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이과가 존재하던 시절에 학교를 다녔던 필자는 전형적인 문과 학생이었다. 수학을 제일 못했고, 과학은 아예 이해를 할 수 없어서 포기했다. 살면서 미적분을 다시 풀 일도 없었고 물리나 화학을 몰라도 먹고사는 데는 아무 지장이 없었다. 그런데 반백 살이 넘어서 다시 과학책을 읽으며 혼자 공부를 시작했다. 이유는 도무지 설명할 수 없는 세상을 과학은 설명해 줄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물리학책을 읽으면서 양자역학과 마주한 순간을 기억한다. 같은 부분을 수십 번 읽으며 당황했기 때문이다.
미국의 이론 물리학자인 리처드 파인먼(1965년 노벨물리학상)은 “이 세상에 양자역학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라고 단언했다. 그런 양자역학을 연극 무대에서 만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신선하고 새로운 경험이다. 무대에 ‘양자역학’을 주제로 워크숍 공연을 준비하고 있는 극단 상어의 단원들이 등장한다. 단원들은 연극과 거리가 멀어 보이는 ‘양자역학’에 묘한 매력을 갖기 시작한다. 단원들은 서로 양립할 수 없는 두 개념이 혼재되어 있는 자연의 원리를 이야기하는 이 불확실한 주제에 이끌려 워크숍을 시작하기로 결정한다.
양자역학, 페미니즘, 소통을 담은 공동 창작 과정
한편 극단 상어의 대표 홍예성은 연극계 페미니스트 대표주자인 이해원 연출과 함께 젠더 공연을 만들기로 한다. 50대이자 가부장 세대인 홍예성은 이 공동 연출 준비를 통해 페미니스트와 소통을 시도한다. 그동안 연극계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에 걸쳐 이런 노력이 부족했다는 생각에서다. 이쯤 되면 이 연극의 틀이 되는 양자역학과 페미니즘, 워크숍과 공동 창작 과정, 이런 것들이 어떻게 연극이 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을 갖게 된다.
연극 <우리>는 연극을 만드는 과정 자체를 연극으로 만드는 메타적 다큐멘터리 연극이다. 연극 무대에서 새로운 창작 방식으로 등장한 공동창작 과정이 이 연극에서도 사용된다. 이 연극 역시 인터뷰에 기반한 공동창작, 리서치 과정을 중심으로 만들어졌다. 그래서 완성된 대본이 아니라 창작 과정을 통해 공동으로 대본을 만들어가거나 창작 과정의 모든 기록이 대본이 되기도 한다.
무대 밖의 현장을 촬영해 극 구성에 넣기도 하고, 무대 밖 다른 공간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공연장 관객들이 영상으로 지켜보게 하기도 한다. 영상 속 상황이 무대 위 상황으로 이어지게 하는 입체적인 구성을 하기도 한다. 무대 예술이 갖는 한계를 벗어나 무대 아닌 공간으로 영역을 확장하는 시도이다. 관객들은 연극이지만 연극이 아닌 것 같은 날것의 과정을 지켜보아야 한다. 반응은 긍정적일 수도, 혹은 부정적일 수도 있다.
다시 워크숍 현장으로 돌아가 보자. 새로운 연출 방식에 혼란스러운 단원들은 공연이 2주도 남지 않자 구체적인 완성물이 없는 상황에 동요하기 시작한다. 공동 연출을 위한 홍예성 연출과 이해원 연출의 갈등이 절정에 이르자, 이해원 연출은 작업에서 하차를 선언한다. 소통의 길은 막히게 되고 연극의 앞날을 불투명해졌다. 이제 이 연극의 결말은 어디로 가야 할까?
소통이란 입자가 파동을 일으키기 위해서
젠더, 계급, 세대라는 틀을 놓고 보지 않아도 등장인물들의 대화는 우리가 겪고 있는 ‘소통의 어려움’을 그대로 보여준다. 우리가 일상 속에서 밥 먹듯 하고 있는 답 없는 대화를 지켜보는 것은 불편한 일이다. 이 불편한 대화를 우리가 보아야 하는 이유에 답하는 것은 이 연극의 몫이자 과제다. 연극에서 보여준 치열한 소통이란 입자가 파동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과학이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다.
유전자의 수준으로 따져 들어가면 모든 인간의 유전자는 다른 사람의 유전자와 99.5%가 같다고 한다. 침팬지와 인간의 유전자는 심지어 99%가 같다는 것이다. 더 안으로 들어가 보면 모든 것은 원자로 구성되어 있고 원자를 구성하는 모든 전자는 똑같다. 즉 남자도 여자도, 부자도, 빈자도 과학적으로 따져 들어가면 우리 존재는 모두 평등하다는 사실이다.
‘본다는 것’에 대한 과학의 정의도 새롭다. 전자는 입자이지만 파동이어서 한 궤도에서 다른 궤도로 ‘짠’하고 나타날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가 전자의 위치를 파악하는 순간 전자는 그곳에 없다는 것이다. 빛 역시 입자이자 파동이어서 우리가 무언가를 보았다고 느끼는 그 순간 그것은 더 이상 우리가 본 것이 아닐 수 있다. 양자역학으로 보면, 우리는 본 것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보았다고 믿는 것을 그린다는 것이다. 그러니 연극 <우리>가 보여 준 현실은 불편하지만 생각해 볼거리를 던진다. 내가 보고 판단한 것이 그게 아닐 수도 있다는 과학적 사실을 싫어도 생각할 것. ‘과학적 근거’를 노래로 부르는 요즘 세상에서는 더 말이다.
* 이 리뷰는 민중의 소리에 게재되었습니다
연극 <우리>
공연날짜 : 2023년 11월 9일(목) ~ 11월 19일(일)
공연장소 : 연우소극장
러닝타임 : 110분
공연시간 : 평일 20시/주말 16시/월요일 공연 없음
관람연령 : 중학생 이상 관람가
출연진 : 정나진, 박윤선, 한아름, 사현명, 안소진, 박형욱, 구한나, 손아진
티켓예약 : 인터파크 예약, 네이버 예약
공연문의 : 070 - 7818 -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