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분만 의사의 선택
"자신의 한계를 정확히 아는 것은 의사의 가장 중요한 덕목 중 하나다."
인터넷에 떠도는 어느 글에 내가 환자를 골라서 받는다고 하는 내용이 있는데 사실인가 묻는 보호자가 있었다. 정확하게는 출산할 산모를 가려서 받는다는 내용이 맞는지 묻는 질문이었다. 내 대답은 그렇다 이다.
일정 연령 이하의 아이들을 받지 않는다는 노키즈존이 있는가 하면 젊은이들이 주로 가는 클럽은 주민등록증을 검사하여 30세가 넘은 사람은 아예 출입을 금지한다고 들었다. 병원의 경우에도 그런 제한이 있는 경우가 있다. 칼로 피부를 베인 경우의 봉합이나 입술의 기형 교정 등 보험이 되는 질환의 환자는 보지 않고 비보험의 미용 성형 수술 환자만 보는 성형외과가 대부분인 것으로 안다. 아마 전문성에 따라 자신이 잘할 수 있는 것을 보려는 목적이겠지만 수입에 도움이 되는지 안되는지에 따라 받고 안 받고 가 나누어졌을 가능성도 있다. 진료나 시술에 의사가 쓸 수 있는 시간은 제한이 되어 있으며 체력에도 한계가 있으니 요즘 젊은이들이 잘하는 말 그대로 가성비에 따라 진료한다고 비난만 할 일도 아니다. 물론 의사가 돈을 좇아 진료 여부를 결정한다면 좋은 소리는 듣지 못할 것이다. 내가 환자를 가려서 받는다는 소문도 그다지 좋은 느낌을 담은 소문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내가 산모를 가려서 받는 기준은 수입과는 관계가 없다. 동네의 개인 의원에서 일하는 내 능력으로 감당이 가능한 산모인가 아닌가 가 기준이다.
30여 년 전 은평구에 처음으로 개업했다. 어디에 개업해야 하는지, 어떤 준비를 해야 하는지 아무것도 몰랐다. 그래서 분만 산부인과로 개업해서 20 년 이상 지역에서 탄탄한 기반을 잡은 선배님께 조언을 듣고자 찾아간 적이 있다. 그 선배님으로부터 여러 도움말을 들었지만 지금은 대부분 잊었다. 그러나 그때의 조언 중에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는 말이 있다.
“네 능력의 100%를 발휘해야 해결이 가능한 환자는 보지 말고 자신의 능력의 80% 정도 이하로 해결이 가능한 환자만 보아야 한다.”
당시 그 말의 의미를 모르는 바는 아니었으나 그렇게 가슴에 훅 들어오는 조언은 아니었다. 나는 경험이 미천한 초보 의사였다. 개업을 했으면 최선을 다해 환자를 보고 내가 최선을 다하면 감당 가능한 환자나 산모를 보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 선배님께서 나이가 들고 이미 병원이 안정적으로 운영되는 상태라서 그렇게 말하는 것이 아닐까 짐작했다. 내가 그때 선배 의사의 나이가 되고 보니 이제는 그 말의 의미가 이해가 간다.
자신이 가진 지식과 경험, 체력, 근무하는 병원의 시설과 장비, 주변 보조 인력의 능력을 모두 감안하여 100%의 최대 역량을 발휘해야 해결 가능한 환자를 다루다가 만일 그 수준을 넘어가는 상황이 발생하게 되면 매우 위험할 수밖에 없다.
의사의 길은 “다모클레스의 검”처럼 권한이 있는 만큼 책임 또한 막중하다. 권한만을 보는 욕심쟁이나 책임만을 보는 겁쟁이나 개업 의사로서는 자격 미달이다. 그 검의 의미가 실감 나게 다가왔다면 지금처럼 많은 학생들이 의과대학으로 쏠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오래전 체력이 좋았던 시절, 자전거를 타고 서울 집에서 경기도 두물머리까지 갔다 온 적이 있다. 아마 왕복 30 km 정도쯤의 거리였을 것 같은데 내 생각에는 그 정도 거리는 내 체력을 100% 발휘하면 감당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아마도 예상 밖의 돌발 상황이 생기지 않았다면 내 예상대로 자전거 라이딩이 끝났을지 모른다. 그러나 반환점 무렵에서 길을 잘못 들어서 원래 예상보다 5 km 이상 달려야 할 거리가 늘어나고 말았다. 돌아오는 길에 서울 집에 도착하기 전에 이미 내 체력은 고갈되었다. 42.195km의 풀코스 마라톤에서 35 km 구간을 마의 구간이라고 부른다. 도착 지점을 불과 7 km 남짓 남겨둔 이 지점에서 포기하는 선수가 많다고 들었다.
