 어울릴까?


어제의 일들은 잊어

누구나 조금씩은 틀려

완벽한 사람은 없어

실수투성이고 외로운 나를 봐


난 다시 태어난 것만 같아

그대를 만나고부터

그대 나의 초라한 마음을

받아준 순간부터

하루하루 조금씩 나아질 거야

그대가 지켜보니

힘을 내야지 행복해져야지

뒷뜰에 핀 꽃들처럼


내가 굳이 먼 남미까지 떠나게 만든 결정적 계기는 실연이었다.

그 때는 정말 삶의 의미를 잃은 듯, 곧 죽을 듯 힘들었는데

살아있기 때문에 이렇게 모진 일을 겪고 비참해지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또한 살아있기 때문에 이렇게 아름다운 광경을 보고 있다.

살아있다, 는 똑같은 이유로 인해서. 


실연을 겪지 않았다면 떠나겠다는 과감한 결단은 내리지 못했을 것이다.

그 때의 연애가 내게 최고의 행복을 주고 있다고 믿었는데, 또 한편으로는 족쇄였을수도 있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이렇게 긴 여행을 다녀오겠다고 해도 붙잡거나 원망할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가능한 여정이었다. 

모든 일에는 동전처럼 양면이 있고, 행복은 어디에나 있었다. 

가까이 다가와준 라마에게 작별을 고하고 마추픽추를 나왔다.

너무 늦게 나오면 혹여나 마지막 셔틀버스를 놓칠까 두려워서.

다시 내려온 아구아스깔리엔떼스 마을.


가이드북에서 아구아스깔리엔떼스에서는 온천을 즐길 수 있다고 본 것 같은데, (하긴 애초에 마을 이름이 Aguas Calientes, '뜨거운 물'이라는 뜻이다) 나는 온천을 찾지 못했다. 오얀따이땀보로 돌아가는 내 기차표는 한참 밤 시간이었던지라 뭐라도 할 게 필요했고, 나는 뜨거운 물에서 몸을 좀 녹이면서 여독을 풀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발견한 꿀팁인데, 아구아스깔리엔떼스에는 곳곳에 마사지샵이 많다. 혹시나 해서 마사지샵 가까이 가서 보니까 '샤워 가능'이라고 써 있는 게 아닌가? 직원에게 샤워 할 수 있냐고 물어봤더니, 저렴한 가격에 샤워시설 이용이 가능하다고 했다. 기왕 나도 온 김에 마사지까지 받고 싶었지만 예산 부족으로 그냥 샤워만 즐기고 왔다. 보송보송 산뜻해진 기분으로 저녁도 맛있게 먹고, 기차역에서 일기도 쓰다가, 약 9시쯤 다시 페루레일을 탑승했다. 또 다시 길고 긴 이동 끝에 쿠스코 숙소에 도착하니 거의 새벽 2시가 다 된 시간. 


또 엄청난 피로가 쌓인다. 


 쿠스코에서의 여느 밤과 마찬가지로 아주 짧디 짧은 새우잠을 잤다가, 두세 시간 후에 일어나 쿠스코 공항으로 가는 택시를 탄다. 이제 페루를 떠나 볼리비아로 가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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