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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팔랑심 Jan 15. 2024

[빚의사] 4. 도박과 빚

나는 어쩌다 빚이 7억 인 의사가 되었을까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선생님 말씀 잘 듣던  범생이였던 내가 재수까지 해서 어렵게 들어간 의과대학교에서 그것도 가장 중요하다는 4학년 때 도박에 빠졌다.  정확한 이유는 모른다.  그저 강의실 옆의 라커룸에서 동기들의 도박판이 종종 벌어졌다는 점과  평소 오락이나 화투 등 잡기를 좋아하던 내 성격이 만나서 잠시 일으킨 불꽃이라고 생각한다. 그 불꽃 덕분에 오후 느지막이 시작해서 밤늦게까지 도서관에서 보냈어야 할 많은 시간을 도박판에서 보냈다. 매점이 문을 닫는 밤늦은 시간에 담배까지 떨어졌을 때는 바닥에 버렸던 꽁초까지 주워서 다시 피울 정도로 정말 목불인견의 시절이었다. 물론  담배는 20년 전쯤에 끊어서 지금은 피우지 않는다.  그때 나와 동기생들이 했던 도박은 카드를 이용한 블랙잭이라고 하는 도박 게임이었다.

 


블랙잭은 일반적인 도박이 다 그렇듯이 운에 따라 승패가 좌우되었는데 다른 카드 도박과 다른 점은 카드를 한 장 혹은 두장 더 받을 것인가 말 것인가를 배팅하는 사람이 정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미 배팅 판에 오픈되어 버려진 카드를 제외하고 딜러의 손에 히든으로 남아 있는 카드가 무엇인지 예측할 수 있는 두뇌가 있다면 좀 더 승률이 높아서 과학적인 측면도 가지고 있다.  

과감한 선택과 정확한 예측은 블랙잭에서 승리할 확률을 높인다. 그리고 그 둘은 내가 잘하지 못하는 것들이다. 결국 몇 달간 도박판에서 지낸 대가로 나는 이십여만 원 정도로 등록금에 해당하는 돈을 잃었고 그 돈은 교과서를 사야 한다는 구실로 부모님께 타냈다. 그리 넉넉하지 않은 가정 형편에 의과대학 등록금까지 마련해 주시느라 힘들었을 부모님께 부끄럽고 죄송한 마음은 지금도 금할 길이 없다. 


그 몇 달간의 도박이 남긴 후유증은 그것뿐이 아니었다. 도서관 대신 도박판에서 지낸 4학년때의 내 성적은 매우 좋지 않았다. 의과대학 성적과 인턴 실습 점수가 전공의 선발에 아주 중요하게 작용하는 현실을 감안할 때 좋지 않은 의과대학 성적은 선택할 수 있는 전공과목의 폭을 좁게 만든다. 모교의 병원에서 내가 지원해 봄직한 과목은 산부인과나 일반외과, 마취과등이었고 하고 싶었던 내과는 당시의 내 성적으로는 선택하기 어려웠다.


지금 내가 시지프스의 돌처럼 지고 있는 많은 빚의 일부분이 그때의 도박으로 생기진 않았다. 그러나 4학년 때의 도박이 산부인과를 전공과목으로 택하도록 기여한 바가 적지 않으니 빚과 전혀 연관이 없지도 않다. 모교가 아닌 다른 종합병원에서 내과나 혹은 좀 더 편한 다른 과목을  전공할 수 있었겠지만 나는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다.


인생에서 예측과 선택은 매우 중요하다. 

사람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수많은 선택을 한다. 현재는 과거의 선택으로부터 빚어진 결과물이고 현재의 선택은 미래의 모습을 결정짓는다. 의과대학을 졸업하면 어느 진료 과목을 수련할지 선택해야 하고 어느 병원에서 수련할지 선택해야 한다.  수련을 마치고 나면 봉직 의사로 취업을 할지 아니면  개업 의사로 살지도 선택해야 한다. 개업 의사의 삶을 선택하고 나서도 동업을 할지 혼자 개원을 할지, 한다면 어느 지역에서 개업을 할지, 숱한 선택이 줄줄이 기다린다.  

그렇게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지만 모든 선택이 다 같은 무게로 중요하진 않다.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나서 내가 택한 무수히 많은 선택 중에서 어떤 선택은 만족스러웠고 어떤 선택은 후회와 아쉬움을  남겼다.  아직 평가하지 못한 선택도 있다. 개업 의사로 살기로 한 선택은 그리 후회스럽지는 않다.  다만 되돌아보면 산부인과 개업 의사라는 점과 빚의 연관성을 부인할 수는 없다. 물론 모든 산부인과 의사가 빚쟁이는 아니다. 또한 모든 개업  의사가 빚에 허덕이지도 않는다. 그러나 그 둘이 만나면 나처럼 빚쟁이 의사가 될 가능성이 조금  높아진다. 


도박과 나쁜 성적, 산부인과 개업 의사와 빚. 

앞의 것은 선택이 가능하지만 뒤의 것은 선택의 결과물이라는 점에서 그 둘의 관계는 많이 닮아 있다. 

"죄와 벌"을 쓴 러시아 소설가 도스토옙스키는 도박에 빠져서 생긴 빚을 갚기 위해 소설을 썼다고 한다. 도스토옙스키가 평생 빠져 산 도박이라는 죄로 그는 빚이라는 벌을 안았지만 그 덕분에  우리는 그의 수많은 명작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한때 잠깐이라도 도박을 선택한 대가가 결국 돌고 돌아 빚이라는 이름의 벌로 남은 나로서는 남길 명작도 없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묵묵히 무거운 돌과도 같은 몸을 끌고 진료실로 가는 4층 계단을 오르고 숙직실로 가는 3층 계단을 내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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