시간도 늦어 길도 어둑어둑해졌다. 페달을 구를 힘이 1 도 남아 있지 않았다. 아직 집은 먼데 자전거를 버리고 갈 수도 없고 난감하기 이를 데 없었다. 접이식 자전거가 아니라 택시에 실을 수도 없었다. 결국 용달차를 불러서 자전거를 싣고 집으로 돌아온 적이 있다. 내 인생의 흑역사 중 하나다.
인생을 살다 보면 예상과는 다르게 상황이 진행되는 경우가 생기게 마련이다. 의료 영역 또한 마찬가지다. 자신의 전력으로만 해결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범위까지 오만을 부리면 안 된다. 물론 진료하는 동안 최선을 다하지 말고 힘을 아끼라는 말이 아니다. 최선을 다하고 나서도 어느 정도 여유가 있는 수준이 되어야 예상 밖에 상황에도 대처가 가능하다는 말이다.
병원은 규모에 따라 개인 의원, 종합 병원, 상급 종합 병원으로 나누어진다. 이런 구분은 병원의 시설, 장비, 인력 등 여러 가지 지표를 기준으로 한다.
내가 운영하는 산부인과는 가장 기초 단위 규모의 소규모 의원이다. 의사인 나와 진료를 돕는 간호조무사 6 명 내지 7 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대략 한 층이 100 명 남짓인 건물의 두 개 층을 임대하여 운영하며 외래 파트로는 진료실과 대기실, 내진실, 검사실, 초음파실이 있고 입원실 파트로는 입원실, 분만실, 수술실, 신생아실이 있다. 분만을 담당하기 위한 시설로는 있을 것이 다 있지만 중환자실이나 신생아 입원실은 없다. 시설 외에 없는 것이 또 있다. 혈액은행과 상주 마취과 의사, 소아청소년과 의사가 없다. 물론 상급 종합 병원에는 이런 모든 것이 갖추어져 있다.
따라서 출산 병원으로 우리 병원을 찾아오신 분들께는 개인 의원으로서 우리 병원이 가지지 못한 것들과 여러 한계에 대하여 설명을 드린다. 이런 시설과 의사 혼자서도 사실 별 문제가 없는 대다수의 정상 임신부의 자연분만과 제왕절개는 무리 없이 감당해 낼 수 있다. 그러나 아무래도 고위험 요인을 가진 산모들은 보기가 어렵다.
동네의 병원을 운영하면서 고위험 산모까지 다 보는 것은 위험하다. 전치태반은 대표적인 고위험 요인이다. 옆 동네의 작은 병원의 원장은 전치태반 산모도 전원 하지 않는다고 자랑하던데 매우 우매한 짓이다. 또 어떤 병원은 혈액 팩 두어 개 만을 준비하고 전치태반 산모의 제왕절개를 진행한다고 들었다. 그러나 전치태반을 혈액은행을 보유한 대학병원이 아닌 곳에서 본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전치태반이 있는 산모의 출산 시 소량의 혈액 팩으로 감당할 수 없는 수십 병 이상의 대량 출혈이 발생할 위험이 항상 존재한다. 두어팩의 혈액을 수혈하는 동안 혈액원애서 혈액을 가져오면 된다는 생각이지만 혈액원에 맞는 혈액이 항상 비치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보는 산모는 큰 고위험 요인을 가지지 않은 분들로 대부분 정상 분만을 기대할 수 있는 분이다. 물론 정상 분만뿐 아니라 반복 제왕절개나 역아 혹은 진행이 되지 않아 응급 제왕절개를 하는 경우도 있다. 모두 수혈의 가능성이 높지 않고 내과나 외과 전문의의 협진이 필요 없는 경우들이다. 이렇게 나는 산모를 골라서 본다. 그럼에도 간혹 예상치 않은 상황이 생기기도 한다.
전치태반:
전치태반은 태반이 자궁의 입구를 막는 상황을 말한다. 완전 전치태반, 부분 전치태반, 가장자리 전치태반, 하부 착상 태반으로 나누며 제일 마지막 경우를 제외하고는 제왕절개 출산이 원칙이다. 흔히 출산 중 출혈이 많은 대표 질환이다.