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보이스피싱에 빠진 날

by 하울

문자 알림이 울렸다.

‘고객님이 신청하신 TV 99만원 결제 완료.’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며칠 전부터 TV를 새로 사겠다던 남편의 얼굴이 스쳤다.

‘결국 고집을 꺾지 않았구나.’


남편은 멀쩡한 텔레비전을 구닥다리라며 쥐어박았다.

유튜브가 안 나온다는 이유였다.

나는 버릴 줄 모르는 사람이라,

“멀쩡한 기계 버리면 벌 받는다”며 겨우 달랬었다.


어젯밤에도 그렇게 말했는데,

또 누가 부추겼을까.

화를 삭이지 못한 채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지금은 회의 중입니다’라는 냉정한 기계음만 돌아왔다.


답답한 마음에 결제 사실이라도 확인해 보려 했다.

02로 시작되는 번호였다.

전화를 받는 목소리는 상냥했다.


혹시 인증번호를 받은 적 있느냐 묻기에, 없다고 했다.

몇 가지 질문이 이어졌고,

마지막으로 “가족 중 대신 구매할 분이 있냐”는 말에

마음속 뇌관이 터졌다.


“내가 주문 안 했다니까! 당장 취소해요!”

상담원은 “청구는 통신요금에 합산될 것”이라며

사이버 조사대로 문의하라고 했다.

그 말을 믿고 전화를 걸었다.


“이미 고객님의 명의로 된 계좌에서

수억 원이 해외로 인출된 정황이 있습니다.”

그 말에 숨이 막혔다.

심장은 북처럼 울렸다.


‘차분하자, 법이 있으니까 괜찮을 거야.’

스스로를 달래며 말했지만 손이 덜덜 떨렸다.

개인정보가 유출됐다며,

신분증 사진을 삭제하라고 했다.


나는 정신없이 시키는 대로 움직였다.

그들은 내 휴대폰을 원격으로 조종하며

보안을 점검하겠다고 했다.


화면이 낯선 손에 휘둘리는 동안,

나는 그저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금융감독원에 확인해보시죠.”

잠시 후 또 다른 번호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이번엔 사이버수사대란다.

그들은 낮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 계좌가 대규모 금융사기에 사용됐습니다.


이틀 뒤 체포 예정입니다.”

순간, 정신이 허공으로 흩어졌다.

직위 박탈, 연금 정지, 체포.

이 단어들이 머릿속을 휘젓고 다녔다.


“저는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입니다. 제발 도와주세요.”

나는 울먹이며 빌었다.

그들은 친절하게도 “협조만 하면 된다”고 했다.


“남편이나 자녀에게는 이틀간 비밀로 하세요.

통화 사실이 들키면 가족도 수사 대상이 됩니다.”

나는 아바타처럼 움직였다.

조용한 곳으로 숨어들어 그들의 지시에 따라갔다.


“지금부터 담당 검사와 연결합니다.”

전화기 너머에서 거친 남자의 목소리가 터졌다.

“서류 가져와 봐!”

종이 넘기는 소리, 그리고 고함.

“당신, 이 사건이 얼마나 심각한지 알아?! 체포해!”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민주화가 되었어도 권력은 여전하구나.’

화장실 바닥에 웅크린 채 숨을 죽였다.

그들은 약식기소 처리해 주겠다며

“지금 바로 은행 계좌로 거액을 예치하라”고 지시했다.


나는 두려움에 이성을 잃고 움직였다.

대출서류를 발급받고, 돈을 인출했다.

간첩처럼 주변을 경계하며.


그때 택시 기사님이 내 얼굴을 보더니 말했다.

“어디 아프세요?”

나는 아무 대답도 못 했다.

반나절 동안 전화에 붙들려 있었으니 기운이 빠질 만했다.


그는 백미러를 보며 혼잣말처럼 말했다.

“요즘 건강이 최고라니까.”

그 순간, 그의 전화가 울렸다.

“뭐라고, 또 우리 아들이 다쳤다고? 에이 참.”


그는 보이스피싱인 걸 알면서도

“그래도 확인은 해야 맘이 놓이지” 하며

전화를 붙잡았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내 머릿속에 불이 번쩍 켜졌다.

‘혹시… 나도?’

나는 다급히 택시에서 내렸다.


조카에게 전화를 걸었다.

검찰청에 근무하는 아이였다.

잠시 후, 조용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모, 그거 100% 보이스피싱이에요.”


나는 그대로 주저앉았다.

풀려난 인질처럼 온몸의 힘이 빠졌다.

햇살은 이미 기운을 잃었고,

내 마음엔 허무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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